220219 연중6주간 토 – 133위 065° 김조이 수산나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133위 065° ‘하느님의 종’ 김조이 수산나
이름 : 김조이 수산나
출생 : 1818년, 공주
순교 : 1868년 1월 20일, 교수?, 상주
김조이 수산나는 충청도 공주에 살던 김 안드레아의 딸로,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천주 교리를 배웠다. 성품이 선량하였던 그녀는 교리에 밝은 데다가 신자로서의 본분도 잘 지켰으며, 세속일도 잘 알았다. 또 일찍부터 동정을 지킬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주변 상황 때문에 나이가 들어 박 야고보와 혼인하였다.[1][1.1]
중년에 남편이 죽자 김조이 수산나는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데리고 시사촌(媤四寸)인 박양여 요한 사도[2][2.1]에게 의탁해 살았다. 그녀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기도와 묵상 생활에 충실하였고, 고신극기로 영혼을 닦는 데 노력하였다. 그뿐 아니라 죽을 위험에 처한 이들에게 대세를 주고, 자선도 베풀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순교자들을 칭송하면서 자신도 때를 만나 순교의 은혜를 얻을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김조이 수산나는 문경 호항리(狐項里, 현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의 여우목)에 살고 있었다. 박해 초기에 포교들이 들이닥치자, 교우들과 함께 두 차례나 산속의 굴로 피신했던 김조이 수산나는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녀는 “천주께서 나를 버리지 않고 불러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다 갚겠는가?”라고 하면서 병으로 고생하는 아들 박효훈 프란치스코와 딸 박 아가타의 손을 잡고는 “천당에서 만나자.”고 다짐하였다.
이내 문경 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된 김조이 수산나는 영장 앞에서 천주교 신자임을 정확하게 밝힌 뒤, 십계명과 기도문들을 암송하였다. 그런 다음 주장(柱杖)과 태장(笞杖)[2.2]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굳게 신앙을 증언하고 투옥되었다. 그뿐 아니라 두 달 동안 옥살이하면서 다시 주뢰형을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이후 영장이 사형을 결정한 뒤, 김조이 수산나는 옥중에서 집으로 편지를 보내 자식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아들 효훈아, 나는 너에게 다시 한번 가르침을 주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니 모시고 있는 삼촌의 명을 주님의 명으로 받아들이도록 해라. 딸 아가타야, 너는 헛된 혈육의 정으로 잠깐인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영원한 천당을 시댁으로 생각하여라. 너희 두 사람이 구령(救靈)에 힘쓰기를 바라며, 서로 화목한 사랑으로 지내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거든 내 뒤를 따라오너라.”[3]
당시 상주 진영에서는 1867년 1월 17일(음력 1866년 12월 12일)부터 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김조이 수산나도 1867년 1월 20일(음력 1866년 12월 15일)에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49세였다.[4] 김조이 수산나가 순교한 뒤 아들 박효훈 프란치스코는 모친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였다.
[註]__________
[1] 『치명일기』, 정리 번호 810번; 『병인치명사적』, 3권, 39-45면, 4권, 14-20면; 『박순집 증언록』, 3권, 19-22면. 『병인치명사적』과 『박순집 증언록』의 내용은 김조이 수산나의 아들 박효훈 프란치스코가 기록한 것으로, 서로 동일하다.
[1.1] 박 야고보 가족관계
[2]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영남 회장 박양여 요한 사도를 말한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183번; 『병인치명사적』, 3권, 45-53면; 『박순집 증언록』, 3권, 22-24면).
[2.1] 박양여 요한 사도 : 홍주에서 태어나 정해박해(1827) 때 상주에서 잡혀 대구에서 옥사치명한 福者 박경화 바오로(1757-1827)의 손자이고, 홍주에서 태어나 정해박해(1827) 때 부친과 함께 잡혔으나 처형되지 않고 13년간 옥살이하다가 기해박해(1839) 때 대구에서 참수치명한 福者 박사의 안드레아(1792-1839)의 아들이다. 박양의 요한 사도는 1870년 서울에서 치명하여 3대 치명자손이다. 박양여 요한 사도는 성 이윤일 요한 사도와 처남 매부지간이다.
[2.2] 대명률에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 등 5형(五刑)이 있었다.
범죄의 경중에 따라서 형벌의 위계를 정해놓은 것인데, 5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범죄에 적용되던 형벌이 바로 태형(笞刑)이었다.
태형은 태(笞) 10·20·30·40·50대 등 5등급으로 나누어 매질했다. 대명률’에는 태형에 사용되는 형구(形具)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즉 태형은 소형장(小荊杖)이라고 하는 작은 매를 사용하며, 그 크기는 큰 지름이 2분 7리, 작은 지름 1분 7리이고 이는 3척 5촌이다. 소형장(小荊杖)은 마디와 옹이를 깎아낸 싸리나무였으나 뽕나무, 대나무, 물푸레나무로도 만들었다. 소형장을 만들 때에는 관에서 내려 준 교판(較板)을 써서 법식대로 맞추게 되어 있고, 동물 힘줄이나 아교나 사금파리 따위를 발라 붙여 통증을 더하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그리고 태형을 집행할 때는 소형장, 곧 주장(柱杖)이나 회초리의 가는 쪽으로 종아리, 허벅지, 등짝 등을 치도록 하였다. 하지만 태질은 법에 따라 엄격하게 집행되지 않고 매질의 수효나 모양이나 재질이 지방관아에서 빈번히 멋대로 자행되곤 했다.
장형(杖刑)은 태형(笞刑)보다 무거운 큰 형장(荊杖)으로 볼기를 치는 5형(五刑)의 하나이다. 장형은 곤(棍, 배 노처럼 넓적하고 무거운 몽둥이)과이나 장(杖, 둥글거나 각진 몽둥이)으로 집행되었다.
곤(棍)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고, 곤 마다 이름과 크기를 새겼으며, 버드나무로 만들었다. 조선 영조 때 제정된 ‘속대전’에서 곤형(棍刑)이 처음 나타난다. 곤(棍)은 일반곤과 특별곤으로 나눈다. 일반곤에는 ①중곤(重棍, 176×15×2.4cm), ②대곤(大棍, 170×13×1.8cm), ③중곤(中棍, 163×12.4×1.5cm), ④소곤(小棍, 154×12×1.2cm)이 있으며, 특별곤에는 치도곤(治盜棍, 길이 173×16×1.2cm)이 있었다. 장형도 장(杖) 60·70·80·90·100대 등 5등급으로 나누어 쳤다.
장(杖)은 가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옹이나 눈은 반드시 깎아버려게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의 대두경(大頭徑, 굵은 부분)은 3푼 5리, 소두경(小頭徑, 가는 부분)은 2푼 2리, 길이는 3척 5치로 하여 소두(小頭) 쪽으로 볼기나 허벅지를 쳤다. 이 장(杖)은 그 모양과 사용법이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로는 족장(足杖, 발바닥을 몽둥이로 가격)·원장(圓杖, 작대기나 주릿대처럼 굵고 둥근 몽둥이) 등 법외의 악형(惡刑)과 남형(濫刑)을 가하여 중상이나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장형(杖刑)과 곤형(棍刑)은 볼기나 허벅지를 때린다는 점은 같지만, 장형(杖刑)은 죄인을 형틀(의자)에 손과 발을 결박하고 집행하고, 곤형(棍刑)은 십자형판(十字刑板)에 죄수의 손발을 묶거나 맨바닥에 엎어놓고 가격하였다.
장형(杖刑)과 곤형(棍刑) 두 가지 모두 죄인의 볼기를 노출해 대수를 세어가며 매를 쳤지만 부녀자의 경우는 노출시키지 않았고, 70세 이상의 노인, 15세 이하의 어린이, 폐병에 걸린 사람, 임신부는 매가 아닌 속전(벌금)으로 대신하였다.
하지만 남형(濫刑)인 경우에는 남자는 알볼기를 치고, 여자는 홑치마나 속옷을 입혀 볼기를 치지만 역모죄나 간통죄는 알볼기를 쳤다. 남자든 여자든 고통이나 수치심을 배가시키기 위해 물볼기를 치기도 했다. 또한, 배교나 자복을 빨리 받아내어 실적을 올리려고 볼기나 허벅지뿐 아니라 정강이·종아리·배·등·팔·어깨·목·머리·얼굴 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가격하였다.
청양 정산 순교자 이도기(1743-1798)에서 보듯이 법적 형구가 아닌 삼릉장(三稜杖)이나 불법 도구로 닥치는 대로 가격하여 남형(濫刑)을 저질렀다. 삼릉장(三稜杖)은 삼면을 각 지게 깎은 능장(稜杖)으로써 수라꾼이 야경이나 순찰을 돌 때 가지고 다니는 호신 무기다. 또한 궁궐의 문졸(門卒)이 경계를 강화하고 침입이나 공격시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문 안쪽에 대각선으로 세워놓았다. 이처럼 그 용도가 본디 침입·공격자의 방어를 위한 병졸들의 무기의 일종이다. 그러한 무기(흉기)로 순교자들의 신체를 가격하여 정신적·신체적으로 빨리 제압하여 배교나 자복을 받아내려 하였다.
곤장을 칠 때 마다 오장육부가 덜렁거리고 그 고통이 뼛속까지 파고들며 묵직하고 화끈거린다. 집행자의 잔인성이나 타격기술에 따라 순교자들의 살은 터져 너덜거리고 피가 흐르며 뼈가 드러나다가 부러졌다. 그렇게 매를 맞고 중상이 되지만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장독(杖毒)으로 시름시름 앓다 사망에 이르거나 불구가 되었다. 태장을 칠 때 살갗은 저미듯 쓰리고 에린다. 곤장은 맞다가 실신이라도 하지만, 태장은 끝까지 제정신을 가지고 고통을 감내하거나 짐승같은 비명을 지르며 사람을 비굴하고 추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곤장에 대갈 바가지, 태장에 바늘 바가지.”라는 속담처럼 순교자들이 매를 맞으며 겪던 심신의 고통과 두려움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순교자들은 형벌이 끝나고 옥에 다시 갇혔을 때 매를 맞을 때 추한 꼴을 보인 자화상 때문에 십자가상 주님을 생각하며 한없이 부끄러하며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3] 『병인치명사적』, 4권, 17-18면.
[4] 『치명일기』, 정리 번호 810번; 『병인치명사적』, 4권,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