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혜 . 정순매 . 이 아가타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
윤정혜 : 1776〜1801. 세례명 아가타, 양근에서 참수
정순매 : ?~1801, 세례명 바르바라. 여주에서 참수
이 아가타 : 7-1801, 세례명 아가타. 양근에서 참수
남장을하고 도망쳐나온 윤점혜
윤점혜(尹點惠, 아가타)는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으며, 후에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로 이사해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순교한 윤선이 그녀의 아버지이고, 같은 해 4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윤운혜는 그녀의 동생이다.
어려서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운 윤점혜는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하며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처녀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산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에 집을 떠날 생각을 굳힌 그녀는 어머니가 마련해 둔 혼수 감으로 몰래 남자 옷을 지어 두었다가.
어느 날 남장을 하고 서울에 사는 사촌 오빠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집으로 도망갔다. 이때 윤점혜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에 동물의 피를 묻혀서 뒷산 나무에 걸어 놓았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줄 알고 밤낮으로 통곡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윤점혜는 얼마 뒤 윤유일의 권유로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친척과 이웃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모든 모욕과 고통을 참으며 동정을 지키려는 뜻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윤정혜는 성사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더 잘하기 위해, 1795년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2년 후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윤점혜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강완숙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당시는 수도원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동정녀가 강완숙의 집에 모여 수녀원과 같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문모 신부에 의해 이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으로 임명된 윤점혜는 주 신부의 뜻에 따라 다른 동정녀들을 지도하는 한편. 스스로도 계율과 재(齋)를 엄격히 지키며 신앙생활에 열중하였다.
▲ 당시의 사회 통념상 처녀로 혼자 산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순매는
머리를 올리고 과부로 행세 하였다.
교리서와 성물을 보급한 정순매
정순매(鄭順每. 바르바라)는 순교자 정광수의 여동생으로,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가마실에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되던 1795년에 오빠 내외로부터 교리를 배운 정순매는, 이들 내외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할 때 함께 올라왔다.
정순매는 신앙을 받아들이자마자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하였고,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그녀는 허씨의 아내였다고 속이고 과부로 행세하였다. 이것은 당시 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산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오빠 내외를 도와 교회 서적과 성물들을 신자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하였으며. 집에서 공소 예절을 치를 때면 언제나 정성을 다해 모든 것을 준비하였다. 그러다가 1800년에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뒤부터는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올케 윤운혜의 언니인 윤점혜와 함께 강완숙의 집에서 동정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활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윤점혜와 정순매는 강완숙을 비롯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은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온갖 형벌을 받았으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배교할 수 없다”며 꺾이지 않았다. 마침내 사형 판결을 받은 이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하여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라”는 명령에 따라. 정순매는 5월 24일(양 7월 4일) 고향 여주에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목 잘려 순교하였고. 윤점혜는 같은 날 양근에서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윤점혜는 처형되기 전날 밤 잠시 양근 감옥에 수감 되었는데, 이때 함께 갇혀 있었던 여자 신자들이 훗날 증언한 바에 따르면 “윤점혜는 말하는 것이나 음식 먹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람 같지 않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자약하고 초연하여 이미 이 세상을 초극한 사람 같았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한 윤점혜는 즐거운 얼굴로 형장으로 나아갔고, 형장에서 망나니의 칼을 받았을 때. 그녀의 목에서는 우윳빛 같은 횐 피가 홀러 나왔다고 한다. 현재 윤점혜는 수원교구에서 시복이 청원된 상태이며.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그녀의 가묘가 모셔져 있다.
한편 경기도 양근에서 살았던 이 아가타는 이동지의 딸이자. 1839년에 순교한 이광헌(李光獻.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먼 친척이다.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그녀는 동정을 지키기를 원하였으나. 신자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친척인 유한숙(能汗淑)의 도움으로 윤점혜가 회장으로 있던 동정녀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신앙 생활에 열중하며 착한 일을 많이 하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5월 25일(양 7월 5일) 양근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