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국. 고광. 황포수
이부춘. 이석증. 권아기련
세례명을 알지 못하는 순교자들
이종국 : ?~1801, 세례명은 미상, 공주에서 참수
고광성 : ?~1801, 세례명은 미상, 평산에서 참수
황 포수 : ?〜1801. 세례명은 미상, 봉산에서 순교
이부춘 : 1733〜1801, 세례명은 미상, 충주에서 참수
이석중 : 1772〜1801, 세례명은 미상, 충주에서 참수
권아기련 : ‘?〜 1801, 세례명은 미상, 충주에서 참수
1801년 3월, 공주에서 이존창이 참수된 지 보름 후 같은 장소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또 한 명의 신자가 순교하였는데, 가족도 세례명도 알 수 없는 이종국이 바로 그였다. 그의 순교에 관해서는 그때 옥 근처에 갔다가 모든 것을 똑똑히 들은 여든 살 된 노인이 증언하였다.
나는 이제 천당복을 누리러 가오
이종국은 청주에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다. 순교하기 전날은 3월 보름 무렵이라 달이 훤히 밝았는데,그는 밤새껏 옥 문지방에 기대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자 동쪽을 쳐다보며 “왜 날이 이리도 더디 새느냐" 하고 여러 차례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저것이 좋은 신호다. 곧 나를 부르러 오겠구나" 하고는 더 열심히 기도하였다.
몇 분 후에 다시 총소리가 나고 옥문이 열리더니, 옥졸들이 사형수에게 주는 음식을 가져왔다. 곧 이어 “이종국을 끌어 내라’는 호령이 들리자, 그는 일어나서 함께 갇혀 있던 신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으로 이제 천당 복을 누리러 가오. 여러분도 신뢰를 잃지 말고 나처 럼 하시오.”
이처럼 그가 큰소리로 신자들을 격려하고 있을 때, 형리와 옥졸들은 그를 재촉하여 형장으로 끌고
갔다. 이종국은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형장으로 끌려가,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 고광성은 사형 판결을 받고 도끼로 목이 잘려 순교 하였다.
배교한 것은 자네가 아니고 마귀일세
고광성(高光嶷)은 황해도 평산 고을의 양민 집안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와 지내던 1800년 겨울에 손인원(孫仁元)으로부터. 천주 신앙에 대해 듣고 즉시 입교하였다. 특히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를 없앤 뒤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며, 여러 종류의 천주교 서적들을 집에 감추어 두고는 탐독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에게 체포된 고광성은, 처음에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풀려 날 생각을 하였다. 그때 충주의 순교자 이국승이 그의 잘못을 심히 나무라면서 관장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를 일러주었다.
"배교한 것은 자네가 아니고, 마귀가 자네를 속여 자네 입을 빌려 말한 것이라고 포도 대장에게 말하게 ." 이 권고를 받은 고광성은 즉시 마음을 다잡고 배교하려던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 그런 다음 포도청과 형조의 문초에서 “그 동안 열심히 지켜왔던 교리를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에 1801년 5월 22일(양 7월 2일) 사형 판결을 받은 그는, 고향 평산으로 이송되어 도끼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서울에서 평산까지의 거리로 보아 3〜4
일 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황해도 출신의 순교자로 고광성 외에 황 포수(砲手)라고 불리던 신자가 있었다. 그는 군영의 사수(射手)였으므로 '포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서울 군영으로 왔다가 천주교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박해가 시작되자마자 체포된 황 포수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조그마한 배교의 표시도 거부하였다. 그 결과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인 봉산 고을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순교사실이 분명한 이부춘. 이석중. 권아기련
한편 박해 시대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는 데 노력하던 성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신유박해 때 충주에서 세 명의 순교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세례명을 아는 신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에 다블뤼 주교는 그들 세 명을 ‘충주 순교자' 로 묶어 순교자 명부에 올림으로써 순교 사실이 분명한 이들이 어떻게든 누락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이들이 바로 이부춘(李富春)과 그의 아들 이석중(李石中), 그리고 권아기련(權阿只連)이다. 충주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이부춘은 어느 정도 학식도 있고 언변과 인물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 이석중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교회 본분을 지키는 데 충실하였고. 석중은 장사를 하면서도 세속의 이익보다는 영혼의 이익을 얻는 데 힘썼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부춘, 석중 부자는 천국의 복락을 얻는 데 더욱 노력 하였고. 선교 활동을 통해 자신들이 얻은 행복을 친지들뿐만 아니라 이웃과도 함께 나누었다. 이들 부자는 주일마다 신자들과 함께 모임을 가졌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권아기련(혹은 이아기련)은 남편을 잃은 뒤, 충주에 살던 이기연(李箕延)의 며느리와 이석중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비록 두 아들은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신심 생활을 충실히 함으로써 모두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녀에게서는 신앙 생활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냉담이나 게으름을 찾아볼 수 없었으며,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복음 전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이부춘, 석중 부자와 권아기련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각각 다른 곳에서 체포되었다. 무서운 형벌 가운데에서도 이들 세 명은 평온과 용기를 잃지 않아 신자가 아닌 이들도 그들의 끗꿋함에 놀랄 정도였다.
마침내 그들은 충주에서 참수형을 받았는데, 이부춘파 권아기련의 순교 날짜는 18이년 8월 27일(양 10월 4일)이었다. 다만. 이석중은 아버지와 같은 날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관례에 따라 다른 날에 순교한 것 같다. 그때 이부춘의 나이는 예순여덟. 석중은 스물 아홉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