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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병란 文炳蘭|Mun Byeong-ran | |
| 출생 | 1935년 3월 28일 |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 | |
| 사망 | 2015년 9월 25일 (향년 80세) |
| 광주광역시 동구 서남동 조선대학교병원 | |
| 국적 | 대한민국 |
| 본관 | 남평 문씨 (南平 文氏) |
| 가족 | 딸 문명아/문정아/문현화, 아들 문찬기 |
| 학력 | 도곡공립보통학교[1] (전학) 광주공립보통학교[2] (졸업) 광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 (졸업) 화순농업고등학교[3] (졸업) 조선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 / 학사) |
| 등단 | 1959년 현대문학 10호 시 '가로수' 발표 |
1. 개요2. 생애3. 대표작4. 수상 이력5. 저서6. 여담
대한민국의 시인, 교육인으로, 호는 서은(瑞隱)이다. 5.18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유명하다.
1935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원화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화순의 본가에서 광주의 서석초등학교까지 편도 4시간을 걸어서 다녔으며 이미 이때부터 국어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1961년 조선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시인이었던 김현승의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레 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59년에는 가로수를 주제로 시를 써오는 과제를 받아 '가로수'라는 시를 써서 제출했는데 과제물을 본 김현승이 이를 추천해《현대문학》10호에 시가 발표되면서 시인으로 등단하게 되었다. 저항시로 유명한 지금과는 다르게 등단 초기에는 서정시를 즐겨 썼다.
졸업 이후에는 순천고등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국어교사,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전임강사를 거쳐서 전남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였다.
한편 1975년부터 자유실천문인협회에 가입하여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5.18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부활의 노래라는 시를 창작하였다. 이로인해 1987년 뉴욕타임즈 8월 18일자에선 화염병 대신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시인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1988년 조선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12년의 재직을 마친 후 2000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말년에는 무등산 자락에 거주하며 문학 활동을 이어나갔기 때문에 무등산의 파수꾼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 직녀에게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을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처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
| 희망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인생 항로 파도는 높고 폭풍우 몰아쳐 배는 흔들려도 한고비 지나면 구름 위 태양은 다시 뜨고 고요한 뱃길 순항의 내일이 꼭 찾아온다 |
까치무릇 산자고 전설 꽃말
꽃대장 하늘땅2023. 3. 1. 17:25
잎 모양이 '무릇'을 닮아 '물굿' 또는 '까치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는, 백합과 집안의 우리 땅 야생화 산자고(Tulipa edulis)는요.
무릇
학명 Tulipa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자생의 튤립으로, 종소명 edulis는 먹을 수 있다는 뜻인데요.
한의학에서는 종기나 부스럼 치료 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때문일까? 산자고(山慈姑)에는 자애로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욕창을 치료해 주었다는 고부지간(姑婦之間)의 사랑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고요.
이는 예전에 소개해 드렸던 '며느리밥풀꽃'이나 '며느리밑씻개'의 고약한 시어머니 '고부'에 대한 이야기들과는 정반대.^^ 자애로운 시어머니 자고(慈姑)에 대한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https://mjmhpark.tistory.com/m/200
https://mjmhpark.tistory.com/m/203
[산자고 전설]
옛날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혼기를 놓친 노총각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깊은 산골에서 나이 많은 노모를 모셔야 하는 가난한 총각에게 시집오겠다는 처녀가 있을리가 만무했고요.
때문에 효심 깊은 아들은 장가 갈 생각일랑은 일찌감치 접고서, 어머니만을 극진히 모시면서 살아가고 있었지만요.
어머니는 당신 때문에 아들이 장가를 못 간다는 생각으로, 근심이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머니와 아들 앞에 짐 보따리를 든 아름다운 처녀가 거짓말처럼 짠~하고 나타났는데요.
처녀는 산 너머에서 홀아버지를 모시며 살고있던 여인으로, "내가 죽거든 뒷산 너머 외딴집의 총각에게 시집을 가거라. 그 집 사람들은 가난해도 너를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다."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룬 후에 무작정 산을 넘어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총각 아들은 장가를 들수가 있었고요. 때문에 노모는 복덩어리 며느리를 더없이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해 봄날, 곱디고운 며느리 등에 원인모를 욕창이 생겨서, 며느리가 힘들어 하기 시작했는데요.
가까운 마을에는 의원도 없었고, 큰 마을까지 나가서 의원을 모시고 올 형편도 못 되어, 아들과 어머니는 전전긍긍 애만 태우고 있었고요.
그렇게 시간만 흐르면서, 며느리의 등창은 점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답답해진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등창을 치료 할 약초를 찾아 보겠노라고, 무작정 산 속을 헤매고 다녔는데요.
시어머니 눈에 따스한 봄볓을 받고 피어난 별 같은 꽃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순간, 이 풀이 며느리의 등창을 치료해 줄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뿌리까지 조심스레 캐어내 집으로 돌아 왔고요.
어머니는 캐어 온 풀을 정성껏 으깨어 며느리의 등창에 붙여주었는데요.
신기하게도 며느리의 등창은 며칠 만에 치료가 되었고요.
때문에 이 풀은 '산 속에서 자애로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위해 찾아 준 풀'이란 뜻의 산자고(山慈姑)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산자고'의 꽃말은 '봄처녀' 또는 '가녀린 미소'라고 합니다.
산자고(Tulipa edulis)는 한반도 중부이남 및 일본, 중국 원산의 백합과에 속하는 키 15~30cm정도의 여러해살이풀로, 뿌리잎은 2개이며 길이 15~25cm 끝이 날카로운 선형이고, 4~5월 줄기 끝에 한 송이씩 피는 흰색 꽃은 피침형 꽃잎이 6개로 자주색 맥이 있으며 수술은 6개(3개는 길고 3개는 짧다)이고, 녹색의 삭과 열매는 거의 둥글고 세모 지며 길이는 1.2cm정도이며 끝에 6mm정도의 암술대가 달린답니다.
https://mjmhpark.tistory.com/m/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