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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진산 성지
도로주소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07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있는 진산(珍山)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참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한 곳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그들이 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에 해당되어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아 5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의 원인이 된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인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폐한 사건을 말한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인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은 어머니인 권씨(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회 안에서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92년)와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1745-1801년), 이존창 루도비코(李存昌, 1759-1801년), 최창주 마르첼리노(崔昌周, ?-1801년) 등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 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이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 후 12월 8일(음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신해박해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체포령을 듣고 피신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숙부를 감금하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아에서 진산 군수의 회유와 협박을 용감히 이겨낸 그들은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지방리 공소는 자연부락인 가새벌(지방2리 가사벌 마을, 사제관이 있는 곳)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진산 지역에는 신자들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고산 지역에 흩어져 살거나 다른 지역에서 피난 온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가새벌도 그 중 하나였는데 병인박해 이전부터 길게는 기해박해 전부터 몇몇 신자들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김영삼이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고, 1877년에는 김영삼의 동생인 김 사도 요한이 한양에서 옥사하고, 1878년에는 김춘삼 사도 요한이 가새벌에서 잡혀 한양에서 옥사하여 순교하였다. 병인박해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던 1876년에도 이곳에는 신부가 방문하여 공소를 치렀다. 1885년에 프랑스 선교사 조스(Jean B. Josse, 1851-1886년) 신부가 방문한 이후 가새벌에서는 매년 공소가 치러졌고, 1910년을 즈음해서는 진산과 금산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공소로 성장하였다. 공주로부터 이사해 온 이씨 일가의 활동은 이 공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새벌에는 일찍부터 공소가 형성되었으나 공소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16년에 이르러 첫 번째 공소 건물을 갖게 된 가새벌 공소는 신자 증가에 따라 새로운 건물을 필요로 하였다. 1927년에 새로운 부지에 건물을 지음으로써 현재의 지방리 공소가 마련되었다. 공소 건물이 완성된 후 이의규 회장과 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1929년에 초대 주임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1931년 대구대목구로부터 현재의 전주교구가 분리됨에 따라 성직자 부족으로 지방리는 다시 공소가 되었다. 이후 지방리에 신부를 파견할 것이 검토되었으나 금산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군청소재지인 금산에 1935년에 본당이 설립되자 지방리는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공소였음에도 금산 지역보다 신자가 많고 기존의 성당과 사제관을 가지고 있던 지방리 공소는 금산 본당이 성장할 때까지 계속해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래 전라북도에 속했던 진산 지역은 몇 차례의 행정개편 대상이 되었고, 1963년에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전주교구 관할이던 진산 지역이 대전교구로 편입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성장한 곳이고 많은 순교자들의 땅이며 호남 선교의 요람이었기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중, 1980년 8월 29일 당시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금산 본당에 속한 모든 것을 대전교구로 이관하였다. 진산이 속한 금산군의 지리적 여건과 대전에 가까운 생활권, 신자들의 편의와 보다 효율적인 신앙지도를 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금산 본당 관할의 지방리 공소도 대전교구의 한 공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09년에는 다시금 공소에서 진산 성지성당으로 승격되어 교회사적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
진산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첫 참수 순교자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나고 자라서 신앙을 증거한 곳일 뿐 아니라, 진산 지역 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기는 거룩한 곳이다.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한국을 사목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되었다.
[출처 : 김정환, ‘진산 지방리 공소’, 대전교구사 연구소 & 가톨릭대사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5년 11월 27일)]
대전교구 진산성지, 윤지충 · 권상연 · 윤지헌 유해 안치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 순교한 세 순교자가 232년 만에 신앙의 못자리로 돌아와 안치됐다.
대전교구 진산성지(주임 김용덕 야고보 신부)는 5월 27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실학로 257-8 현지에서 교구장 김종수(아우구스티노) 주교 주례로 새 성당 봉헌식을 열고 복자 윤지충(바오로)·권상연(야고보)·윤지헌(프란치스코)의 유해를 안치했다.
1759년 진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윤지충은 고종사촌인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이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전달하자, 윤지충은 사촌인 권상연과 함께 집 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사망하자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두 복자는 유교식 제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돼 1791년 12월 8일 참수됐다.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도 형이 순교한 지 10년 만에 능지처참으로 순교했다. 그 동안 찾지 못했던 세 복자의 유해는 2021년 3월 복자 유항검 일가의 원 묘지터인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17)에서 발견됐다.
세 복자의 신앙이 시작된 진산성지는 그 얼을 이어받고자 성당을 신축해 이날 봉헌했다. 또한 세 복자의 유해를 전주교구로부터 분배받아 232년 만에 고향의 품에 안치했다.
800여 명의 신자들은 이날 봉헌식에 참석해 고향으로 돌아온 세 복자를 환영했다. 미사가 끝난 뒤 순교자상 제막식도 열렸다. 아울러 유해 앞에 길게 줄지어 선 신자들은 기도하고 묵상하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억했다.
진산성지 주임 김용덕 신부는 “복자 윤지충의 어머니가 보여준 모습처럼 진산성지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좋은 어머니의 역할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는 축사를 통해 “오늘 새 성당 봉헌식을 통해 한국교회 전체의 신앙유산인 세 순교자들의 신심이 확산되고 깊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대전교구장 김종수 주교는 강론에서 “세 복자가 순교한 지 230년이 넘은 시기에 그분들의 고향인 이곳에 유해를 모시게 됐으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감사한 일”이라며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이 순교 복자의 신앙을 바라보며 영원한 참 생명이 어디 있는지 영감을 받고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거룩한 책임을 다질 수 있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23년 6월 4일, 민경화 기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尹持忠) 바오로(Paulus)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 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서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곧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 바오로가 32세였고, 권 야고보는 40세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윤지충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권상연 야고보(5.29) 기본정보
윤지충(尹持忠) 바오로(Paulus)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Jacobus)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서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곧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 바오로가 32세였고, 권 야고보는 40세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권상연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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