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7월7일) |
|
🌿1921년 이승만, 하와이에서 동지회 조직. 🌿1923년 흥명회 윤덕병이 신사상 연구회 조직 : 나중에 화요회로 개편됨. 🌿1931년 각 사회 단체에서 중국인 박해는 조선 민족의 의사가 아님을 발표. 🌿1933년 소록도 나환자촌 형성 🌿1945년 조선 국민의용대 결성 🌿1949년 반민특위 조사 위원, 이승만 정권과 경찰의 탄압에 반발하여 총사직. 🌿1950년 유엔 안보리, 미군 지휘하의 유엔군 통합사령부 설치안 가결-한국군이 유엔군에 편입됨. 🌿1952년 제1차 개정헌법 공포 🌿1962년 5.16 장학회 설립 |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429억 7000만원 투입 전장 428km) 1970년 7월7일...경부고속도로 개통(429억 7000만원 투입 전장 428km)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근대화의 상징이자 경제개발의 꿈을 실현시킬 신앙과도 같은 존재였다.
1964년 12월에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며 첫 구상을 한 뒤 귀국해서도 틈만 나면 인터체인지 선형을 직접 그려가며 꿈을 가다듬었다. 1967년 4월에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아직 고속도로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때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재정파탄이 날 것이다”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다”는 게 이유였다.
| 그러나 박 대통령은 육군의 3개 공병단을 투입하며 공사를 강행했다.
정식 기공일자는 1968년 2월 1일이지만 이미 서울∼오산 간 공사를 3개월 전부터 진행할 정도로 설계와 공사를 병행해가며 서둘렀다. 이 때문에 총 연장 428㎞·305개 교량과 12개의 터널이 포함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2년5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밀어붙이기식 공사로 77명이나 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토지 헐값 매수로 재산권 침해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1970년 7월 7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경부고속도로가 마침내 개통됐다.
박 대통령은 준공식에서 “가장 싼 값으로(1㎞당 약 1억원) 가장 빨리 이룩한 대 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다.
|
🌿1970년 김지하의 담시 '오적' 필화사건 첫 공판 🌿1973년 경주 황남동 고분 98호 발굴 시작 🌿1978년 제11차 SCM(샌디에고)에서 군사위 및 연합사 설치 합의 🌿1981년 미국 공군, 최신예 F=16 전투기를 외국에는 최초로 한국에 배치했다고 발표 🌿1981년 전두환 대통령·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 정상회담(8일 공동성명 발표) 🌿1986년 일본 정부, 고교역사교과서의 왜곡기술시정 조치내용을 외무부에 통고 🌿1987년 제10차 국내외 한국과학기술자종합학술대회 개막(∼10일, 인하대) 🌿1987년 문교부, 시국관련 제적학생 전원 복학과 해직교사 복직을 대학 및 시 도교육감에게 일임 |
🌿1988년 노태우 대통령(7.7선언),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발표(남북동포간의 상호 교류등)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아래의 선언을 하게 됩니다.
|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나는 오늘 온 겨레의 염원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해 나가기 위핸 새 공화국의 정책을 밝히려 합니다.
우리 민족이 남북 분단의 고통을 겪어온 지 반세기가 가까와 옵니다.
분단의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숱한 시련과 고난을 주었으며. 민족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아 왔습니다.
남북분단의 정벽을 허물어 번영된 통일조국을 여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 겨레 모두에게 맡겨진 민족사의 소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이한 이념과 체제를 분단된 남북은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렀으며, 남북으로 갈라진 겨레는 분단 그날부터 오늘까지 서로가 서로를 불신, 비방하며 서로를 적대시하는 고통스런 분단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분단은 우리 민족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나 민족통합은 우리의 책임 아래 우리의 자주적 역량으로 이루어야 합니다. |
🌿1989년 한국무역사무소 개설기념「대한민국 주간」 행사가 모스크바 최대 종합전시장인 엑스포센타 에서 개막 🌿1989년 전교조 사무실 압수수색-대외비 국감자료 발견 파문 🌿1989년 행정개혁위, 시도 군시 읍면 3단계의 지방행정 계층을 읍면을 폐지, 2단계로 축소하는 방안 확정 🌿1989년 한국여자양궁 세계 재패, 김수녕·김경옥· 왕희경, 제35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단체전에서 우승. 🌿1990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 통일방안을 논의키 위한 모든 남북한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회의' 설치 제안 🌿1991년 노태우 대통령, 8박9일 동안의 미국 캐나다 공식방문을 마치고 귀국. |
🌿1991년 7월 7일 고(故)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 마약 상습복용협의로 구속 2002년 4월 29일, 고(故) 박정희 대통령 아들 박지만씨가 마약투약 혐의로 다섯번째 구속되고 있다. | 1989년 2월 마약복용 혐의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씨가 히로뽕 상습복용혐의로 구속됐다.
수원지검 강력부 서승준 검사는 박씨가 1990년 7월, 11월, 12월과 1991년 1월 등 4차례에 걸쳐 히로뽕을 코로 흡입하거나 정맥주사를 맞아온 사실을 확인, 구속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1990년 7월 히로뽕가루 3~4g을 히로뽕 밀매자인 김명숙씨로부터 2백만원에 구입, 차순영씨 집에서 차씨 등과 함께 코로 흡입했다.
박씨는 또 1990년 8월 중순 구속된 김씨 집에서 김씨로부터 히로뽕 6g을 5백만원에 매입, 1990년 11월 자신의 집에서 차씨 등과 함께 코로 흡입하는 등 지난 1월말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히로뽕을 상습적으로 복용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박씨는 2월 10일 검찰에 구속된 히로뽕 밀매인 김씨가 “박지만씨도 복용했으니 함께 처벌하라”고 항의, 히로뽕 복용 사실이 밝혀져 검거됐다.
|
🌿1992년 통일원, 지난 55년부터 북한에 납치돼 귀환 못한 납북자는 어부 246명 등 278명이라고 발표. 🌿1993년 삼성그룹, 근무시간을 오전 7시 출근 오후 4시 퇴근체제로 변경키로 결정. 🌿1993년 동아마라톤 경주코스, 국제육상경기연맹 (IAAF)으로부터 국제공인 획득. |
🌿1994년 7월7일... 천연기념물 324호 `붉은색 큰 소쩍새` 발견
| |
🌿1997년 국내 첫 인터넷 방송국 개국 🌿1997년 김현철씨 비리 첫 공판 🌿1998년 서태지, 은퇴 2년 6개월만에 음반 발표 🌿1999년 종합주가지수 1005.98 기록, 3년 8개월만에 1000포인트 넘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