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2월 24일(월) 예레미야 32:1-15 찬송 220장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3-5.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개정 개역)
- 예레미야의 투옥과 아나돗 밭 매입 -
오늘 말씀은 선민의 회복을 예언함으로써 소위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제30-33장까지 계속되는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으로,
예레미야가 그의 숙부의 밭을 매입하는 상징적 행동을 통해
유다가 비록 멸망할 것이나 다시 회복될 것을 예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전반부 1-5절은 본 예언이 주어질 때의 시대적 배경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투옥된 사실 및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본 예언이 주어진 때는 시드기야 제 십년 곧 주전 587년이다.
이때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기 1년 전으로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 있던 때이다.
또한 이때 예레미야는 궁중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릴 것을 청하는
시드기야 왕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멸망과 시드기야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해서 예언함으로써
반(反)국가 사범으로 몰렸기 때문이다.(37:3-10)
다음으로 후반부 6-15절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힌 영어(囹圄)의 몸으로서
그리고 유다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아나돗에 있는 숙부의 밭을 매입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이처럼 숙부의 밭을 산 일차적인 이유는
‘고엘 제도’에 의해 숙부의 토지를 무를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반드시 고엘 제도 때문에 숙부의 밭을 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당시 투옥된 상태로써 그의 장래가 불투명했고
또한 현재는 유다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으로
비록 그 토지를 산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소유가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숙부의 밭을 산 것은 유다가 비록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이나
장차 하나님께서 다시 회복시키심으로 본래의 토지 주인이
그 소유권을 다시 행사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성도들은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환난과 고난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 고난 뒤에 감추어진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오묘한 섭리를 확신하며 인내로써 고난을 극복해야 함을 교훈해 준다.
또한 본문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탁류(濁流)를 거슬리며 살아야 함을 교훈해 준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믿지 않을 때
혼자 멸망의 참상을 바라보며 그로 인해 몸을 떨며 슬퍼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현실로 인정했을 때 회복을 노래했다.
이처럼 우리들은 하늘 나라 시민으로서 비록 이 땅에 살고는 있지만
이 세상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목표와 푯대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유다의 임박한 멸망의 상황에서 아나돗의 땅을 구입한 예레미야처럼...
8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8절 말미의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라는 고백은
앞선 6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이는 예레미야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여 삶을 살았음을 나타낸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 때 그것을 듣고 잊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현실 속에 이루어질 때
이를 의심하지 않고 말씀에 부합한 태도를 취하였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말할 것임을 알리셨고
이 일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자 말씀하신 그대로 반응하였다.
이와 유사한 실례로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에 방문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교회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 받았지만(행1:8)
유대인들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기에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당시 배타적 선민 의식을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 자체를 철저히 금기시하였고 이는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인류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셨다.
그 일을 위해 교회가 혈통이나 민족의 장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금하는 음식을 싼 보자기를
베드로에게 보여 주시며 그것을 잡아 먹으라고
세 차례나 말씀하심으로 베드로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후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함으로 이방인 구원의 역사를 열게 하셨다.
이 일은 베드로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고
당시 유대인들과 같이 배타적 선민 의식에 얽매여 있었다면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계시하여 주셔도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셔도 종종 사람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말씀에 어긋난 삶을 살기도 한다.
이는 단지 불신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례로 낳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택정함을 입은 삼손이
무감각하게 하나님께서 금하신 독주, 시체를 가까이 하고,
마침내는 나실인으로 서원함을 확증하는 머리털까지 밀리고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의 포로로 잡혀
그들에 의해 온갖 수치를 당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는 천하에 당할 이가 없을 만큼 초인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수치스런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에 무감각하고
오로지 탐욕과 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성이 무디어지면 하나님의 뜻에 무감각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으로 계시하신다고 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시자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데 대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영적 무지와 관련하여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다’고 하였다.(요1:26)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여기며 그 사실을 자랑하였건만
정작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셔서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지극히 미련하고 악한 일을 저질렀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지 못하고
그 뜻대로 사는 일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형식적, 위선적, 외식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을 뿐
참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성 훈련에 게으르면 주님이 다시 와서
우리 가운데 계셔도 깨닫지 못하고 이를 배척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만약 내가 그때 거기에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섬겼을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세례 요한과 같이 깨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만일 영적으로 무디어지면 우리라고 해서 예수님을 배척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의 의를 세우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들만 거룩하다고 여긴 바리새인, 서기관 등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동일한 위선과 외식에 빠져들 수도 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영성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삶을 부단히 계속하며
하나님과 보다 친밀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따라서 우리 역시도 부단히 영성을 갈고 닦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성경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힘쓰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와 대화에 힘써야 한다.
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할 때 우리는 진정 매일 매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복된 역사를 이루는 도구(통로)가 될 수 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