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1월 8일(목) 요나 4:1-5 찬송 158장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개역 개정)
- 니느웨 거민의 구원에 대한 요나의 불평 -
4장은 자신이 전파한 메시지대로 니느웨 성이 멸망하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니느웨 거민들이 회개하고 구원얻은 사실에 대해
요나가 극도의 불만을 토로한 사실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한 장으로서 요나서의 핵심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4장의 첫 단락인 오늘 말씀에서는
요나가 니느웨 거민의 구원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표출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원치 않았던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던 바(1:1-3)와 같이 자기들만이 구원얻을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배타적 선민 의식과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이방 민족은
마땅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편협한 민족주의,
그리고 니느웨가 멸망당하지 않고 존속할 때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위기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한 자신의 예언(2:4)이 빗나가
선지자로서의 자존심이 훼손된 데 대한 불만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이같은 행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 사역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할 선지자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싫어하고 대적하는 범죄행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요나를 무작정 벌하지 아니하시고,
우선 그의 행위가 옳지 않음을 지적하신 후(4절)
그의 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려 요나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신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요나의 불평 내용 중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그의 언급(2절)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준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신 분이어서
혈통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 죄를 회개하고 여호와 앞에 나아오면
그 뜻을 돌이켜 벌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요나는 이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스라엘의 대적인
니느웨 백성에게 베풀어지는 것을 싫어했다.
이처럼 우리도 요나처럼 자신의 편견과 아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꺼려한 적은 없는가?
또 그러한 은총을 받은 어떤 사람을 시기하거나 미워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결코 가져서는 안될
인간적인 편견과 아집을 버리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한다.
4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향한 심판을 철회하신 사실을 안 요나가
하나님께 원망 섞인 어조로 차라리 죽여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왜 이토록 분노하는지 잘 알고 계셨다.
또한 그의 마음에 얼마나 큰 분노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잘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말뿐만 아니라 요나의 심령 중심을 헤아려 아셨고
이러한 요나를 향해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고 물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물음은
요나의 영과 육을 향한 물음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때론 의도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도 한다.
그래서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인간 심령 깊숙한 곳은 누구도 알 수 없음을 단적으로 지적하는 말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수많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은
섣불리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의 감정이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란 인상을 주며
그러한 사람은 사회에서 많은 부분 손해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드러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주의하거나 다듬지 않고
소홀히 하고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성향이 있다.
예를 들어 공적인 자리에서는 점잖은 체 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노출되지 않는 곳에서는 온갖 거짓된 일,
사악한 일, 음란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이는 사람들이 감추어져 있다고 여겨질 때 그 숨겨진 죄성을 억제하지 않고
탐욕을 따라 죄악된 본성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할 때 어떻게 해도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의 내면은 사람이 죄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불의한 일을 계획하는 좋은 장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악한 마음을 품는지, 얼마나 사악한 계획을 세우는지는
누구도 볼 수 없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악을 도모할 만한 장소가 사람의 내면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것이 옳으냐’고 말씀하신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속속들이 들여다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물으시는 물음이다.
과연 우리는 이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한 성경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불충한 사울을 대신해 이스라엘의 왕을 택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이새의 집으로 보내셨다.
이새의 집에서 그의 아들들을 대면한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 엘리압을 보고
그 마음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말씀하셨다.
엘리압이 하나님 앞에서 왜 버림받았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아버지도, 사무엘도 알지 못했던 부정함이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눈과 선지자 사무엘의 눈은 피할 수 있었지만
‘과연 네가 옳으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과연 네가 옳으냐’라고 물으신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말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속임수로
사람들의 눈을 속여 왔는지는 사람들은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했을 수도 있다.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과연 하나님의 기름 부으실 만한 자구나! 라는 칭송을 들어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우리의 심장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과연 인정받는 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나 입술의 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하나님이 열납하실 만한 것으로 가꾸어야 한다.(시19:14)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잘 가꾸고 그것을 방치하지 않는 자,
그 사람이 진정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성도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6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