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이 진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잊는다는 것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다
낙엽은 바스락바스락 소리 내 울더니
내가 발 디뎌 나간 길 지워버린다
그러나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길 없는 길은
다시 발 디뎌 누군가 길을 열겠지
낙엽이 진다는 것은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노추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낙엽이 진다는 것은 가을이 간다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내가 노추산을 오르기 전까지는 노추산에 대하여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상상력을 가지고 시작한 노추산 산행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다.
진부 나들목을 나오자 여기저기 수마가 할퀸 자국들이 채 아물지도 못한 채 산하는 여기저기 찢겨있었다. 바쁘게 도로를 포장하는 기계의 소음과 공사판 근로자들의 부지런한 외침들이 동강을 끼고 질펀하게 흘렀다. 단풍은 그 아픔을 잠시라도 치유해주고 싶은지 선홍빛 자태를 뽐내며 아우라지역을 물들였다.
석탄으로 유명했던 구절리, 화절령, 박심리, 스무 살 때 책을 팔기 위해 혈혈단신 ('의지할 데 없는 홑몸'을 이르는 한자숙어는'혈혈단신' 입니다. '홑몸'을 염두에 두고 '홀홀단신'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는 잘못된 표현이니 주의하십시오.) 이곳까지 굴러들어와 사북 탄광촌 여인숙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탄광촌 새마을 사택을 종횡무진 누비던 그때가 떠올라 나는 노추산 등산을 한다는 말에 누구보다 먼저 예약신청을 했다.
오전 10시쯤 산행이 시작되었다. 세속에 쉬이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첩첩산중인 이곳 노추산, 4월에도 눈이 내리는 정선의 지형적 특성에 맞춰 산은 보통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산이 대부분이다. 산길로 향하는 발걸음이 여느 때보다도 가볍다. 호젓하다. 호젓하다는 것은 생활전선에서 찌들린 심신을 잠시 잊을 수 있기엔 안성맞춤이란 뜻이다. 갑자기 추워진 바람에 이파리는 채 물들기도 전에 바닥을 굴렀다. 우리가 길을 나서면 낙엽은 어느새 그 길을 지워버린다. 채우려면 비워야 하듯 기억을 담으려면 우리도 때론 기억을 지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유난히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면 그렇게 지울 것은 지우고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바로 기억 속의 앙금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겠다.
개울가 여기저기에 죽어버린 나무들이 즐비하다.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되면 나무 난로를 설치하고 싶었는데 저렇게 죽어 말라버린 나무를 보니 내 비록 늦추 하지만 이곳 노추산이 나를 받아준다면 이곳이 내가 살기엔 참 좋은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잠정적 미래에 내가 뼈를 묻을 곳 1위가 제주도라면 이곳은 2위쯤 올려놓고 싶다.
한 시간 여를 오르니 배추밭이다. 배추를 뽑아내고 버려진 배추만 여기저기 즐비한데 멀리 시선을 옮겨보니 이곳이 참으로 좋은 명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산이 답답함을 주기보다는 편안함을 주었고 뻥 뚫린 밭이 심리적 안정을 주기에 충분하다.
산을 오를수록 거대한 고목들이 우리를 반긴다. 단풍보다는 어느새 나의 시선은 고목 가지로 옮겨져 있다.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수백 년을 버티고 살았을 나뭇가지들의 구부러진 모습들은 한편의 조각공예다. 얼마나 이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가 어려웠을까? 끝까지 살아보려고 이리도 가지를 뻗었다가 그곳이 아니다 싶으면 비비 꼬아 다시 하늘 향하고 어떤 나무는 하늘이 싫다고 팽 돌아서서 땅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들, 마치 나무들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노추산 나무는 나의 혼을 빼앗을만했다. 언제 다시 시간이 허락한다면 나무만 감상하러 다시 와 보고 싶다.
이성대에 앉아 컵 라면에 식사를 하고 우리는 다시 힘을 내서 노추산 정상을 밟았다. 해발 1,322미터 노추산에서 바라본 경치는 산이 우람했다가 아니라 산이 드러누워 있다가 맞을 것이다. 산은 첩으로 켜켜이 짝을 이루고 멀찌감치 누워있다. 그만큼 우리가 올라온 노추산이 높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산을 하는 곳은 상당히 경사가 심하다. 이따금 마주치는 다른 산행회원들의 모습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8부 능선쯤 내려오는데 나는 깜짝 놀랄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제목 '불나비 사랑' '너를 안고 가련다 부나비 사랑' 나뭇가지 하나가 바위를 향해 뻗었는데 바위가 비켜주지 않자 가지는 팔을 벌리듯 벌려 바위를 양쪽으로 감싸 안고 자라났다. 가서 바위를 흔들어 보았더니 정말 바위가 가지에 매달려있는 게 아닌가? 나무는 바위를 꼭 안고 변치 않는 사랑을 천년만년 하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내려가니 소나무에 겨우살이라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어느 회원님께서 약초인데 새가 씨를 물어놓아 그것이 자라서 저렇게 소나무 가지에서 자란다고 하신다. 저 약초를 먹으면 만병통치약이라는데 더 중요한 건 그 소나무가 정상에서 하늘 보기가 부끄러웠는지 가지가 뱀이 똬리를 틀 듯 가부좌를 틀고 더는 하늘로 오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려오는 내내 나무의 신비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느라 시간을 지체했더니 아래에서 빨리 안 온다고 난리이시다. 서둘러 내려와 미리 준비해주신 라면과 커피를 맛있게 먹고 우리는 서둘러 레일바이크로 향했다.
폐 열차로 여치 카페를 만들어 설치했는데 정말 여치를 닮았다. 그곳 입구에서 우리는 그토록 타보고자 했던 레일바이크를 타게 되었다.
구절리 역에서 아우라지 역까지 40여 분을 달리는데 레일 위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가는 것이다. 정선 시골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우리는 어린아이 마냥 신이 났다. 앞 바이크와 충돌을 우려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다들 웃느라 정신이 없다. 때론 열차 터널을 통과하고 때론 우리 바이크가 먼저 통과하라고 열차 차단기까지 내려져 지나가는 화물차가 서서 참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이 우스워 죽을 뻔했다.
15분을 달리고 중간 간이역에 내려 가락국수를 먹고 다시 출발하는 코스도 있다. 실제 열차만 아니었지 열차 흉내는 다 낸 것이다. 아우라지역에 도착하니 여름치카페가 있다.
붕어모양의 여름치 두 마리를 만들어 카페로 이용하는데 참 이색적이다. 이런 형상은 경기도에 설치해도 대박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용인에서 성남과 잠실까지 자전거 도로 근처에 레일을 설치하여 레일바이크를 운영하면 훌륭한 관광 자원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일바이크 운행이 끝나자 이번에는 풍경 열차가 달려와 빈 레일바이크를 걸고 우리는 풍경 열차에 몸을 싣고 다시 구절리 역으로 향했다. 이색적인 풍경 열차와 레일바이크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산행과 여행이 아니었나 싶다.
노추산의 매력에 흠뻑 빠진 내가 다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이 여운이 오래갈 것 같아 참 행복한 고민이다. 아울러 더불어 산행을 한 아름다운 파아란 산악회 회원여러분과 아내에게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항상 안전산행에 힘써주시는 운영진 여러분에게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산우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