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연후기요 너저분한 삶 속에서 일군 희망의 메시지-[Radio, 잠시 길을 잃다] 후기

[천하바보]

라디오를 듣다보면 이런저런 인생상담과 함께 음악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접하게 된다.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인생경험도 일천할 것 같은 젊은이들이 상담

을 해 준답시고 덤벼드는 것은 이제 사양하고 싶어 그런 프로그램을 멀리한 지 오래 되었지

만, 이번에 그런 것을 소재로 한 듯한 연극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이름하여 [Radio, 잠시

길을 잃다]라는 연극인데, Music Mono Drama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모노 드라마, 모노

드라마라..... 아마도 대략은 방송 DJ가 방송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가 줄거리의 기둥을

이루는 것이겠다. 그러니까 이 연극은 라디오 방송 그 자체가 아니라 방송을 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우리가 라디오로 음성만 듣게 되는 그 사람,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모노 드라마이니까 시종일관 DJ 역을 맡은 사람 한 사람만이 등

장할 듯 하고, 결국은 한 인간에 대한 탐구가 주를 이루는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이 작품은 극단 이마주, 극단246091에서 제작했고, 김세환이 연출을 했는데, 출연진, 그

러니까 모노 드라마의 단일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은 공연 시기에 따라 두 사람으로 나뉘어

나온다. 1월 30일부터 2월 22일까지는 DJ 하소연 역으로 이정비가 출연하고, 2월 24일부

터 3월 15일까지는 DJ 하지만 역으로 김준영이 출연한다. 아마 작품의 첫 발상은 배우 김

준영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은데, 내가 본 것은 2월 12일 이정비가 출연한 작품이다. 이정비

가 출연한 작품은 아주 오래전에 <트라우마>에서 본 적이 있고, 비교적 최근에 <존경하는

옐레나 선생님>에서 보았다. 두 작품에서 이정비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어서 이번에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선택해서 [공간소극

장]을 찾았다.


무대를 찾아 들어가니 가짜 눈을 그려 붙인 안경을 뒤집어 쓴 웬 여자가 관객들을 집적

거리며 돌아 다니고 있다. 이런 발상, 예전에 [비언소]에서 본 적 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정비가 맞는데, 하나 짓은 완전히 “또라이”다. 이미 그 지점으로부터 연극의 컨셉은 결정

된 듯 하다. <존경하는 옐레나 선생님>에서 고상한 여교사로 등장했던 이 사람이 이제는

완전히 “또라이”가 되어 우리들 앞에 다시 나타나겠다는 것이겠다. 한참 관객들을 집적거리

며 돌아 다니더니 연극 관람에 대한 예의 그 몇 가지 안내사항을 전하고는 퇴장, 암전.


그리고는 연극이 시작되는데, 그 첫 장면은 사실 예전에 본 <트라우마>와 너무 닮았다.

마치 소파위에 휴지조각처럼 구겨져 널부러져 있는 여자. 하소연이다. 정말 누구에게 ‘하소

연’이라도 해야겠다는 식의, 권태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피곤에 찌들어버린 청춘의 암담함

모습 그대로다. 2,30대의 청춘이면서 사는 모습은 완전히 중늙은이가 되어 버린 모습. 도대

체 이 여자 왜 이렇게 완전히 바짝 늙어버린거지?


집에서 만화책이나 뒤적거리고, 과자를 우적우적 씹어 먹으면서 TV 채널만 이리저리 돌

려대는 등 시간을 학살하며 사는 한심한 인생의 여자. 하소연. 하지만 그 여자는 방송에 나

가면 인생상담을 하는 커리어 우먼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인생 상담을 받아야 하

는 사람은 하소연 자신인데, 그녀가 인생상담을 하겠다고 설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부터 이제 그녀가 문제적 개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연극의 흐름은 하소연이 틀어주는

다양한 음악들과 그녀가 하는 인생 상담, 방송의 PD와 작가와의 티격태격으로 구성되어 있

지만 하소연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 연극의 진짜 문제 그것은 하소연의 인간적 성

격의 위상이다. 우리는 하소연이 하는 말과 행동을 건너 뛰어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된 하

소연의 인생을 주목하게 된다. 표면구조를 뒤집어서 이면 구조 읽기.


모노 드라마라는 극의 성격상 극의 핵심은 하소연이라는 인물을 구현하는 이정비라는 배

우의 연기력에 대부분을 빚지게 된다. 만약 김준영이 하게 되면 또 어떤 성격의 것으로 드

러날지 얼핏 짐작이 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정비가 분한 모습의 두드러진 특징은? 한마디

로 장난스러움이다. 이정비의 동작이나 말이나 장난끼가 잔뜩 묻어 있다. 이거야 말로 방송

의 품위를 걱정하고 예의 범절을 숭상하는 어른들이 본다면 어처구니 없는 짓거리이지만 하

소연이라는 인물은 도대체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방송에 적절할 것 같지도 않은 막말

을 쏟아내기도 하고, 나중에 수습할 방법 없는 말로 함부로 뱉어내고 요컨대는 흔히 말하는

방송인으로서는 썩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게 있다. 한껏 쾌활함에 장난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지만 하소연의 그런 모습

에는 어쩐지 좀 병적인 데가 있다. Radio가 길을 잃은 것이다. 글쎄?? 깔깔거리고 웃는 하

소연의 모습에는 사실 웃음을 웃음 그 자체로 즐기기 보다는 무언가에게 다급하게 쫓기고

있는 듯한 일말의 불안함이 감지된다. 이건 도대체 뭐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저런 것이 표

현될 수 있지? 난 잘 모르겠다. 그건 전적으로 배우 이정비의 개인 기량에 달린 문제일 듯

하다. 그건 집에 있으면 미칠 것 같은 권태감으로 몸부림치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전화질이

나 하며 번번히 퇴짜를 맞고, 누구하고도 대화할 처지가 못 되어. 강아지하고 그리고 곰 인

형하고 대화를 하고, 그러면서 사회적으로는 완전히 유폐상태에 빠져가는 한 인간, 그런 인

간이기에 사실 근원적으로 질병상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맥락에서 본다

면 하소연이 자꾸만 관객쪽으로 와서 관객과 무언가 교류를 해 보려 발버둥치는 것도 근원

적인 그녀의 고립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


처음에 이 극을 접할 때 뭐 그리 심각한 내용은 아닐 것 같고 그냥 보면서 부담없이 웃

을 수 있는 연극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극의 시작은 나의 그런 예상을 거의 충족

시켜 주는 듯 했다. 그런데 어머니로부터 계속적으로 전화가 오고 나중에 단편적으로 전해

지는 사연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상태는 결코 그냥 시시덕거리며 웃을 수 있는 상화이 아님

이 드러난다. 그녀는 이혼녀였고, 전 남편과 그녀의 딸은 지금 외국에 나가 있고, 그녀는 딸

을 보고 싶어 미쳐가는 상태에서 그냥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지탱하며 살아가는 중인 것이

다. 이 지점에 오면 관객들은 숙연해진다.


사태가 극단화되는 것은 그녀가 지금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도 방송을 하면서 짐짓 쾌활

한 어조로 청취자들에게 상담도 해 주고 음악도 들려주고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

이다. 도대체 집에서 그렇게 지긋지긋한 권태를 견디어 가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그녀가 방송에 나와서 문자 메시지를 잘못 보내어 일어나는 해프닝이라는 시덥잖은 소재로

깔깔거리며 사연을 주워 섬기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연극은 무대를 전후 공간으로 나누어

서 앞 공간에서는 집에서의 지긋지긋한 권태의 삶을, 뒷 공간에서는 방송에서의 짐짓 그 쾌

활한 활달함을 대조시키고 있는데, 방금 지긋지긋한 현실의 남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인간이

바로 다음에는 방송에서 깔깔거리며 즐기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은 삶 자체가 가지

고 있는 잔인한 이중성을 날 것 그대로 관중에게 집어 던진다.


장난끼 가득한 어조로 장난처럼 시작하다가 극이 진행되면서 이건 장난이 아니게 되는

사태 그 심각한 절박함으로 관중들의 신경줄을 팽팽하게 끌어당기기를 반복하며 감정을 점

점더 고조시키는데, 전에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처럼 지나치게 감정을 폭발시키지도 않

고 상황을 끈질기게 현상유지하면서 가끔씩 불쑥불쑥 밀려 오는 울분을 강아지에게 터뜨려

대는 이정비의 연기력은 상당한 경지에 이른 연기다. 딸과 전 남편에게 교통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절부절한 상태로 방송에 임하다 보니 실수를 연발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담당 PD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보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자 허탈해 하는 모습에서 원천

적으로 그녀에게 아량을 베풀어 줄 삶의 여력이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이 그녀에게

강하게 각인된다.


사실 이 연극은 내면적으로 존재하는 이런 심각함과는 별도로 아니, 그와 대조를 이루며

즐거움으로 가득 찬 분위기가 형성된다. Music Mono Drama라는 이름답게 작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귀에 익은 팝 음악들이 작품 전체를 넘실대면서 분위기를 흥겨운 분위기로 끌고

간다. 중간에는 Live 공개방송까지 구성하여 관객들이 정말 공개방송의 현장에 와 있는 듯

한 느낌을 가지게도 한다. 작품은 내면적으로 간직한 아픔과 겉으로 드러내는 깔깔거리는

쾌활함, 그리고 분위기를 잡아가는 흥겨운 음악들로 사실 좀 묘하고 복잡한 성격의 극이 되

어 가는데, 그것이 마지막으로 가면서 차분히 정돈되어 간다. Bette Midler의 The Rose가

조용히 흐르면서 말이다.


그녀는 지금 이 상태로는 도저히 삶의 질곡을 이겨나갈 수 없다. 자신이 지금 누군가에

게 상담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 누군가를 상당하겠다고 덤벼드는 것부터가 하나의 허

위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막상 그녀는 지금 그녀 자신을 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그

녀가 이제 맑은 표정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아픔을 감추고 겉으로만 쾌활함을 드러내는 그

거짓스러움이 아니라, “나는 왕언니가 아니‘라는 고백과 함께, ’나는 엄마‘라는 고백과 함께,

그녀 자신에게로 돌아와 라디오 방송이라는 현실에 작별을 고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과의

결별이 아니다. 이야 말로 진짜 현실과 만나는 것이다.


이정비라는 여배우가 이 작품을 이끌게 되면 작품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남자들의 말속에 있는 ‘통통하다’는 것이 “슴가짱‘의 표현이라고 모든 여성을 지칭하

는 남성들의 말에는 ’예쁜‘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마초들에게 일침을 날리던 하소연

은 아마도 상담 전문가로 자처한 것만큼이나 페미니즘의 선두 주자로 나서기를 자처한 것이

리라. 그런 그녀가 이제 ’엄마‘로 돌아가려 한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난 이렇게 말해. 사랑

은 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일군 씨앗을 바로 당신이라고“(베트 미들러의 [장미]중에서)라

고 말하는 경지가 아니었을까? 공격적인 페미니즘의 투사에서 타자를 인정하고 그를 포용하

는 모성애적 페미니즘으로 귀착되면서 이 작품은 끝난다.


그녀는 이제 거짓스러운 삶의 모습을 일소하고 환하게 맑은 얼굴로 자신을 솔직하게 바

라보고 솔직하게 드러내며 우리들 모두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녀는 이제 함부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녀의 삶 그 자체로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

이다. 암시의 내용 그것은 무엇일까? “기억하세요. 한겨울 차가운 눈 아래 땅속 깊히 묻혀

있는 씨앗을.... 그 씨앗은 따스한 햇살의 사랑을 받아 봄이 되면 한 송이의 장미로 피어 날

것입니다.”(베트 미들러의 [장미] 마지막 소설)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그러

기에 ‘방황한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이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선 우리 누님’(서정주 국화 앞에서) 같은 모습으로 삶을 관조한 결과가 아니겠는

가?


섯불리 긍정적 비젼을 제시하는 작품은 좀 허망하고 위험할 수 있다. 잘못하면 그건 기

계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긍정적 비젼을 제시한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당위성

이 관객들에게 납득되어야 하고 연극적 장치로 그것을 완수해야 한다. Radio가 ‘길을 잃’었

지만 그건 ‘잠시’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음을 이 연극의 복잡한 성격과 이 정비라는 배우의

예각적이리만큼 대조적인 성격의 연기를 훌륭하게 구현해 냄으로써 완벽하게 관객들에게 각

인시켜 주었던 작품. 그래서 관객들에게 최후의 희망의 메시지로 남을 수 있었던 작품이 바

로 이 작품이 아니었던가 싶다.


희망의 메시지를 안고 떠난 부산시민 김형민

[yebelo]

장문의 후기 감사드립니다....또 다른 느낌을 받을수 있습니다.^^

[최유진]

후기 잘 보았습니다.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스쳐보낼뻔한 연극, 저도 방청객이 되어서, 같은 감동, 그리고 저만의 다른 감동을 느껴보고싶습니다..

[오미란]

아...글쓴님 자세한 후기가 생생함을 전달하네요. 이 연극이 막 보고싶을정도로..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