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
옳다고(義) 여기는 일을 위하여 싸우러 나선 병사(兵士)를 의병(義兵)이라고 합니다. 의병(義兵)은 정의(正義)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병(民兵. 민간인으로 구성된 부대)을 뜻하는 말입니다. 외적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간인 무장단체가 의병입니다. 조선시대의 의병활동은 크게 왜란·호란·일제침략기에 나타납니다. 나라가 있어야 내 고장도 가정도 가족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애국심과 애향심(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의 바탕에는 이름 없는 의병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장, 국가를 위해 그들은 분연히(떨쳐 일어서는 기운이 세차고 꿋꿋한 모양) 농기구 대신 무기를 들었습니다.
한말(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 의병활동은 크게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납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이 원인인 을미의병(1895), 을사조약의 강압적 체결이 원인인 을사의병(1905),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강제해산이 원인인 정미의병(1907)입니다. 위정척사운동을 계승한 한말 의병은, 일제에 빼앗겨가는 국권(주권과 통치권)을 수호하기 위해 힘을 모읍니다. 을미의병에는 양반 유생(선비) 출신으로 제천의 유인석, 춘천의 이소응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했습니다. 을미의병은 한말 최초의 의병 활동이었지만, 고종의 해산 명령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을미의병은 왕과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사(큰일을 일으킴)했는데, 왕이 해산하라고 하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을사조약의 강압적 체결에 반발하여 일어난 을사의병은 양반출신 의병장으로 민종식·최익현·정용기 등이 활약했고,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신돌석이 유격전(게릴라 전술)으로 유명했습니다. 평민 출신이 의병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전보다 계급의식이 옅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을사의병 때부터 의병활동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한편 일제가 헤이그 특사파견을 구실로 강압적으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반발을 우려하여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리자, 해산당한 군인들이 의병에 가세(힘을 보태거나 거듦)합니다. 이를 정미의병(1907)이라고 합니다. 특히 시위대 대대장이었던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중앙군인 시위대와 지방군인 진위대의 군인들이 합류합니다. 이로써 의병은 활동에서 전쟁으로 싸움의 성격이 전환됩니다. 또한 정규(정식)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가세함으로써 의병의 더욱 규모나 전투력은 더욱 향상됩니다. 정미의병 때의 평민(포수) 출신 의병장으로는 홍범도·차도선이 있습니다. 포수는 총으로 짐승을 잡는 사냥꾼을 말합니다. 정미의병 때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원주의 민긍호, 문경의 이강년 등이 있습니다.
의병의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침략자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빼앗겨 가는 국권을 지키는(수호) 일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흩어진 힘을 모아야 했습니다. 의병들을 모아 황제(순종)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군을 서울에서 몰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인영·허위 등의 양반 출신 의병장을 중심으로, 전국의 의병 1만여 명이 경기도 양주에 집결(1907.12)합니다. 그리고 ‘13도창의군’이라는 이름으로 허위를 선발대로 서울진공작전(1908.1)을 개시(행동이나 일 따위를 시작함)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실패합니다. 창의(倡義)는 국난(나라가 존립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태로운 나라 전체의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진공(진격)은 적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전국의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된 전국(13도) 의병부대가 13도창의군입니다.
적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심력(원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려는 힘)을 키워야 원심력(원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신돌석이나 홍범도와 같은 유능한 의병장들은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 전투의 중심에서 배제(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물리쳐 제외함)되었습니다. 힘을 모아도 어려운 상황에서 힘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양반이라는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의병의 역할이라는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은 침략적인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본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얼마나 모으고 집중시킬 것인가에 대한 치열함이 부족했습니다. 총대장 이인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주둔지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가 가면서 한 말은 ‘불효는 곧 불충이다’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에 대한 충과 부모에 대한 효가, 가치충돌을 일으킬 땐, 대체로 충보다 효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배고프고 혹독하게 추운 겨울에, 일본과 싸우자던 총대장이 부하들을 남겨두고 의병부대를 떠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러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이후, 의병부대들은 흩어져 각기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1909년까지 하지만, 약한 군사력과 일본군의 대규모 진압(초토) 작전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져 국권이 피탈된 1910년 이후에는 대부분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합니다. 국내에서 국권 수호를 위해 일본군과 싸우던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으로서 국권회복투쟁을 전개합니다. 초토화 작전은 모든 시설이나 물자를 적군이 이용할 수 없도록 모조리 파괴하거나 불을 질러 없애는 작전을 말합니다. 일본군은 의병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하여, 양민(순박한 백성)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곡식을 탈취했습니다.
한편 일제(제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의병 이외에 일제에 맞서는 방법이 모색(일이나 사건 따위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실마리를 더듬어 찾음)됩니다. 그 핵심은 침략자 일제의 머리(우두머리)를 치는 것입니다. 당시 한반도 침략의 우두머리는 통감부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는 이름으로 의병투쟁을 하던 의병장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의병장으로서 침략의 원흉(못된 짓을 한 사람들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합니다. 장군은 군대의 우두머리로 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 무관을 말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의병의 지휘관이었습니다. 따라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처럼, 안중근 의사는 안중근 장군이었습니다. 안중근 장군은 이토 히로부미를 개인적인 원한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 의병장으로서 적장(적의 장수)을 죽인 것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일제는 그분의 당당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의사(義士)는 주로 무력으로 행동을 통해서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을 말합니다. 무력으로써 항거하다 의롭게 죽은 사람을 의사라고 하며,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지조(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나가는 꿋꿋한 의지)를 나타내는 사람을 열사(烈士)라고 합니다. 죽음으로 정신적인 저항의 위대성을 보인 사람을 열사라고 합니다. 유관순 열사, 이준 열사, 이한열 열사,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는 앞의 기준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참고로 의사와 열사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본질은 의사와 열사가 아니라, 그분들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사익을 버리고 공익을 위하여 힘씀)의 정신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