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은 얼굴이 없다. 그녀가 등장하는 영화에는 전도연은 없고 그녀가 맡은 배역만 있다. [너는 내 운명]의 전은하, 1인 2역을 맡은 [인어공주]에서 딸 나영과 어머니 연순, [스캔들의 숙부인, [피도 눈물도 없이]의 수진, [해피엔드]의 최보라, [약속]의 채희주 등 다른 어떤 배우보다도 배역의 이름을 더 기억나게 만드는 배우가 전도연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신이 맡은 배역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도연에게는 자신의 얼굴이 없다. 이것은 다양한 배역으로 변신을 해야 하는 배우로서는 매우 큰 강점이다.
전도연은 미인이 아니다. 황신혜나 김희선, 혹은 전지현이나 염정아처럼 당대의 최고 미인 대열에는 끼지 못한다. 성형외과를 찾는 젊은 여성들이 이렇게 바꿔달라고 의사들에게 내미는 사진에도 그녀는 들어있지 않다. 키도 작다. 자료에는 165cm 45kg O형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그녀를 만나보면 아무리 높은 하이힐을 신고 있어도 그보다 훨씬 직은 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도연은 90년대 중반 이후 10년 동안 여전히 한국 최고의 여배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다. 그녀는 박찬욱 김기덕 김지운 허진호 유하 등 젊은 감독들의 모임인 [디렛터스 컷]에서 수여하는 올해의 최고 연기자상을 수상했다. 또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제작자 프로듀서 등 현장 스테프와 영화 기획 마케팅 담당자, 각 신문 방송의 영화 전문 기자 등 1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의 최고 배우로 최민식과 전도연이 뽑혔었다. 즉 대부분의 한국 영화 전문가들은 가장 연기 잘하는 여배우로 전도연을 꼽는다는 것이다.
1997년 [접속]으로 처음 그녀가 스크린에 등장했을 때, 충무로에서 그녀의 성공을 예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90년 [존슨 앤 존슨] CF로 얼굴을 알린 전도연은 그해 TV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을 통해 연기자로 데뷔한 이후, [종합병원](1994년) [젊은이의 양지](1995년) [별은 내 가슴에])1997년) 등을 통해 90년대를 대표하는 탈렌트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지만, 영화에서는 아직 신인이었다.
그때는 TV에서의 화려한 이력으로 스크린에 진출을 했다가 고배를 마신 연기자가 수없이 많아서, 아무리 인기 탈렌트라고 해도 영화 경력이 처음이면 출연료도 형편없었다. [닥터 봉][은행나무 침대][초록물고기] 등으로 석규불패의 신화를 쌓아가던 충무로 최고의 몸값 한석규가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접속] 제작진은 적은 출연료로도 캐스팅이 가능한 여자 탈렌트를 찾다가 전도연과 계약했다는 후일담이 있다. 그러나 전도연은 다음 작품 [약속]의 연이은 성공으로 자신을 충무로 최고의 여배우 대열에 합류시킨다. [접속]은 서울 관객 80만, [약속]은 70만을 기록했다. 아직 [쉬리]가 한국영화의 흥행사를 쓰기 이전이었다. [서편제]가 서울관객 100만을 넘기면서 한국영화사의 신화로 기록되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녀가 출연한 영화가 대단한 관객동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한동안 전도연 이름 앞에는 [흥행공주]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사이버스페이스를 최초로 영화에 접목시킨 [접속]에서, 전도연이 맡은 배역은 수현이었지만 그녀는 그 이름보다 채팅할 때 쓴 닉네임 [여인2]로 더 기억된다. 지금처럼 초고속 통신망을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가 아니라, 모뎀으로 연결된 PC통신 시대이기는 했지만, 가상공간에서 채팅을 통해 만난 남녀가 각각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며 가까워진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전도연은 이 작품에서 정서적 환기력이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TV가 아닌 스크린의 대형 화면에서 그녀는 훨씬 더 안정되어 보였다. 클로즈업 숏 위주로 전개되는 좁은 브라운관보다는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몰입의 정서를 그대로 전해줄 수 있는 대형 스크린이 훨씬 더 맞는 것 같았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PD인 동현(한석규 분)은 헤어진 옛 애인을 잊지 못한다. 그녀가 자주 듣던 음악,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를 신청한 애청자가 혹시 옛 애인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녀와의 접속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음악을 신청한 홈쇼핑 가이드 수현은, 친구의 애인을 몰래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닉네임 [여인2]는 그림자처럼 감춰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우회적 표현이다. 동현과 수현은 PC 통신을 통해 가상공간인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채팅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그들은 현실 공간에서 옷깃을 스치며 지나쳐 가기도 하지만 화상 채팅이 도입되기 이전이었으며 가상공간에서의 만남이 전부였으므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수현에게 고통을 주는 안구건조증은 그러므로 매우 상징적 장치이다. 물기가 사라진 눈은, 자신이 처해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상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감정의 사치에서 벗어난 영화 전체의 쿨한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접속]의 포스터도 푸른 빛을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접속]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남을 시도하는 엔딩씬을 찍은 피카디리 극장도 지금은 많이 변했다. 극장 앞 넓은 광장의 모습도, 수현을 몰래 훔쳐보기 위해 동현이 올라간 광장의 2층 카페도, 이제는 리모델링을 통해 영화 속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나 소통 부재 시대의 현대인의 외로움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접속]의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관객들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다음 해인 1998년, 이만희 작가의 대학로 힛트작 [돌아서서 떠나라]를 영화화 한 김유진 감독의 [약속]에서 전도연은, 조폭 보스 공상두를 사랑하는 여의사 채희주로 등장해서 감정의 폭을 크게 드러내는 멜로 영화의 히로인으로 부상한다. [약속]에서 전도연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사랑을 향해 전진하는 채희주의 당당한 모습을 연기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비록 조폭의 보스지만,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만 나를 배신하는 게 아냐. 네 마음 속에서 나를 지우는 것도 배신이야]라는 명대사를 던지며, 공상두를 향한 영원한 사랑을 드러낸다.
하근찬의 원작소설 [여제자]를 영화화 한 이영재 감독의 데뷔작 [내 마음의 풍금](1998년)에서 전도연은, 17살이지만 학교에 늦게 들어가서 아직 꾀죄죄한 산골 초등학교 5학년인 윤홍연으로 등장한다. 기자들에게 촬영현장을 공개했을 때, 촬영장소인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에 도착한 기자들은 아무리 고개를 둘러보아도 전도연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는 50년대 시골 아이들이 입고 있던 검은 바지를 입고 까맣게 탄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 속에 섞여 있는 전도연은 이미 산골 소녀였다. 이 일화는 그녀의 배역 몰입도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그녀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어디서 발생하는가를 보여 준다.
나는 아직도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1999년) 시사회가 있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헐리우드 극장 무대에서 배우와 감독이 인사말을 마치고 불이 꺼진 뒤 영화가 시작되었다. 아파트의 긴 복도를 또박또박 걸어가는 전도연의 모습을 길게 잡은 오프닝씬이 끝나고 타이틀이 뜬 뒤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충격적인 베드씬. 그래도 영화 기자 평론가 등 선수들만 모임 시사회였지만, 당시 극장 안은 바늘 하나만 떨어져도 쨍강 소리가 날만큼 갑자기 공기가 팽팽해졌다.
한국 영화사에서 최초의 여성가장으로 기억될 [해피엔드]의 최보라는 은행원이었지만 IMF의 구고조정으로 실직한 남편 서민기(최민식 분) 대신 학원을 운영하며 집안 경제를 책임진다. 5살 된 딸이 있고 사랑하는 남편이 있지만, 대학시절 애인이었다가 군 입대로 헤어졌던 김일범(주진모 분)을 다시 만나 학원 원장실에서도 정사를 가질 정도로 그녀는 대담한 애정표현을 보여준다.
특히 남편과의 식탁 씬, 남편이 잔소리를 하자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최보라는, 가스렌지 위에서 끓고 있는 주전자를 보며,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 내 일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당신 일이라면, 저 가스렌지 불은 당신이 꺼야 한다고 말한다. 집안에서의 경제적 역할의 전도가 성적 역할의 전도로 이어지면서 비극적 파국을 불러일으키는 [해피엔드]는, 전도연의 대담한 노출씬 못지않게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진보적 정신이 달라진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반영하고 있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0년)는 홍상수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박흥식 감독의 데뷔작이었다. 박 감독과의 인연은 그 이후 [인어공주]로 이어지는데, 은행원 설경구의 구애를 받아들이는 보습학원 원장 원주 역으로 그녀는 자연스런 일상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도연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눈에 들어오는 영화였지만, 아직 설경구는 일상적 자연스러움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섬세한 일상의 무늬들을 세심하게 복원해내는 홍상수적 스타일을 답습하는 연출은 아직 독창적 스타일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인성을 스타로 만드는 매니저 역으로 TV 드라마 사상 최고의 개런티를 받고 [별을 쏘다](2002년)에 출연한 이후, 전도연은 변신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 씌어진 거의 대부분의 멜로 영화 시나리오가 전도연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녀가 선택한 것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2002년)였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투견장의 건달 불독(정재영 분)의 정부로 등장하는 전도연은, 왕년의 금고털이며 지금은 택시운전을 하는 가죽잠바(이혜영 분)과 함께 거친 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수진을 연기한다. 권투 경기장의 라운드 걸 출신이며 가수 지망생인 선글라스 역의 전도연은 호피 무늬 탑과 짧은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굵은 파마머리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사]를 만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렬지사](2003년)는 전도연에게는 첫 사극이었다. 그러나 9년간 수절하며 열녀문까지 하사받았지만 바람둥이 조원(배용준 분)의 열렬한 애정공세 앞에 무너지는 숙부인 역은, 그대로 전도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표현대로 사랑지상주의자니까. 이미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 [발몽][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등으로 여러번 영화화 된 18세기말 프랑스 작가 쇼데를르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를 같은 시기의 조선으로 배경을 옮겨 리메이크 한 이 영화는, 빼어난 시각적 영상미와 함께 숙부인을 함정에 빠트리는 조씨부인(이미숙 분)의 매력적 캐릭터와 전도연 배용준의 연기가 조화를 이루어 [통하였느냐]는 시중의 유행어까지 낳았다.
한 배우에게 1인 2역을 맡겼다는 것은 연기력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인어공주](2004년)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20대의 딸인 은행원 나영과, 그 어머니의 처녀시절인 70년대 바닷가 어촌 마을의 해녀 연순 역을 동시에 연기할 사람은 전도연 밖에 없다는 말이 충무로에 돌았고, 결국 전도연은 그 배역을 연기했다. 그리고 역시 전도연이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AIDS에 걸린 사창가 출신의 시골 다방 종업원 전은하 역을 연기하기 위해 전도연은 [너는 내 운명](2005년)의 시나리오를 8번이나 읽었다. AIDS라는 낯선 병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시나리오는 매력적이었고, 상대역인 순수한 시골 노총각 김석중 역에 황정민을 추천했다. [천군] 촬영차 중국에 가 있던 황정민은 나중에 [너는 내 운명]의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곧바로 전도연에게 문자를 날렸다. [도연아, 고마워]
전도연과 황정민은 같은 싸이더스 HQ 소속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오누이같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미남 미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내 운명]은 그들의 기막힌 어울림으로 재미와 감동을 준다. [죽어도 좋아]에서 다큐멘타리적 기법을 충분히 활용한 박진표 감독은, 다시 또 실화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아니었으면 소재의 통속성에 진정성이 가려질 위험에 처할 수도 있었다.
전도연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시대 최고의 여배우다. 그녀가 맡은 배역은 영화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배역에 대한 논리적 해석, 깊이 있는 접근이 아니라, 동물적인 감각과 직관적 본능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또한 그녀가 천부적 연기자라는 말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제 곧 그녀의 얼굴에서도 주름살이 늘어날 것이고, 연인보다는 아내나 어머니 역으로 등장하는 빈도가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것은, 배역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누구보다 자연스런 연기를 섬세하게 그녀가 보여줄 것이라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