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stein, Field marshal Erich von (1887.11.24베를린-1973.6.11뮌헨 근처 이르센하우스)
논쟁의 여지없이 히틀러의 여러 장군들 중 가장 유능하고 탁월했던 육군원수. 특히 "기동전의 대가"로 불리운다. 본명은 에리히 폰 레빈스키Erich von Lewinski. 만슈타인은 프러시아귀족이자 포병장교인 레빈스키장군의 10번째 아들로 태어나 친척인 만슈타인 장군의 양자로 입양됐다. 스트라스부르크strasbourg에서 학업을 마친후 사관 후보생이 된 만슈타인은 1906년 제3보병연대에 배속됐고 1913-14년 사이에 군사학교를 수료했다. 폴란드 침공(39.9-10)당시 룬트슈테트장군의 참모장으로 근무한 만슈타인은 독일육군최고사령부OKH가 수립한 프랑스 침공계획(황색계획)을 강력히 비판하고 이를 대신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문제의 초점은 독일육군의 주공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만슈타인의 주장은 육군의 주공을 프랑스 영토내의 프랑스군과 영국원정군을 분리시키기 위해 북부전선으로부터 룬트슈테트트의 A집단군이 담당할 남부전선으로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장갑부대에 의한 아르덴 Ardennes삼림지대통과)은 만슈타인 자신은 몰랐지만, 히틀러의 견해와도 일치했다. 하지만 당시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만슈타인이 황색계획 수정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계속 제출하자 격분, 그를 슈테틴Stettin에 위치한 제38군단으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이 좌천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돼 만슈타인은 자신의 낫질작전Sichle-Slice을 히틀러에게 직접 설명할 기회를 얻었고 마침내 작전이 채택돼 40년 6월 프랑스 함락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됐다.만슈타인은 곧 유능한 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략적 안목을 가진 야전지휘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40년, 프랑스 침공당시 만슈타인은 제38군단을 지휘해 독일육군 중 최초로 센Seine강을 도하했고 중장으로 진급했다. 또한 만슈타인은 41년 소련침공당시 제56장갑군단장으로 서부전선을 휩쓸었던 전격전Blitzkrieg을 동부전선에서도 펼쳐 동년 6월 22일부터 26일 사이에 약 320km를 전진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과시했다. 41년 9월, 만슈타인은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에 소속된 제11군사령관에 임명됐다. 42년 히틀러가 주도한 하계공세 준비의 일환으로 남부집단군은 A, B집단군으로 나눠졌고 제11군은 A집단군에 소속돼 공세에 참여하게 됐다. 작전기간 중 만슈타인은 크림반도Crimea를 점령하고 소련군의 주요공세를 저지한 후 42년 7월 세바스토Sevastopol을 함락시킨 공로로 원수로 진급했다. 42년 11월 만슈타인은 스탈린그라드 작전지구Stalingrad Sector를 관할하는 Don집단군사령관에 임명됐다. 이 당시 돈집단군에는 제11군을 포함해 만슈타인조차도 구원에 실패한(히틀러의 간섭과 파울루스의 비협조로 인해)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 포위된 제6군도 속해 있었다. 43년 2월, 파울루스의 항복이후 돈집단군과 B집단군은 해체돼 새로이 남부집단군으로 개편됐다. 남부집단군을 지휘한 만슈타인은 43년 3월 하르코프Kharkov와 벨고르드Belgord를 탈환하고 포포프Popov의 전차군을 포함, 소련군 4개군을 와해시키거나 전투불능 상태로 만드는 엄청난 전과를 올려 스탈린그라드에서 붕괴된 제6군의 복수를 했다. 그러나 하르코프와 벨고르드 탈환이후, 히틀러의 지나친 작전관여와 연기로 실패한 쿨스크전투를 제외하고 만슈타인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인해 공세에서 수세로 몰리게 됐다. 그해 9월 만슈타인은 드네프르Dnieper강 연안으로 철수가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고 비록 불가피한 철수작전임에도 불구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으로 소련군에게 적지않은타격을 입혔다. 44년 2월 중순까지 만슈타인은 재차 철수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히틀러는 3월 30일 계속된 후퇴의 책임을 물어 만슈타인을 해임했고 종전때까지 재기용하기 않았다.
만슈타인은 45년 전범으로 체포돼 49년 영국군사법원에서 18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53년 석방됐고 55년 회고록을 출간했다. 한편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가 만슈타인을 2차대전중 가장 유능한 장군중 한명이라고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
첫댓글 http://hapylifeman.com.ne.kr/index.htm (퍼옴 참고)
전격전의 아버지!!! 롬멜장군담으로 젤 유능한 장군있었죠..
전장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장병들에게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귀중한 선물이 바로 '명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슈타인이라면 명장이라는 말이 갖는 무게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겠죠. 다만 '장병'이기 전에 '국민'이기도 하기에 독일군보다 독일인이었던 사람들에게 히틀러라는 재앙이 주어지는 바람에...
독일군 장병들의 대차대조는 너무 큰 마이너스이긴 했습니다만... 덕분에 만슈타인이 역사에 남은 위대한 장군이 됐으니 아이러니라고나 할까요...
만슈타인만큼이나 실력있는 장군은 세계역사상에서도 손꼽을 정도일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만슈타인이 히틀러에게서 독일군 총 지휘권을 부여받았다면 어땠을까요...
롬멜이 전술의 귀재라고 한다면 만슈타인이나 룬트슈테트즈음 되는 사람은 전략과 전술 양측에 모두 귀재였습니다. 롬멜이 아프리카군단에서 영국의 2선급 부대와 맞받어 싸웠다면 만슈타인과 같은 사람은 동부전선에서 롬멜보다 더한 전력적 열세를 가지고 싸운 인물이죠. 장군의 위대함으로만 따진다면 ....
만슈타인에 더 주고고 싶습니다. 롬멜은 야전군의 장군으로선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나 좀 더큰 대국적인 의미의 전략적 전선 사령관은 만슈탄인을 더 신용하고 싶군요.
그만큼 만슈타인 장군은 그 지명도나 유명도는 대중에게 떨어지지만 깊게 들어갈수록 롬멜장군보다 떨어지는 면이 전혀 없는 장군입니다.
그리고 프러시아의 명문 귀족 장군이기도 하지요.....- -;;;;롬멜은 히틀러가 키워준 사람이고.......만슈타인은 프러시아 군국주의 귀족이 키워준 것이라고 하면 무리가 있을까요??- -;;;;
루드비히 베크도 대단한 장군이었죠. 안그렇습니까? 베크님?...^^
쩝 1941시나리오에서 만슈타인이나 롬멜이나 동부전선에서 녹기는 한가지 입니다 다만 버텨 줄뿐.....ㅠ.ㅠ
ㅋㅋㅋ 뭐 그시나리오야 독일이 박터지는 시나리오이니 당연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