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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도 단락(段落)과 행갈이에 원칙이 있다.
이봉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시는 자유시건 정형시건 산문과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산문과 같은 모습을 한 산문시가 있는가 하면 이를 흉내 낸 시조도 없지 않다. 심지어는 띄어쓰기도 하지 않고 모든 글자를 붙여놓아 읽을 수도 없게 해 놓고 대단한 명작인 체하는 돌출작품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일수록 내용은 허술하여 시적 가치는 졸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는 운문이다. 운문은 산문보다 내용을 압축하고 운율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글자를 모아 연(聯 stanza)을 짓고 행(行 line)을 적절히 배열하는 것이다. 압축과 운율이라는 2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 산문보다 한 단계 높은 기술과 노력이 따라야 하며 그 수단으로 연·행의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에 더하여 시조는 3장 6구의 표준설계대로 한 채의 집을 짓되, 수·장·구는 따로 떼어 놓아도 의미가 살아 있도록 해야 한다. 현대시조는 태생적으로 수·장·구 자체로 연과 행이 잘 배열되어 있지만 의미전달을 더욱 확실하게 하거나, 운율을 살리거나, 글 모양을 더 좋게 하기 위하여 독창적인 단락을 짓고 행갈이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장·구는 언제나 뚜렷하고 시조 리듬을 살려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수와 수는 멀리 떨어져야 하고, 장과 장은 가까이, 구와 구는 더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마치 시인에게는 아무렇게나 글을 흩어 놓아도 되는 특권이나 있는 양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 이유 없이 수(首)의 구분을 없애고 서로 붙여 놓거나, 장(章)을 떼어 다른 수에 붙여 놓기도 하고, 구(句)나 단어 심지어 매 글자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여러 개의 기둥을 세워야 할 곳에 한 줄로 기둥을 연결해 놓으면 집이 될 수 있을까? 기둥 하나가 서야 할 곳에 두 동강을 내어 다른 기둥과 붙여 놓으면 지붕을 올릴 수 있을까? 식당인지 변소인지 모르게 뒤죽박죽 집(시조)이라고 지어 놓고 우쭐대는 것을 독자는 그냥 참고 읽어야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시조를 잘 쓴답시고 원칙도 없이 수·장·구를 멋대로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하며 자유시의 흉내내기에 바쁜 시조시인들이 많아졌다. 내용상의 작품가치를 올리는 데는 게으르고 손쉽게 파격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끌려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 시조단이 그러니 신인들은 무엇을 보고 배울까?
한마디로 시조는 의미, 운율 또는 모양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유 있는 단락을 짓고 행갈이를 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면 내용물이 한 층 돋보이게 될 것이다.
이하 최근 몇 달 동안의 시조 마당을 둘러본다.
1. [월간문학]의 작품들
(1) 2012.7월호
고질병 같은 자유시의 흉내 내기는 거의 없어졌다. 이 달의 시조 8편 중 [시인의 빛](김춘기), [목련꽃 연정](정춘자) 등 2편은 이유 없이 수(首)를 붙여 놓아 시조의 모습이 아니고 마치 민달팽이를 보는 것 같다. 달팽이는 달팽이다워야지 지렁이 같은 달팽이는 보기에 민망하다.
[봄.소백산](김 전), [둥그런 지구 안에](안문섭), [꽃 한 송이 필려나](김영권), [봄산에 들면](이운정), [남산 위에 저 소나무](이재곤), [냉이꽃](박중선) 등 6편은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나 음보정형에 충실한 작품들이다.
봄, 소백산
김 전
소백산 나루터에 턱을 괴고 바라보면
구름이 강물 되어 깊이를 잴 수 없다
흘러간 세월의 깊이 저만큼의 깊이일까
연화봉 폭포수가 무지개를 얹어 놓고
시원한 소피 소리 바위들을 흔들면서
화냥년 치맛자락에 타오르는 저 혼불.
봄 소백산에 올라 하늘과 폭포와 꽃을 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첫째 수에서는 강가에 앉은 듯 깊이를 잴 수 없는 하늘 강을 보며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둘째 수에서는 폭포와 바위와 봄꽃들을 찬미하고 있다.
[(소백산) 나루터에]는 [나루터에서]라야 의미가 확실하겠다. 턱을 괴는 것은 손이나 팔이지 나루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서 의미를 훼손한 실수를 범했다. 그뿐만 아니라 둘째 수의 [소피 소리]와 [화냥년]은 [무지개]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시어이다. 바위를 타고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를 ‘오줌’에 비유하고, 붉게 타오르는 화려한 봄꽃을 수치스런 역사의 단어 ‘화냥년’(병자호란 때 적군에게 끌려가 몸을 더럽히고 돌아온 ‘還鄕女’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음)에 얽어 묘사하므로 아름다운 소백산에 오물을 뒤집어씌웠다.
(2) 2012.8월호
시조 9편 모두 완전한 자수정형은 아니지만 수·장·구가 뚜렷한 작품들이라 누가 보아도 자유시 마당과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시조가 제자리를 찾은 듯하여 보기 좋다.
그러나 내용면에서 [고랑정(皐浪亭)에서](문한종), [그 여름날의 연꽃](유휘상), [서해의 노을발](김산중), [충무공의 그림자](배상섭), [산골의 풍광](조희식) 등 5편은 특정 지명(地名)을 주제로 올려놓고 그에 따른 인문과 지리를 엮어 내고 있는 일종의 기행시이다. 기행시는 시인과 ‘같은 경험’을 해 본 독자가 아니면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시적 감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즉 시인 혼자만 자기함정에 빠져 흥분하고 감탄할 뿐 그곳을 가보지 아니한 독자는 시를 읽어도 감명을 받지 못한다.
고랑정(皐浪亭)에서
문한종
임진강 바라보니 시야의 장관이다
웅자한 석벽 자태 감탄스레 뽐을 내니
고려 왕 태조 왕건도 뱃놀이로 즐겼구나
(첫째 수)
앞에는 기러기 떼 춤추며 노래하고
신라 말 김부왕의 얼이 묻힌 능원 자락
공민왕 기악의 잔치 베풀만도 하였겠다
(셋째 수)
고랑정에서 바라보는 임진강의 빼어난 경치를 전하려고 하였지만 가 본 적도 없고 그에 얽힌 고사(古事)도 모르는 일반 독자들은 그저 ‘경치 좋은 곳인 모양이다’ 하는 것으로 끝이다. 더 알려고 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다.
(3) 2012.9월호
이 달의 시조마당은 6편이 고작이다. 그나마 [그예, 우리 따로 가고](홍진기), [깨달음](해 원), [동해는 우리바다](최숙영) 등 3편은 수의 구별이 없는 민달팽이이고, [백운산(白雲山)](신익현)은 기행시이다. [또 넘보는 저 일본](이수정)은 정치,시사 문제를 예술의 무대에 끌어 올려 맛없는 음식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다. 결국 [허전한 마음 따라](박명재)만 시조다운 시조의 모습으로 주제선택에도 무리가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또 넘보는 저 일본
-영토 침탈의 그 망상
이수정
음흉한 주둥이들 가증스런 행동거지
그 무지(無知), 한결같이 역사를 짓밟고 온
다 알지 그 후안무치한 지난 만행(蠻行) 꿈꾸며
이 오만(傲慢), 세계인의 주시(注視)를 비웃으며
그 망상 끌어안곤 궤변으로 미쳐 날뛰는
이 죄과, 하늘 우러러 참회하라, 옷깃 여며.
문학작품을 남 욕하는데 쓰고 있다. 분노와 욕설과 호통뿐이다. 설사 모든 국민의 감정이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표출하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시조마당은 그런 장소가 아니다. 만약 일본시인이 우리를 향하여 이런 시를 썼다면 우리는 어떻게 평해야 할까?
2. 계간지의 작품들
(1) [계절문학]<2012 여름호>
시조 15편이 실렸다. 모두 내로라하는 원로·중견시인들의 작품이다. 그 중 [계곡의 새](송선영), [무상](김제현), [연지(蓮池)-봄](리강룡) 등 3편은 수의 구별이 없는 민달팽이이고, [청령포.1](김종윤)은 장과 구의 구별이 없이 1줄로 쓴 산문시이다. 모두 이유 없이 단락과 행갈이의 원칙을 무시하였다.
원칙을 무시한 2작품과 원칙에 충실한 1작품을 가려 비교하여 본다.
무상
김제현
우리가/ 보는 것은/
너의/ 뒷모습일 뿐/
우리는/ 너를 모른다/
너의 이름을/ 모른다/
눈여겨볼/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것들이여/ 4544
사람의/ 얼굴도/
쉴새없이/ 바뀌고/
온통/ 물음이고/
물음이/ 대답인 무상이여/
만일에/ 네가 아니면/
이 업장을/ 어이 하리/
어찌/ 이승만 무상하랴/
천상도 지옥도/ 무상하리니/
무상은/ 덧없음이 아니다/
삶이다/ 희망이다/
자비다/ 아름다움이다/
기다려 볼/ 일이다./
수의 구별도 없고 깨진 음보는 너무 많아 세기조차 어렵다. 자수정형은 물론 음보정형과도 거리가 멀다. 이것도 모자라 첫째 수(수라고 할 수도 없지만) 종장은 4544로 스스로 시조가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자유시흉내내기가 지나쳐 그대로 자유시가 되었다.
내용은 한결같이 추상(抽象) 일색이고 현대시의 특징인 관념의 형상화(形象化)는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이 ‘무상’이라는 관념을 더욱 관념화시키고 있다. 뒷모습, 이름, 물음, 대답, 업장, 이승, 저승, 천상, 지옥, 덧없음, 희망, 아름다움 등등 많은 관념을 진열한 ‘관념의 전시장’이다. 무상은 삶이고 희망이고 자비이고 아름다움이라고 위대한 철학인 양 선언을 하고 있지만 시적 논리가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하다. 독자는 읽고도 잡히는 게 없어 마냥 어리둥절할 뿐이다. 정말 무상(無想)이다.
청령포.1
김종윤
삼가/ 등 구부리고 있는/ 울먹한/ 소나무들/ 물길도/ 서느러니/ 사무쳐/ 흐르는 곳/ 그 모두/ 어둑한 세월/ 바자니고/ 있습니다./
어린/ 단종의/ 지존은/ 가냘퍼라./ 머나 먼/ 유배지,/ 영월 땅/ 청령포에 와서/ 그 짧은/ 생애를 마친/ 비통한/ 애사였다./
2수 연시조이나 각 수의 3장 6구를 한 줄로 엮어 놓은 산문형 구조로 깨진 음보가 많고 시조 리듬도 흐트러져 산문에 가깝다. [비통한 애사였다.]는 역사 소설에 나오는 끝 구절 같아 더욱 산문답게 하고 있다.
타래난초꽃
장지성
뻐꾸기 먼 울음에 실눈 뜬 초 여름날
양지녘 선산아래 살며시 그림자로
바람이 흔들리는가, 그대 설핏 옆모습
초파일 연등 늘듯 초롱을 앞세우고
나선형 층계 밟아 하늘을 아우르면
낮달도 민낯으로 와 볼우물이 서럽던
가는 봄 가는 세월 어쩌랴 어쩔 건가
만남도 헤어짐도 그 경계를 넘나들며
그리움 물레를 잦는 고요 저편 언저리
시름도 고 풀리면 속살시린 피돌기로
뻐꾸기 이산 저산 쉰 울음도 살가운
외돌아 타래를 감는 화관이여, 무구(無垢)여.
4수의 긴 연시조로, 처음 3수는 완벽한 자수정형의 정격시조이며 넷째 수는 2음보가 자수정형에서 벗어났지만 음보정형에는 손색이 없는 시조이다. “시조는 이렇게 쓰는 것이다.”라고 역설하는 듯한 작품이다.
초여름의 뻐꾸기 울음과 낮달이 어우러진 선산을 찾아 깨끗한 타래난초꽃을 보며 흐르는 세월과 그리움을 노래한 포근한 서정시이다. 여름이 뻐꾸기 울음에 실눈을 뜨고 낮달이 민낯으로 오는 선산아래 풍경을 잘 그려낸 수작이다.
(2) [현대시조]<2012 여름호>
이번호에는 [현대시조단]의 신작 70여 편과 특집으로 단수시조 20편의 작품이 실렸다. 대다수의 작품이 자유시 흉내내기에서 벗어나 음보정형을 굳혀가고 완벽한 자수정형의 정격시조도 수를 늘여가고 있다. 아름다운 연못에 흙탕물을 뿌리는 사이비시조도 간혹 섞여 있다.
산딸기
최도열
일몰로 익어가는 새빨간 산딸기야달콤도 새콤도하게 입 맞추어 주건만
온 몸에 가시가 돋아 안아 줄 수 없단다.
남다른 열정으로 사랑이 있기에나는 너가 좋아서 이렇게 찾아왔다
바구니 옆에 끼고서 선물을 받으려고
만나자 헤어지는 이별이나 없은들지상에 안개처럼 떠나가고 말거나또 다시 언제나 올지 기약도 없는 세월
풀잎에 맺힌 이슬 그 누구 사연일까하늘이 무심잖게 저렇듯이 내리니
밤새도 내 마음같이 슬피 울고 있고나.
산문형으로 3수는 붙여 놓고 1수는 따로 떼어 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산딸기야달콤도] [있기에나는] [없은들지상에] [말거나또] [사연일까하늘이] 등 구의 끝 음보와 다음구의 첫 음보를 폭력적으로 붙여 놓은 이유는 더욱 모르겠다. 이것이 문학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것인지, 멋을 부리는 것인지, 그냥 장난쳐 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시조 밭에서 뽑아내야 할 잡초이다.
은아와의 언약
김준경
깡마른 체구에
순진했던 그녀와
언약이 있었던 듯한
떨떠름한 사랑 기억,
성서를 읽고 생각하니
야릇한 그녀, 떠오르네. 5454
자수정형 또는 음보정형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은 고사하고 종장 첫 3.5도 못 지켜 아예 시조의 자격을 잃었다.
[성서를/ 읽고 생각하니] 이렇게 읽을 수 있을까? 무조건 글자 수만 맞으면 되는 것인가? 일단 의미를 살리고 호흡이 맞도록 끊어 읽는데 지장이 없어야 할 것이다.
도전挑戰
김두만
낙수물 또닥또닥
바위를 때리는데
바람은 뺨을 치고
세월은 뼈를 깎고
굼벵이
주름잡듯이
천년바위 뚫는다.
1자도 가감 없는 자수정형의 정격시조이다.
‘도전’이라는 관념을 낙수물 바람 굼벵이 등 실물의 동작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읽을수록 시적 세계의 깊이가 느껴지는 가작이다.
인생
홍윤표
꽃 같은
인생항로
미로에 홀로 섰다
별보고
달빛 보며
젊은 날 돌아보니
등 돌려
꾸짖는 삶에
마중물은
깊었다.
자수정형의 정격시조이다.
3. 중앙시조백일장의 작품들
(1) 12.5월 심사위원: 권갑하·강현덕(대표집필 권갑하)
<장원>
동화童話
- 슈퍼문 (이창규)
저 달, 햇덩이마냥 커져 버린 어느 날// 남몰래 몸을 불린 속사정 알아챘는지//
산번지 달 뜨는 언덕 넉살 좋게 휘었다//
가난한 저녁 무렵 찬물로 허기 지우며// 스무고개 넘어가던 먼 옛날 이야기 속//
토끼도 계수나무도 몸피 꽤 늘린 세월//
봄밤 지루하다 수런거리는 시장 모퉁이// 좌판 위 흘러가는 달빛 새긴 문장으로//
희망을 부풀려 쓰는 동화 한 편 떠있다//
<차상>
뉘 고르는 어머니 (김수환)
이 달을 넘기면 까맣게 닫히고 말리// 베란다 그물망 늦봄의 감자 눈//
맹렬히 새파란 독을// 밀어 올린다// 제 몫이다//
나는 꽃도 아니고 다육이도 아니야// 너 하나 살리려고 온 마음을 버렸네//
사력을 다하고 다해// 쪼그라든 몸// 눈부시다//
무엇을 입어도 이제는 다 헐겁다// 잡으면 바스러질 듯 푸석이는 몸뚱이//
베란다 저쪽에 앉아// 생의 뉘를 고르고 있다//
<차하>
늦깎이의 시 (김현수)
모판 같은 일절지에// 씨나락 같은 스물네 자///
모음 자음 내 기억에// 모내기 하는 글내기///
깎아 쥔// 꼬챙이 끝에// 검은 피의 꽃이 핀다///
* 심사위원 심사평
희망과 현실의 간극 보여준 역작
장원은... ‘희망을 부풀려 쓰는’에서 읽히듯, 부풀린 희망과 좌판 위 현실 사이의 간극이 슬픔으로 휘어지는 역작이다...
차상...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뉘를 골랐다...‘잡으면 바스라질 듯 푸석이는’‘쪼그라든 몸’...그러니 ‘무엇을 입어도 이제는 다 헐’거울 수밖에 없는 어머니다.
차하... 한글로 빚는 시를 벼농사에 빗댄 깔끔한 단시조다. ‘깎아 쥔 꼬챙이 끝에 검은 피의 꽃이 핀다’는 종장이 시의 선명한 이미지를 확보하고 있다.
* 필자의 작품평
3편의 당선작들은 수·장·구가 뚜렷하나 깨진 음보가 많고 자유시의 리듬을 타고 있어 정격시조와는 거리가 멀다.
장원작은 봄 밤 지루한 시장 모퉁이에서 크게 부풀은 달덩이를 바라보며, 어려웠던 스무 살 가난과 배고픔을 회상하며 한편의 동화를 쓰는 기분을 그려낸 작품이다. 제목의 [동화童話]는 불필요한 한자혼용이며 작품의 질을 떨어트리고 있다. 꼭 필요하면 한자는 ()에 넣어 표기해야 한다.
차상작은 시적화자가 베란다 그물망속의 감자 눈을 보면서 ‘어머니가 베란다 저쪽에 앉아 생의 뉘를 고르고 있다’고 상상한다. 맹렬히 파란 독을 밀어 올리며 베란다 그물망에 있는 늦봄의 감자 눈은 사력을 다해 자녀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모습이다. 고도의 메타포를 동원한 작품이다. ‘뉘 고르는 어머니’는 현실의 어머니가 아니고 의인화된 ‘감자 눈’인데 심사위원들은 현실의 어머니로 착각하고 있다.
차하작은 뒤 늦은 나이에 종이와 한글과 연필을 사용하여 시를 쓰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나 어색하다. 시 쓰는 것이 내 기억에 글 내기 하는 것인가? 오히려 기억 속에서 시상을 끄집어내어 (모내기하듯이) 글 내기하는 것이 시 아닐까? 또 제목 [늦깎이의 시]는 본문 중에 늦깎이를 짐작하게 하는 시어가 없어 무색하고, [모판같은 1절지]도 어색하다. 전지(全紙)를 반으로 자르면 2절지가 되므로 1절지라는 말은 없다. 시를 쓰는 원고지는 보통 16절지이거나 A4용지일 것이다.
(2) 12.6월 심사위원: 권갑하·강현덕(대표집필:강현덕)
<장원>
퉁퉁마디* (송태준)
파도의 힘줄을 베고 선잠을 자는 바다// 먹구름을 타고 온 소낙비에 놀라 깬다//
바람은 늘 부화뇌동, 머리채를 꺼두르고//
태양의 오랜 권역, 개펄이 달아오른다// 조여 오는 갈증을 바닷물로 목 축이다//
소금 독 붉게 타들어 온 몸은 퉁퉁 붓고//
누구라 발 못 붙일 목숨의 경계지에// 한 점 땅 비집어서 일구는 삶의 터전//
쓰린 속, 뜨거운 숨은 소금쩍에 묻어둔다//
오가는 시선이야 해당화나 챙겨 가는// 짠 세월 우걱우걱 말없이 삼키면서//
십리 펄 망망한 길에 신끈 다시 조인다//
*개펄이나 바닷가에서 자라는 염생식물. 칠면초 또는 함초로도 불린다
<차상>
달맞이꽃 (권경주)
숨죽여 마른 목을 묵념으로 다스리며//
박동을 짚어 짚어 기운 달 등 밀었지//
산월(産月)을 거를지 몰라 터뜨리는 저 양수//
<차하>
어머니의 손 (손예화)
송화 가루 아득히 여운의 은유너머// 어머니 가루분 향 끊어질 듯 이어진다//
손사래 마주하면서도 내밀한 그 목소리//
날개 잃은 나비처럼 혼신을 다 하여// 금방 쓰러질 듯해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살아서 영 못 볼 것 같아 꿈속을 헤맸어야//
쓰다듬고 매만지는 정다운 손의 대화// 시나브로 휘어진 등뼈를 들먹인다//
자식들 흔들어 깨우는 워낭소리, 깊고 슬픈//
* 심사위원 심사평
민초들 생명력 함초에 비유 엄하면서 함축 살아있어
장원은...‘소금 독’으로 ‘온몸’ ‘퉁퉁’ 부어도 ‘신끈’ ‘다시 조’이며 살아가는 염생식물의 강한 생명력에... 힘든 현실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민초들의 모습이 여기 겹쳐져 장엄하다.
차상은...깔끔한 이미지가 돋보였다. 밤하늘 달을 띄워낸 건 달맞이꽃이었다. ‘산월’을 거를까 마음 졸이며 제발 떠달라고 ‘기운 달 등 밀’고 ‘묵념’까지 올린 것은. 이 세상에 그냥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누군가의 간절함이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차하 ‘어머니의 손’... 울림 강한 사모곡이다. 이제 ‘쓰다듬고 매만지는’ ‘손의 대화’만이 가능한 어머니와의 대화, ‘깊고 슬’프다.
* 필자의 작품평
장원작은 4수의 긴 연시조로서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지만 음보정형을 잘 갖추었다.
첫째 수는 바다, 둘째 수는 갯벌, 셋째 수는 통통마디(함초)의 삶, 넷째 수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 펼쳐져 있는 함초밭 풍경을 묘사하면서 서민의 삶을 연상케 하는 짜임새 있는 작품이다.
차상작은 정격에 가까우나 1음보 자수정형을 벗어났다.
달맞이꽃이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는 장면이 아니라 기운 달을 다시 떠 도록 힘을 쏟는 내용이다. 꽃 이름과 제목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며 이 시는 꼬리가 잘린 듯 완결미가 없다.
차하작은 깨진 음보가 많은 것은 고사하고 전체적으로 시조리듬이 거의 없고 자유시 또는 산문을 읽는 기분이다. 단락과 행갈이를 다시 하면 자유시로 알맞겠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 앞에 모여 앉은 자식들을 그린 내용으로 역시 마지막 글줄의 꼬리가 잘려 완결미가 없다.
이 시는 시적화자가 자기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글(사모곡)이 아니라, 살아 있는 남의 어머니의 마지막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이 글을 ‘울림 강한 사모곡’이라고 한 심사위원들은 사모곡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양이다. ‘어머니’에 관한 글은 다 사모곡인가?
(3) 12.7월 심사위원: 권갑하·이종문(대표집필 이종문)
<장원>
서울개미 (김주연)
‘개미’라는 두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새벽부터 일개미가 세상 속을 가고 있다.//
더듬고 지나간 자리 길이 하나 열린다.//
가끔씩 앞다리로 더듬이를 가다듬고//
분주한 종종걸음 하루해가 다한 시간//
개미를 닮은 한 사람 허드렛일 쉴 새 없다.//
조선족 가사 도우미 혀끝 돌린 서울말투//
하지를 앞에 두고 비정규직 등이 휘는//
남겨진 반나절 거리 하얀 파꽃 불을 켠다.//
<차상>
새벽, 인력시장 (박해자)
사냥감 눈앞에 둔 맹수들 와글거린다.// 줄 담배 피워 물고 쓰디쓴 맛 핥으면서//
살려고 굴려보는 눈 그믐 밤 별빛 같은//
한 줌 온기마저 파르르 떠는 시간// 단내 나는 막노동도 사치스런 투정일 뿐//
요철을 넘고 건너는 너와 나의 긴 여정//
둥지엔 지어미와 고물대는 새끼 있어// 신 새벽 칼바람을 발아래 눕혀가며//
어쩌랴, 눈보라쳐도 비바람 불어와도//
뚝 뚝 떨어지는 생의 비늘 긁어모아// 차돌처럼 뭉쳐놓고 훤한 네 꿈 그려보자//
장작불 타는 마당에 가로등이 웃고 있다//
<차하>
초경(初經) (김혜경)
분양받은 제라늄 옮겨 심고 바라보다//
겁먹은 딸아이를 괜찮다 다독인다//
봉긋이 부푼 꽃망울 우주를 열고 있다//
* 심사위원 심사평
개미처럼 고뇌에 찬 삶 포착
장원... 우선 개미라는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게다가 개미처럼 휘이청, 등이 휘어진 서울 사람들의 고뇌에 찬 삶을 조곤조곤한 어투로 포착해, 잔잔한 감동을 몰고 오고 있다.
차상...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의 끊을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그러나 진술적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장원작에 다소 밀렸다.
차하...초경을 맞은 딸아이를, 한 우주를 열며 새로 피어나는 꽃에다 슬며시 겹쳐놓은 솜씨가 눈길을 끈다.
* 필자의 작품평
장원작은 단락 짓는 원칙을 모르고 수의 구별을 없애버려 1연 9행의 자유시가 되었다. 서울개미라는 제목을 붙였으나 일반적인 서울사람이 아닌 특정인 즉 조선족 가사도우미의 바쁘고 고된 처지를 진술하고 있다. 제목이 적절하지 못하다.
차상작은 수의 구별이 뚜렷하고 시조리듬을 타고 있어 장원작보다 한 수 위이다. 제목과 본문이 맞게 인력시장 서민의 생활상을 잘 그려내었고 희망적인 마무리 끝수로 시의 완결미를 획득했다. 장원작과 순위가 뒤바뀐 것 같다.
차하작은 자수정형에 못 미치나 [봉긋이 부푼 꽃망울 우주를 열고 있다]는 종장 하나로 딸아이의 초경을 시의 세계로 승화시킨 가작이다. 역시 장원작보다 낫다.
(4) 12.8월 심사위원: 권갑하·이종문(대표집필 권갑하)
<장원>
잘 될 거야 (김남미)
활짝 열어야 해요. 꽉 잠긴 저 큰문을// 해독의 163:1 열릴까 말까 초조해요//
미로 속 비밀번호에 밑줄 좍좍 그었어요//
답안지 둥실 떠있는 노량진 학원가엔// C 초승달 D 하현달 팽팽히 경쟁해요//
신새벽 환경미화원, 오답 몽땅 쓸어가요//
공시족 머리 안에 나뒹구는 종잇조각// 다 닳은 몽당연필 도돌이표 그리고요//
늙으신 어머님 허리 구부정히 휘었어요//
책갈피에 접힌 꽃들 부스스 일어서고// 바람의 뺨을 맞은 열매가 붉어졌어요//
내일은 출근을 해요, 저 높은 빌딩으로//
<차상>
달맞이꽃차 (양옥선)
시냇물 달빛 가락 귀 활짝 연 노란꽃// 마주서면 이슬은 발끝에 구르고//
흥겨운 밤의 너름새 풀벌레를 깨운다//
손 안의 액정화면 꽃잎을 발송하면// 곧 가요 광속으로 도착하는 별빛 문자//
찻잔에 끓인 물 붓고 꽃숭어리 띄운다//
몇 날을 개여울에 씻은 귀 저리 맑나// 기다림은 문밖의 층계를 헤아리고//
똑똑똑, 겯는 찻물에 달무리가 번진다//
<차하>
물잠자리 (김종호)
놔주면 다시 와서 나풀나풀 꼬리치고//
살며시 다가가면 삐뚤빼뚤 달아나네.//
철없이 따라나서다 물속으로 철퍼덕//
* 심사위원 심사평
심각한 취업난 잘 형상화 시적 긴장·완결미 살려야
‘잘 될 거야’는...서술적 전개가 약점이지만 심각한 취업난을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163:1이라는 경쟁률이 치열함을 더하고 C 초승달 D 하현달이 경쟁하는 형상적 이미지는 이채롭게 다가온다. 늙으신 부모님의 허리가 휘는 어두운 현실이지만 시인은 “잘 될 거”라는 희망적 메시지를 안겨준다.
‘달맞이꽃차’는 차 한 잔을 나누기 위해 휴대전화로 친구를 부르는 아름다운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지는 차향이 서린 작품이다.
‘물잠자리’는 짧은 동시조로, 잠자리를 쫓다 물에 철퍼덕 빠지는 유년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 필자의 작품평
장원작은 4수 연시조이나 이유 없이 셋째 수와 넷째 수를 붙여 자유시의 흉내를 내었다. 시조로서는 감점이다. 163:1은 6자로 읽히므로 4자의 자리에 들어 설 수 없다.
노량진 학원가의 풍경을 뒤로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하는 희망을 그린 작품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약하려는 젊은이의 심상을 표출하고 있다.
차상작 또한 이질적 내용인 둘째 수와 셋째 수를 이유 없이 붙여 놓아 의미전달을 오히려 어렵게 하고 있다.
차하작은 음보정형에 맞는 깔끔한 단수이다. 삐뚤 빼뚤 달아나는 물잠자리의 모습이 재미있다. 시는 어렵고 심각하게 썼다고 명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끝)
* 현대시조 2012년 가을호에 게재
첫댓글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귀한 평론을 올려주시니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날카로운 말씀,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평론 시조 창작에 표준이 되는 귀한 이론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