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동이란 ?
1. 이재민 철거민 수재민 이렇게 삼민이 모여서 이룬 동네라 삼양동이라 부른다는 폄하된 설도 있다고 ..
실제로 중구 양동 철거당시 사람들이 대거 이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2. 아래 얘기했듯이 삼각산 아래 양지바른곳이란 뜻도 있고..
3. 삼양동이란 석삼(三)볕양(陽)을 쓰는데
그 태양이란 햇볕(따사로움) 햇살(살균작용) 햇빛(밝음)을 주니 이곳은 그중 따사로움을 주는 볕양(陽)자를 쓰니..
一陽이란: 한겨울에 내리 쬐는 햇볕을 일컬음이고
二陽이란: 그보다 좀더 따듯해서 한겨울 양지에서 느낄수 있는 햇볕을 말함이고..
三陽이란: 이른봄에 양지 쪽에 않아 있으면 졸음이 스르르 오고 산골에 얼음이 녹고 버들 강아지가 피는 따사로운 봄볕은 일컬음이니.
실제로 이곳 지형을 살펴보면
우측으론 서경대학능선을 한 축으로 하고
좌측으론 건너편 미양 학교옆 우진 주택 언덕이 한 축을 이루니,
동쪽에서 보면 시골에서 쓰는 삼태기 형상이라 높세바람과 하늬바람을 막아주니 그 어느곳보다 따사롭다.
또 북한산에서 흘러내려오는 地氣(지기)가 칼바위을 지나 이곳에 당도하니 북한산 지기를 받고 따사로운 기운을 받으니.
(사람의 마음도 같이 따듯해짐)
사업에 실패한 사람 ,외로운사람, 괴로운사람, 좌절한 사람, 세상을 등진 사람,먹고살기 힘들어 찌든사람들이 모여들어
이곳에서 먹고살만해져서 다른곳으로 떠나곤했다.
그래서 삼양동은 그 어느곳보다 인간미가 넘치고 울타리가 필요없는 이웃간에 정이 넘치는 곳이였다.
재개발 바람이 불기전까지는 그랬다.
비록 이곳이 미아동 이라는 행정구역이지만 삼양동이라는 동네로 불러지는 한은
우리 아파트 입주민이 정말 정이 넘치고 따사로운 아파트가 되도록 서로 인사 하며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하는생각이 든다.
또 등산하다 보면 군부대가 있는데
그 군부대가 생기면서 지기를 끊어 그뒤부터는 사람들이 타락하고 이혼하거나 가출하는이,
또 남은 돈을 떼어 먹는이가 부쩍늘기도 했다.
벽산 아파트 건설 현장 가운데쯤에는 거북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거북바위 꽁지부분(똥)에 사는사람들이 부자가 많았다.
아파트공사 시작당시 그바위을 놔 뒀으면 하는생각이 생각이 들었지만 개발이라는 거대 공룡앞에 허물어져 갔다
미아동이란 이름은 조선말 고종(高宗)초의 공식기록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유래는 확실치 않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되너미고개(돈암현 敦岩峴)를 일명 미아리고개라고 부르는 까닭에 고개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과
미아제7동에 있는 불당곡(佛堂谷)에 미아사(彌阿寺)가 오랫동안 있었으므로 이 절 이름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여기서 되너미고개에 대해 알아보면 18세기 중엽에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는 호유현(胡踰峴)이라 씌어 있고,
같은 시기에 정선(鄭敾)이 그린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는 적유현(狄踰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우리말 되너미를 한자음으로 고친 것이라 생각된다.
미아동의 현 위치는 북쪽은 수유동, 동쪽은 번동, 그리고 산 능선을 경계로 성북구의 정릉동과 인접되어 있다.
또한 남쪽은 성북구의 길음동·하월곡동과 도봉로를 경계로 하고 있다.
한편 이 동의 행정동 즉 동장 관할구역은 서울특별시 편입이후 여러 차례 변동이 있었다.
그 까닭은 6.25동란 이후 서울의 인구 집중으로 이곳의 야산과 공동묘지가 주택지로 되면서 인구급증을 가져와 행정동의 변천이 심했던 것이다.
미아동은 1949년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된 이후 그 관할구역은 1955년 4월까지만 해도 현재 미아동 일대와 현재의 성북구 길음동의 대부분 지역이었다.
그런가 하면 삼양동은 현재 미아제1,2,6,7동 일대로서 『삼각산의 양지바른 남쪽 동네』라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즉 1949년 미아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당시 이곳의 구장(區長)들이 모여 이와 같은 의미로 행정동명을 제정했다.
삼양동(三陽洞)이란 이름은 법정동명도 아닌 한때 행정동명이었지만 아직도 시내버스 노선표지에 일부 사용되고 있으며,
이 곳 주민들도 미아1,2,6,7동 각 명칭보다는『삼양동』을 더 즐겨 쓴다.
그런데 삼양동지역은 1960년대를 전후해서 서울의 도시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당한 후암동(厚岩洞), 신설동(新設洞) 주민들이나
남참동(南倉洞), 양동(陽洞)에서 화재로 집을 잃은 화재민, 장마때 한강의 범람으로 집을 잃은 이촌동(二村洞) 수재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다.
첫댓글 거북바위를 없앤 건 정말 유감이에요. 생각의 힘이란 무서운 법인데 많은 사람들이 영험하다고 여기는 존재를 그렇게 없애버리다니, 과학 아니라 과학 할아버지 시대라 해도 인문학적인 가치들은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건데, 미신으로 치부하고 없애버린 거잖아요. 어릴 때부터 거북바위를 보며 자랐는데 그 자리에 전설 안내판만이 서 있는 걸 보고 진~~~짜 슬프더라구요. 거북바위가 남아 있었으면 우리 아파트의 상징물이 되어 아파트 이미지에도 좋았을 거예요. 깨트려버렸을까요? 아님 파다가 어딘가에 보관했을까요? 아님 돌덩어리도 돈이라고 팔아버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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