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건 변호사의 가족 이야기
삶의 원칙을 지키는 아버지
1977년 미국, 누명으로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던 이철수 씨를 위해 구명운동에 자원하여 앞장섰던 유재건 변호사. 그의 끈질긴 변호활동과 성공은 이민 교포사회뿐만 아니라 미국사회에까지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가족에게도 기념비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제 그는 아내 김성수 여사와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족적을 자녀에게 남겨서 부모를 자랑스럽게 추억하도록 해주고 싶다고 했다.
취재 글 김문영(편집부) 사진 김기현(편집부)
프롤로그
1982년 9월, 샌프란시스코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청년 이철수 씨에게 배심원 전원 합의로 무죄가 선고되었다. 기나긴 사투 끝에 얻은 승전보였기에 유재건 변호사(75세)는 참석한 120여 명의 교포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이때부터 그에게 ‘인권변호사’라는 별칭이 따라붙었다. 이철수 사건은 지금까지 미국 법정에서 소수민족을 위한 인권보호와 관련하여 첫 번째로 꼽는 판례가 되었다. 대범한 성격의 아내 김성수(67세) 여사는 43년 동안 함께 살면서 남편이 펼치고자 하는 뜻을 가족 때문에 접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유 변호사가 세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을 하고MBC「시사토론」진행자 등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가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유 변호사는 올해 발간한「은혜인생」서문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점철된 인생’이라 표현했다. 그의 인생에 어떤 은혜가 쏟아 부어졌던 것일까?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인생의 가장 큰 지표가 되었던 사건은 무엇이며, 그 일을 통해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어려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연세대학교 국제정치학과 무시험 특차로 입학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빠듯한 월급으로 가족 부양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꿈은 점점 멀어져 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 꿈을 잊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분은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꿈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기적적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유학생활을 하던 당시에 어머니의 비자 연장 문제로 이민국재판소를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비자 연장을 해줄 수 없다는 판사에게 ‘한미 간 전통과 풍습의 차이점’을 비교해가면서 끈질기게 설득을 했더니, 흥미롭게 듣던 판사가 “변호사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며 비자를 연장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소수민족 중에도 한국인을 모집하고 있던 미국의 로스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9전10기로 어렵게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것이 마흔 살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족들 고생시킨 것을 만회하려면 죽을 힘을 다해 돈을 벌어야 했는데, 우연히 이철수 씨에 대한 기사를 접하게 되었지요. 스물다섯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혹독한 사연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태어나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이모 집에서 살다가 열두 살에 국제 결혼한 엄마를 따라 미국에까지 왔지만 방치되었고 소년원, 정신병원 등 여기저기 떠돌다가 결국 형무소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1973년 차이나타운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고, 1977년에는 옥중 살인 사건에 또 다시 연루되어 결국 사형까지 언도받았던 것입니다. 기사를 보면서 마음이 미어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자신을 변호할 마땅한 권리조차 박탈당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청년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내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는 굶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지지해주었지요. 이철수 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돌처럼 딱딱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태도로 나를 거부했습니다. 도움의 손길을 받아본 적 없는 이의 절망적인 태도였습니다. 도움을 주겠다고 얼마나 설득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서 ‘또 다른 나’를 느끼게 되면서, 세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한국인 역사에 이런 차별사건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증거를 잡게 되었고, 소수민족이라고 무시하여 허술하게 수사한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50여 교회를 아내와 함께 발에 불이 나도록 다니며 구명운동을 하였고 교포들과 함께 6년을 버텼습니다. 이 일로 한국 교포사회는 120년 역사상 진보와 보수, 세대와 세대를 넘어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와 아내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이철수 씨에게 쏟아 부은 셈이지요. 그가 무죄로 석방되고 나서, 이 사건은 미국사회 내 소수민족의 인권 변호에 대한 새로운 전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난하고 무고한 자의 편에서 변호하시고 공의를 이루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를 계기로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유익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요. 이철수 구명운동은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로서 소중하게 지켜온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이며, 자녀에게 어떤 아버지인지 이야기해주십시오.
아내가 종종 우스갯소리로 ‘당신의 신파조 인생담에 혹해서 결혼했다’고 합니다. 유네스코에서 일할 때 대학교에 강연자로 초청을 받아 많이 다녔는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처음 아내를 보았습니다. 자신이 없어서 사귀자는 말은 못했지만 친구들에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습니다. 열네 살 때부터 가장 노릇하느라 새벽에 신문 돌리고 야밤에 찹쌀떡 팔던 이야기, 학교 소풍을 가본 적은 없었지만 교회 친구들과 버스정류장 앞에서 열정적으로 전도하던 이야기들이 신앙의 뿌리가 깊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아내에게는 구구절절 감동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가서도 솔직하게 제 형편을 털어 놓았습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하는데…….” 하시면서도 결혼을 반대하진 않으셨습니다. 아내는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저는 원칙과 안정을 중요시하는데 비해 아내는 도전과 모험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 선뜻 결단을 못 내리면 명쾌하게 해결점을 제시해 도움을 줍니다. 집에 있을 때 저는 조용히 앉아서 아이들 사진첩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반면 아내는 자동차 타이어 교체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되니까 남자 여자 따질 것 없고, 서로 부딪힐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상대에게 맞추고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해주는 편이 쉬웠습니다. 갈등을 일으킬만한 요소를 굳이 주장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남자로 태어나서 대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만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했겠습니까. 얼마 전 한국에 왔던 프랜시스 챈 목사님(미국 코너스톤교회 Conerstone Community Church)이 “아버지가 자녀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어야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게 된다.”고 하더군요. 아이들 어렸을 때에 사랑을 흠뻑 부어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다행인 것은 우리 애들이 이런 부족한 아버지를 이해해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큰딸(유승영)은 하버드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고 10년간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했습니다. 딸이 공부할 당시 버클리대학교에 다니던 친구가「아시안 스터디」라는 과목에서 “인권운동 사례로 ‘이철수 사건’을 다뤘는데 네 아버지가 그렇게 훌륭한 분인지 몰랐다.”고 해서 그때 함께 지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이 존경심으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아들(유수화)과 막내(유대현)도 얼마나 제 자식들을 끔찍하게 돌보는지 모릅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버지와 저희들이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른 것뿐인데요. 저희는 아이들과 노는 것을 잘하니까 미안해하지 마세요.” 해서 고마웠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일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애들을 잘 키워주셨다는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아내는 “당신이 세상에서 훌륭하게 사는데 성공하면 그것은 당신만의 성공이 아니라, 나와 아이들 모두의 성공이다.”라는 말로 아버지로서 부끄러웠던 심정을 자긍심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와 앞으로 소망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아버지가 서른일곱에 납북된 이후로 한 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 소식이 궁금해서 ‘이산가족찾기’에도 나갔습니다. 성북구에서 15, 16, 17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당시에 1년에 한두 번씩 IPU(국제국회의원연맹)에 참석해서 대표로 연설을 맡아하곤 했죠. 그곳에서 북한 대표로 온 최모 의원을 만났습니다. “1950년 7월에 아버지가 북한으로 끌려갔는데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으니 알아봐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근거 자료가 있어야지, 아무 것도 없으니 연고를 찾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와 마지막 헤어졌던 당시 제가 경기중학교에 합격한 것을 아시고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때는 각 국민학교에서 전교 1,2등은 해야 경기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뿌듯해할 만 했죠. 합격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종로에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인 ‘화신상회’에서 구두 한 켤레를 사주시면서, 더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골라보라고 하셨죠. 순간 얕은 꾀를 써서 중학교 올라가면 필요한 것이 많을 테니 다음을 기약하자 마음먹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입학하고 20일이 지나자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것입니다. 아버지 고향인 천안으로 부랴부랴 피난을 간 뒤로는 아버지가 납북되었다는 소식 말고 들은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한 마디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 이제까지 왔으니 허망한 일입니다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을 마지막 추억 하나로 달래곤 합니다. 그래도 시집온 첫날부터 남편 얼굴을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며 철저히 여자로서의 인생을 빼앗긴 어머니의 아픔만 하겠습니까. 오로지 아들 하나만을 세상의 전부라 여기며 평생 강인하고 곧게 사셨지요. 하지만, 6.25 한국전쟁 이후 어머니의 1순위는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원래 무속신앙이 깊으셔서 밤마다 물을 떠놓고 치성을 드렸던 분인데, 어려운 형편에 교회에 가면 얻는 것이 많다는 말만 듣고 발을 들여놓았다가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셨던 겁니다. 임종하시기 전 3개월 동안 이생의 끈을 놓지 못하시고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셨는데, 천국 소망을 확신하신 후에야 평온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마지막 어머니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우셨는지 모릅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저희 부부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녀들에게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면 잔치를 베풀어달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기는 날이니 찬송을 불러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의 마지막 소망입니다.
프롤로그
“원 없이 살았는데, 딱 한 가지 성가대 지휘를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단 말이야.”라고 유재건 변호사가 덧붙이자, “감을 먹고 싶으면 감나무 아래 가서 누워있기라도 해야지요. 먹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못 먹어요.”라고 김성수 여사가 말했다. 그러자 무릎을 탁 치더니 “그렇군!” 하며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해하기로 작정한 부부의 단순하고 명쾌한 대화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훌륭하게 살았습니다!”라고 서로에게 인사하는 부부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존경받기를 원한다. 자녀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존경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운 삶과 죽음을 기대한다는 부부의 소망은 이미 절반 이상을 이루었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완성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