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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폭 포
권 기 호
우리나라를 옆으로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보면
대전 밑 옥천은 단전 부근이 되고
그 아래 옥계 폭포가 있다
이 부근에서 여인은 대퇴부를 비스듬히 세워
가끔 바로 누운 자세가 되는데 은하가 기슭까지 내려오는 때가 되면
폭포 소리는 몇 개의 능선을 지나도 메아리쳐
처음 우주 전자파의 아득한 울림이었다
이런 밤 선대 여인들은 놋요강 위에서의 그 울림이
폭포의 음자리됨을 가슴으로 듣고
그제야 남정네를 유달리 안채로 맞이하였다
율곡의 어머니도 그랬고, 퇴계의 어머니도 그랬다
사나이기 때문에 사나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포에
팻말을 내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합성수지로 된 일회용 깃발이거나
알 수 없는 상형문자의 영역표시일 뿐이다
문화의 소음시대,
오직 침묵하던 마르셀 뒤샹이
임종에야 조각 한 점 전시하였다
어둠의 공간
달빛 등잔을 든 알몸의 여인이
홀로 해초처럼 숨 쉬며 누워 있었다
가슴으로 듣고 귀로 보아야 알 수 있는 옥계 폭포의 울림을
나는 거기서도 들을 수 있었다
맹수를 위하여
축제의 날이 와도
설산의 암벽 오르며
늘 혼자일 것
어쩌다 포획자의 유탄 맞으면
아린 무명(無明) 혀로 핥으며
야성의 포효 노을에 담금질할 것
벗을 길 없는 표피는 형극이어서
눈 속 전율의 마그마로 이글대지만
몇 번이고 이 몸 환생 받아
근접할 수 없는 위엄 더 갖출 것
그래서 그 열기 언젠가
밤하늘 건너는 은하로 갈무리되기까지
되풀이되는 혼절의 시간 마다하지 말 것
아 그러나 그 시간마저
끝내 유황불 화살로 되돌아와
목숨 영원히 거둬 갈지라도
아무도 마지막 신음 챙기지 못하게 할 것
시인은 언 가슴
봄 아지랑이 데워 내는 사람이지만
빈 하늘 자맥질해
숨은 곡조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별자리 찾아 맨발로 세상을 돌아본 사람
태양 속 옹달샘 찾다 덧없이 눈이 먼 사람
그런 시인에게 임종 가까이 둬야 하리라
신음 삭여 그들 지친 발 감싸야 하리라
고인돌
우수와 허무도 짐짓 투박하게 빚으면
아마 저 같을 것이다
허물 벗어 홀가분한 영혼까지
제 규격 속에
완강하게 눌렀을 것이다
떨어지는 꽃잎
침묵 안에 가두는 것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선 세월이 나이테가 아닌 중량이어서
민들레처럼 가벼운 할머니 몸도
다가오는 저 무게에 어쩌지 못해
지팡이로 고누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빈 속내 덩그런 이 누각도
한때 사람들
탄력받은 날개의 눈부신 하늘 품었으리라
폭포 거스르는 연어의 빗살 치는 무늬 지녔으리라
한낮 뙤약볕 헤맨 내 자취도
마침내 이런 풍경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억울하다
꽃들 문 열어 다시 펼치고 있는데
내 무게가 스스로 풍경 가둔 채
캄캄하게 저무는 것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분하고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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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선적(禪的)인 詩 세계, 존재론적 비평으로 한국문학에 기여
권기호는 1937년 동경에서 출생하여 1962년《자유문학》신인문학상에 당선하여 시인으로, 그리고 1964년《현대문학》추천으로 문학평론가로 등단하였다. 시집「서쪽의 풍경」(1970)을 출간하였으며, 시론집「선과 문학」(1980),「선과 현대미술」(1982),「선시의 세계」(1991),「현대시론」(1998) 등을 간행한 그는 시인은 물론 시론가로 활동한 중진문인이다.
그의 詩는 간명한 진술 속에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생명적인 거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어법을 택해 독자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는 초현실주의 詩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선불교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자적인 시론이 여기서 발원된다고 하겠다. 선시에 대한 현대적인 이론이 체계적으로 수립되기 이전에 그가 보여준 비평적 탐색은 동서 詩의 비교라는 점에서도 기념비적이다. 그의 시론은 수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존재론에 근거하여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를 비교, 분석하였다는 점에서 개성적인특성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동서 시론의 단순 비교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하이데거 시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선과 하이데거 시론의 차이점을 규명하고자 했다는 것은 그의 중요한 비평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론은 이론적 탐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소월의 <산유화>나 이상의 <거울> 시편의 분석을 통해 더욱 구체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아직도 존재론적 시론의 근거에 대한 이론적 구축이 허약한 국내의 학문적 수준을 고려할 때 그의 비평적 기여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가 비평적 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던 시절 불모지나 다름없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번에 그가 불교문학을 대표하는 유심문학상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적절한 결정이라고 하겠다.
이번 유심문학상 특별상 수상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창작 활동과 더불어 존재론적 비평을 심화시켜 한국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최 동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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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詩의 품으로 돌아온 헐벗은 영혼
한때 나는 경북 금릉군 청암사와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 머물며 화두를 들었다.
깨친 큰스님들이 지닌 생사 없는 절대자유의 경지를 알고 싶었다.
의심을 타파하기 위해 맞닥뜨린 의식의 기절할 것 같은 캄캄한 절벽의 과정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詩 따위는(이런 말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아예 발붙일 수 없는 그런 숨막히는 세계였다.
감수성이나 지식인의 알음알이 같은 것은 한갓 거추장스런 군더더기였다.
詩의 존재 가치를 굳이 말하자면 끓는 용광로에 눈송이가 접근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덧없음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나는 詩를 버렸다.
그것은 대장부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근기가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함을 어찌 알았으랴.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헐벗겨진 영혼을 이끌고 나는 다시 詩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런대도 이런 내 詩를 눈여겨보아 주신《유심》의 설악무산 스님 그리고 심사위원들께 고개 숙여 합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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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론>
詩의 품으로 돌아온 헐벗은 영혼
— 권기호의 문학과 삶
손 진 은
권기호는 시력(詩歷) 반세기에 가까운 시인이다. 그는 詩에 대한 염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공식적으로 낸 시집은「서쪽의 풍경」(1970)이 전부이다. 그렇다고 그가 詩 쓰기 작업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1960년대 이후 강단에서 줄기차게 詩와 시론을 강의하는 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면서도 꾸준히 詩를 창작하여 그는 몇 권 분량의 詩를 써서 보관하고 있다. 몇몇 출판사에서 시집 출판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 그는 그만그만한 시집들이 양산되는 우리 시단의 현실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오히려 시집의 詩들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이지 못한다면 구태여 시집을 낼 이유가 뭐 있겠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만큼 그는 세상의 평판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눈에 드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가 얼마나 큰 스케일로 詩를 창작하고 있으며 한국시의 변경을 넓히고 있는지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이번의 수상도 그런 면에서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된다. 만발한 아카시아 꽃이 어찌 지나가는 사람의 오관과 가슴에 향기를 풍기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아무런 막힘이 없이 흘러나오는 권기호 시인의 마음의 세계를 음미하게 될 것이다.
권기호의 詩는 전통적인 시적 관습에의 의존을 과감하게 떨쳐버리는 지점을 거느린다. 그의 詩는 우리의 굳어있는 감수성의 틀을 깨트려버리고, 기존의 낯익은 가치관까지도 없애는 데서 출발한다. 이 예기치 못한 무의미성, 기존 개념의 부정 등이 그의 詩가 여타 詩와 변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詩 <아라베스크>를 보자.
백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말할 수 있다
자 다시 시작해 보자
빨강에서 노랑으로 모든 회색은 퇴색된다
초록에서 검정으로 모든 노랑은 퇴색된다
별빛에서 원자로 모든 뼈들은 추락한다
죽음에서 거머쥘 모든 입자(粒子)는 추락한다
청색에서 공포로 모든 고양이는 환원된다
꽃에서 문둥이로 모든 이빨은 침투한다
묘지에서 버섯으로 모든 여인은 침투한다
無에서 無로 모든 無는 침투한다
그렇다
無에서 無로 모든 無는 침투한다
자 다시 계속해 보자
그것은 강물 안에서 역행하는 구름
갓 빗겨 올린 올챙이의 얼굴
놀랜 가슴에서 울려오는 피리
빠져나온 뱀이 찾는 구멍
별들의 잠
관념(觀念)의 숲속에서 건져낸 이빨
이러한 것들과 더 많은 사건 속에
찾아지는 노예
아니 파도를 낀 도시의 얼굴
식은 땅 속의 도시의 얼굴, 악한(惡寒)
— <아라베스크> 전문.
이 詩는 우선 하나의 의미로 환치될 수 없는 이미지 구성의 돌연성에서 오는 경이감이 새롭다. '—에서 —로 모든 —는 —한다(된다)'의 문장으로 구성되는 詩의 상반부에서 나타나는 색상은 이미지의 연결성이 전혀 없다. '퇴색된다' '추락한다' '환원된다' '침투한다' 의 동사군(動詞群)도 마찬가지다. 이 논리적 절연은 의식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이고 돌발적인 행위에서 온다. 명사형으로 끝나는 후반부의 문장에서 우리는 구름, 올챙이의 얼굴, 피리, 구멍, 별들의 잠, 이빨, 노예, 도시의 얼굴의 연결성을 찾을 수 없다. 단어의 돌발적인 병치는 데페이즈망 기법, 살바도르 달리가 말하는 "무의식적 행위를 실현시킴으로써 환기될 수 있는 환상적인 영상과 표상"을 노리는 작품들의 기법과 유사하다. 주술적이고 동적인 리듬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도 묵은 지식의 껍질과 개념을 벗기고 자동화된 인식의 틀을 부수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런 기법과의 근본적인 차이는 데페이즈망이 우연의 소산이라면 이 詩의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어떤 감각적인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끝부분에 나오는 노예, 도시의 얼굴, 악한(惡寒)에서 보이듯이, 도시에서 발견되는 헤어날 길 없는 암울한 존재 인식이다. 이 암울함을 그는 이런 형식으로 시화(詩化)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詩 역시 의미의 절연이 두드러진다.
달빛이 지구 내부 깊숙이 스며든다
유월의 과일로 지구의 가슴은 부푼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것을 애무할 줄 아는
신들은
털이 무성한 손으로
지구의 가슴을 문지른다.
잘 닦여진 식탁 위에서
나프킨은 모두 피리가 되고
그림자 짙은 골짜기에서
신의 정수를 내리며
모든 여인은 더워진다.
몇 개의 침대 위에서
푸른 빛 나는 알을 잉태한 여인은
가장 무성한 나뭇가지에 은하를 걸어둔다.
— <달밤> 전문.
이 詩는 사물이 무한으로 도달하는 사유("유월의 과일로 지구의 가슴은 부푼다.")를 자재로 구사한다. 아울러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것을 애무할 줄 아는/신들"에서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허공 가운데 법신이 머무른 것이 아니다. "그림자 짙은 골짜기에서/신의 정수를 내리며/모든 여인은 더워진다."는 구절은 신과 중생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시인이 일체의 상을 떠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3연 "잘 닦여진 식탁 위에서/나프킨은 모두 피리가 되고"에서 나프킨이 피리가 되는 구절은 새롭고도 특이하다. 기존의 논리로는 도무지 해독할 수 없다. 시인은 비논리로써 어떤 정서를 환기하며 그 환기된 정서로 무엇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 詩는 의미를 벗어난 의미, 새로운 의미의 갱신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무의미는 자연스럽게 '달밤'의 정서를 환기한다. 근작들에서도 권기호 詩의 그런 특징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커피포트 속엔 언제나 잃어버린 의치(義齒)가 있다
엑스포엔 언제나 복제된 백조가 있다
밀랍으로 된 소녀가 하얗게 웃고 있는
빈 교실이 있다
분리되지 못한 검은 탯줄의
일기장이 있다
— <도시 — P. 네루다에게> 부분.
의치나 복제된 백조, 밀랍으로 된 소녀, 분리되지 못한 검은 탯줄의 일기장 같은 언어는 논리적인 질서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 당돌한 느낌을 주는 기상천외한 문장의 병치는 미적인 스피드나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이 詩를 가히 '선시'라 할 수도 있다. 그만큼 대상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시를 생각할 때 선뜻 떠오르는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이미지들은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생명성이 약하거나 희미하다는 공통점이 잇다. 詩에서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은 도시의 불모성이다. 이런 느낌은 4연 "기중기에 매달린 오랜 도시가 있다"와 3연 '세계는 예고없이 열렸다 닫히는 문과 같다'를 볼 때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詩로서는 걸러내기 어려운 속성("詩의 필터로도 걸러내지 못한/터널 속 역사가 있다.")을 가진다.
시인은 세속의 구속, 그 완강한 규격뿐만 아니라 이성의 힘을 싫어한다.
우수와 허무도 짐짓 투박하게 빚으면
아마 저 같을 것이다
허물 벗어 홀가분한 영혼까지
제 규격 속에
완강하게 눌렀을 것이다
떨어지는 꽃잎
침묵 안에 가두는 것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선 세월이 나이테가 아닌 중량이어서
민들레처럼 가벼운 할머니 몸도
다가오는 저 무게에 어쩌지 못해
지팡이로 고누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은 빈 속내 덩그런 이 누각도
한때 사람들
탄력받은 날개의 눈부신 하늘 품었으리라
폭포 거스르는 연어의 빗살 치는 무늬 지녔으리라
한낮 뙤약볕 헤맨 내 자취도
마침내 이런 풍경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억울하다
꽃들 문 열어 다시 펼치고 있는데
내 무게가 스스로 풍경 가둔 채
캄캄하게 저무는 것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분하고 억울하다.
— <고인돌> 전문.
태양계에 있는 우리나라 7월은 옷들을 거의 벗고 다녀야 할 계절이지만
우주 전체로 보면 우리의 은하계는 북북서 변두리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 가슴 밑엔 자신도 모를 성에 같은 것이 끼게 된다
정(情)이란 원래 온천수로 비유되는 따뜻한 액체였다
그런데 은하계가 이 궤도에 접어들수록 찰진 온기는 없어지고
다루기 위태한 유리완구처럼 변해 버린다
— <7월의 신화> 부분.
앞의 詩에서 시인의 내성적 인식은 <고인돌>에서 감정(우수와 허무)뿐만 아니라 영혼(홀가분한 영혼), 물체(꽃), 관념(세월), 자아(빈 속내 덩그런 누각, 내 자취)까지 제 규격 속에 완강하게 누르는 힘을 본다. 사실 깨달은 마음에는 물체와 물체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둘은 내적으로는 아무런 동요나 움직임이 없는 상태를 나타낸다. 그런 점에서 "우수와 허무(를) 짐짓 투박하게 빚"어놓은 고인돌은 동양적 무아의 풍미마저 풍긴다. 이는 세속의 구속 속에 들어가 노면서도 오래 침묵을 지키며 그곳을 안주처로 삼아 필연의 운명에 몸을 맡긴 상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침묵과 응축은 허공과 같이 막힘이나 장애가 없는 상태를 동경하는 영혼("한때 사람들/탄력받은 날개의 눈부신 하늘 품었으리라/폭포 거스르는 연어의 빗살치는 무늬 지녔으리라")에게는 오래 갈 수가 없다. "나는 아무래도 분하고 억울하다"는 외침은 돌이라는 원소 자체에 대한 저항이면서, 그 형태가 시간 속에서 영(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대상에 대한 절규일 것이다.
뒤의 詩는 정(情)의 영역마저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으로 이해하려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정이란 원래 "온천수로 비유되는 따뜻한 액체", 스며들고 흘러드는 따뜻한 경지의 정서였다. 그것은 안다는 생각 없이 체험되는 어떤 충만한 경지였다. 그런데 꼭 "은하계가 (지구라는) 이 궤도에 접어들"수록 유리완구, 파편이라는 부분적인 지성의 예단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 금 간 지식으로는 심지어 경전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더라도 체험이 없는 지식에 불과하다. 온 세상이 지식으로 만연하고("파편들로 밤새 떠돌고 있다") 있으며, 詩에서마저도 알록달록하고 물기 없는 지식으로 나돌고 있는("詩의 중심에서 수상한 보석으로 빛나기도 한다." "습기는 아예 지니지 않는다."), "GDP나 뉴스해설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이런 현상을" "몇몇 수행자만 짐작하고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논리나 의미로 모든 것을 예단하려 하는 태도에 대한 풍자이다. 이래서야 "가슴으로 듣고 귀로 보아야 알 수 있는" 울림(<폭포>)을 어떻게 짐작이나 하겠는가.
우리나라를 옆으로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보면
대전 밑 옥천은 단전 부근이 되고
그 아래 옥계 폭포가 있다
이 부근에서 여인은 대퇴부를 비스듬히 세워
가끔 바로 누운 자세가 되는데 은하가 기슭까지 내려오는 때가 되면
폭포 소리는 몇 개의 능선을 지나도 메아리쳐
처음 우주 전자파의 아득한 울림이었다
이런 밤 선대 여인들은 놋요강 위에서의 그 울림이
폭포의 음자리됨을 가슴으로 듣고
그제야 남정네를 유달리 안채로 맞이하였다
율곡의 어머니도 그랬고, 퇴계의 어머니도 그랬다
사나이기 때문에 사나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포에
팻말을 내거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합성수지로 된 일회용 깃발이거나
알 수 없는 상형문자의 영역표시일 뿐이다
문화의 소음시대,
오직 침묵하던 마르셀 뒤샹이
임종에야 조각 한 점 전시하였다
어둠의 공간
달빛 등잔을 든 알몸의 여인이
홀로 해초처럼 숨 쉬며 누워 있었다
가슴으로 듣고 귀로 보아야 알 수 있는 옥계 폭포의 울림을
나는 거기서도 들을 수 있었다
— <폭포> 전문.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는 말이 있다. 귀는 소리를 들을 뿐이며 마음은 사물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은하가 기슭까지 내려오는 때"도 모든 대상을 떠난 순수한 의식으로 알 수 있다. 우리의 "선대 여인들은" 그때 놋요강 뒤에서의 울림을 폭포 소리의 음자리로 알아듣는다. 선대의 여인들은 원래의 마음자리를 간직하고 있었고 처음부터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아니하는 선(禪)에서 말하는 무(無)에로의 침잠을 통해 그 소리를 듣는다. 이런 무위는 보고 들음이 심상하여 어떤 객관세계도 상대할 수 없고 망령된 감정도 생길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세계와의 교섭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에 동화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다. "사나이라는 이유만으로 폭포에/팻말을 내거는"(아내와 행위를 하려 하는) 사람들은 그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한다. 여인들의 이런 센스는 마르셀 뒤샹이 남성용 변기를 전시장에서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를 띤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한 우롱, 빈정거림을 내포한다. 시인은 옥계폭포의 울림을 거기서도 듣는 것이다.
시인은 "치마 속 두 반달 내려/조심스레 몸에 고인 온기 뿜"는(배뇨하는) 그녀의 "반달 사이 핀 말미잘"(성기)이 "바다속 말미잘과 대면하는 장면"을 통해 그녀와 우주와의 교감을 읽으며(<어떤 풍경>), 가면을 쓴 시인들의 토론을 "끄집어낸 흰 코끼리가 겨자씨보다 작게 눈 속으로 사라지"게 하는 도(道)의 세계로 일순에 뒤집어 버리는 만해 시인의 칼(<두 개의 에피소드>)을 본다. 이글거리는 눈매와 맹렬한 파도의 등줄기를 가진 짐승은ㅁ 기실 시인의 초상이 아닌가.
축제의 날이 와도
설산의 암벽 오르며
늘 혼자일 것
어쩌다 포획자의 유탄 맞으면
아린 무명(無明) 혀로 핥으며
야성의 포효 노을에 담금질할 것
벗을 길 없는 표피는 형극이어서
눈 속 전율의 마그마로 이글대지만
몇 번이고 이 몸 환생 받아
근접할 수 없는 위엄 더 갖출 것
그래서 그 열기 언젠가
밤하늘 건너는 은하로 갈무리되기까지
되풀이되는 혼절의 시간 마다하지 말 것
(중략)
시인은 언 가슴
봄 아지랑이 데워 내는 사람이지만
빈 하늘 자맥질해
숨은 곡조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별자리 찾아 맨발로 세상을 돌아본 사람
태양 속 옹달샘 찾다 덧없이 눈이 먼 사람
— <맹수를 위하여> 부분.
더 팽창할 수 없는 튜브 속 밀도에서
도시가 기진해 있다
이미 예견되었거나 설정된 듯이
적도는 무더운 기압
계속 펌프질하고 있다
기상특보에 옥죄인 한반도 시간은
뻘 속에
지친 혀 늘어드리며
종일 허우적대고 있다
(중략)
분명 파괴와 약탈을 예고하고 있는
이 현상은
역사적 질곡에서 흔히 보는
거친 전환기를 내비치고 있다
급류는 하류민초들의
격한 몸짓인가 하면
강풍은
불특정 다수에게 휘두르는
익명의 광기와 같다
그 어느 것이든 영원의 시간과는
많이 벗겨나 있다
그러나 영원에서 벗어난 캄캄한 파괴의 섬광이
때로 예기치 못한 본질을 던져 줄 대가 있다
나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
— <태풍이 오고 있다> 부분.
<맹수를 위하여>라고 제목 붙인 앞의 詩에는 시인의 자세 내지 삶의 지향이 드러나 있다. 시인은 세속에 함몰되지 않고 홀로 우뚝해야 한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스스로 치료하며 무심의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 무심이 깊어지면 나와 우주의 경계가 무화되는 무한으로 도달("그 열기 언젠가/밤하늘 건너는 은하로 갈무리되기까지")한다. 마침내 시인은 "태양 속 옹달샘" 즉 물체가 응당 가지기 마련인 그 형태가 나기 이전의 상태를 찾아 눈이 먼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걸 위해 시인은 끊임없이 순환해 마지않는 혼돈 속에 몸을 맡기고 무위의 덕과 일체가 되어 만물의 근원인 자연에 통달하기 위한 고투를 하고 있다.
두 번째 詩는 시인의 내성적 인식의 활동이 돋보인다. 시인은 태풍에서 역사적 질곡의 거친 전환기를 읽어낸다. 예컨대, 급류는 민초들의 격한 몸짓인가 하면, 강풍은 불특정 다수에게 휘두르는 익명의 광기 같은 것이다. 이때 도시는 터지기 직전의 튜브다. 우리는 여기서 태풍을 통해 도시의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늘과 땅의 이치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 우주 전체가 하나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하나됨의 근원을 따라가게 되면 비로소 만물의 조화도 알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하나는 중유(衆有)의 본(本)이요, 만상(萬象)의 근(根)이다. "영원에서 벗어난 캄캄한 파괴의 섬광이/때로 예기치 못한 본질을 던져 줄 때가 있다"는 것은 천지의 형태와 운행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인은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일이 없"는 詩의 광활하고도 높은 정상(산정)을 향해 끊임없이 주파수를 맞추고 전파를 쏘아 올리며(<시법>) 오늘도 스케일 큰 詩 작업을 하고 있다. 그 발밑에서 점심이나 먹고 올 뿐이라고 넌지시 말하지만, 더욱 생활의 투정 같은 가마우지의 언어로 詩를 낭송하고 꿱꿱거리는 박수의 깃을 받고 있다고 위트를 부리지만(<가마우지>) 시인은 이성이나 미학, 윤리적 관여가 없는 영혼을 꿈꾼다. 언어가 의미에 존속되는 기존의 낯익은 가치관을 넘어 예기치 못한 이미지의 돌발성, 비논리의 세계로 모든 대상을 떠난 순수한 의식을 노래하며 세계와 우주의 비밀을 열어가기 위해 오늘도 가파른 詩의 설산 암벽을 혼자 오르고(<맹수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 손진은
• 1959년 경북 안강 출생.
• 1987년《동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 시집「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눈먼 새를 다른 세상으로 풀어놓다」
• 시론집「현대시의 미적 인식과 형상화 방식 연구」
「서정주 시의 시간과 미학」
• 대구시협상 수상.
• 현재 경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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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유심」2010년 3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