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어른들 어깨너머로 슬쩍 봤던 TV드라마 '노다지'에서 그녀를 처음 만나서, 그 후 20여년 만에 인터뷰하려고 그녀를 '진짜' 만났고, 취재한 지 다섯 달만에 함께 미국에 가기 위해 그녀를 '정말' 만났으니.
11시간 논스톱 미국행 비행기 안은 '밤기차'를 연상케 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지나가는 길목에 누워서 잠자는 탑승객이 있는가하면, 기내식이 나오기도 전에 고추장 된장을 끄집어내서 뭔가를 열심히 챙기고 있는 할머니, 맥주와 와인을 수차례 주문해서 마시는 '아저씨'… 그 와중엔 탤런트 한혜숙을 알아보고 싸인을 요청하는 아줌마도 있었다.
"재밌잖아." 이런 '험난한' 분위기의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궁궐에서 갓 도망쳐 나와 신나 죽겠다 표정 짓는 '오드리햅번'처럼 오히려 싱글벙글이다. 그녀는 예쁘게 밥을 먹고 쥬스를 마셨으며 참으로 예쁘게 초컬릿을 깨물어 먹으면서 기내서 틀어주는 영화를 관람했다. 나이 오십을 뛰어넘은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이지만 탤런트는 역시 달랐고, 한혜숙은 역시 '한혜숙'이었다.
그녀와의 미국생활은 특별한 '인연'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한참 잘나갔던 시절(?), 그러니까 20여년 전 이민생활을 시작한 한인들에게 한혜숙은 낯익은 얼굴이다. 현재 한국 방송에서 단골출연하는 배우들 이상으로 그녀의 인지도는 아주 높았다. 한혜숙이 LA에 왔다는 소식이 퍼져서 현지 일간지 기자들이 떼로 몰려와 인터뷰 요청을 해온 것만 봐도 말이다. 한국사찰에서 봉행하는 일요법회시 참여하는 불자들이 보통 이삼십명이라던데, 그녀가 떴다는 언론보도 이후 그녀가 가기로 돼 있었던 사찰 인근에선 교통체증까지 빚어졌을 정도였다. "어떤 얘기를 해야 불자들이 부처님을 더 사랑하게 될까." 전날밤 잠을 설치면서 걱정을 했던 그녀는 이른 새벽부터 법복을 챙겨 입고 절엘 갔다. 시간이 넉넉했지만 그녀는 부득이 일찍 절에 가고 싶다고 우겼다.
나중에 스님한테 얘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오자마자 법당에 들어가 108배를 했다고 했다. 땀에 젖은 법복 차림으로 법당에 주저앉아 그녀는 하나둘씩 부처님과의 인연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녀의 방송인생 30년속엔 부처님과의 '인연'이 전부였다.
스물 아홉 살 때 갑작스런 병마로 아버지를 잃고, 생활능력이 없는 어머니와 줄줄이 딸린 4명의 여동생이 그녀앞에 버티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녀는 그때부터 부처님이 곧 아버지나 다름없었다고 고백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여동생 4명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시집까지 보냈다고 한다. 이제 동생들도 자리를 잡았고 어머니도 건강하고 집도 좀 살만하니까 어느새 나이 50줄을 넘겼다고, 그래서 아직 자신은 '시집 못간 처녀'라고 했다.
"부처님이 애인이죠"란 제목을 단 한 현지언론의 기사처럼 그녀는 "부처님과 결혼했다"는 말을 곧잘 했다. 또 어느절에건 가자마자 팔 걷어부치고 공양간에 들어가 금새 한 상을 차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절에 오면 집에 온 것 같"고, "스님을 보면 부모님을 보는 것처럼 편하다"는 한혜숙. 20년 연기생활 동안 선배 탤런트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개종을 권했지만, 끝까지 불교를 택했고 불자임을 스스로 떳떳하게 내세웠던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가서도 역시 '불교사랑'을 실천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