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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 : 중용, 예기, 시경, 서경, 역경 이야기
중용(中庸)
주자는 《중용》의 작자가 자사라고 단정했고, 사마천의 사기와 몇몇 서적에도 《중용》의 작자는 자사라고 언급했지만, 청대에 이르러 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근래에는 《중용》은 자사에 의해 기초가 이루어졌고 이후 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가 학자들의 보충과 해설이 더해져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주희가 《중용》을 정리하여 《중용장구》를 내어 놓았는데, 그 형식을 33장으로 정리했다.
내용
《중용》의 요지는 요순 임금의 천하 통치의 정신이 도통인데, 이 도통의 요체는 중용에 있으므로 이를 터득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내재되어 있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으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없을 수 없는데, 두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이다. 도덕적 본성이 항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되도록 하고 인간적 욕심이 매번 도덕적 본성의 명을 듣게 하는 것이 중용의 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를 위하여 성(性), 도(道), 교(敎)라는 개념으로 천도와 인도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성은 하늘이 준 사람속에 있는 하늘의 속성이다. 도는 하늘이 부여한 본연의 성을 따르는 것이다. 효도와 자식 사랑, 형제간의 우애, 가정의 화목, 이웃 사랑이 도이다. 교는 도를 마름질하는 것인데, 도를 구체화한 교훈, 예절, 법칙, 제도 등으로 구체화된 것을 말한다.
《중용》의 주요 내용은 성(誠), 중용, 중화(中和)이다. 성은 진실무망이고, 중용은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평상의 이치다. 중화는 실천적 측면에서 중을 설명한 것이다. 희노애락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고 하며, 일어나고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대학≫·≪논어≫·≪맹자≫와 더불어 사서(四書)라고 한다. 유교에서 사서라는 일컬음이 생긴 것은 중국의 송나라 때에 이르러서이다. 주희(朱熹)가 ≪예기≫ 49편 가운데 <대학>·<중용>을 떼어내어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후 사서는 유교의 근본 경전으로 반드시 읽어야 하였다.
≪중용≫은 이와 같이 ≪예기≫ 속에 포함된 한 편이었지만 일찍부터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 왔으며, 한나라 이후에는 주해서가 나왔으며 33장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송나라 정이(程頤)에 이르러 37장이 되었다가 주희가 다시 33장으로 가다듬어 독립된 경전으로 분리시켰다.
≪중용≫의 작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종래에는 ≪사기 史記≫의 <공자세가 孔子世家>에 “백어(伯魚)가 급(伋)을 낳으니 그가 자사(子思)였다. 나이 62세에 송나라에서 곤란을 겪으면서 ≪중용≫을 지었다”라는 대목이 있어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청대에 고증학이 대두되면서 자사의 저작이라는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학자는 진(秦)·한(漢)시대의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저작이라 고증하기도 하고, 또는 자사의 저본(底本)을 바탕으로 후세의 학자들이 상당기간 동안 가필해 완성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여 아직까지 유력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중용≫을 흔히 유교의 철학 개론서라 일컫는데, 그것은 유교의 철학적 배경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장(首章) 첫머리에서 “하늘이 명(命)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대목은 유교 철학의 출발점과 그 지향처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삶을 누리자면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그 배움에는 길[道]이 있고 길은 바로 본성(本性)에 바탕하며, 본성은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태어나면서 저절로 갖추어진’ 본성을 유교에서는 맹자 이후 ‘순선(純善)’한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송대에 와서 정립된 성리학은 이에 기초해 전개되고 있다.
≪중용≫은 33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전반부·후반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중용 또는 중화 사상(中和思想)을 말하고, 후반부에서는 성(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중(中)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不偏不倚無過不及)을 일컫는 것이고, 용(庸)이란 떳떳함[平常]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희는 설명하였고, 정자(程子)는 기울어지지 않는 것[不偏]을 중이라 하고 바꾸어지지 않는 것[不易]을 용이라 하였다.
중화 사상은 중용을 철학적 표현으로 달리 말한 것인데, 이 때의 중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로되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발해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중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우주 만물이 제 모습대로 운행되어 가는 것을 뜻한다.
성(誠)은 바로 우주 만물이 운행되는 원리이다. 그 원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꿰뚫어 있다. 그래서 “성은 하늘의 도이고 성되려는 것은 사람의 도”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실한 것은 우주의 원리이고, 성실해지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는 뜻이다. 결국, 사람은 우주의 운행 원리인 성을 깨닫고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서 인격이 완성되며, 결국에 가서는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신라 원성왕 4년(788) 관리 등용법인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태학(太學)에 설치할 때 그 과목 중에 ≪예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삼국 시대에 ≪예기≫의 한 편으로서 ≪중용≫을 접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고려 말 정주학을 수용한 이후에는 사서의 하나로 ≪중용≫을 극히 존숭하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권근(權近)은 사서에 구결(口訣)을 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모든 유학자들이 ≪중용≫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성리학이 바로 ≪중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 사회에 있어서의 학술의 전개와 민족 문화 발달에 중용적 철학 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예기(禮記)
《예기》(禮記)는 중국 고대 고유가(儒家)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하나로, 예법(禮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이다.
공자와 그 후학들이 지은 책들이지만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에 흩혀저서 전해지고 있었다. 한 무제 시대에 한나라의 제후인 하간헌왕(河間獻王)이 공자와 그 후학들이 지은 131편의 저작들을 모아 정리한 후, 그 후에 한 선제 시대에 유향과 대덕(戴德)·대성(戴聖)의 형제들이 잇따라 증보하거나 간추린 목록이 유향이 214편으로 엮었고, 대덕이 85편으로, 대성이 49편으로 간추렸다. 대덕이 증보하여 간추린 문장을 편집한 예기를 따로 구분하여 《대대례》(大戴禮)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中國)의 삼례(예기, 주례, 의례) 중 하나이며, 왕조(王朝)의 제도, 상복(喪服), 동작(動作)의 규칙, 예(禮)의 해설, 예악의 이론 등을 담고 있다.
원(元)의 순제(順帝) 때 요(遼), 금(金)의 양사(兩史)ㆍ탈탈(脫脫)과 함께 편찬(編纂)되었다.
원래 《예기》의 기는 예에 대한 참고의 뜻이고, 예 또는 예경(禮經)에 관련된 토론·주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傳 참조). 즉, 예기는 일반 명사로서의 "예의 주석서"였다. 이것이 현재의 고유 명사(제목) "예기"로 굳어진 것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예기》의 성립[편집]
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수서의 예문지(藝文志), 경전석문(經典釋文)의 서록(書錄), 정현(鄭玄)이 쓴 육예론(六藝論)의 일문(逸文) 등에서 각각 논하고 있지만, 서로 모순되어 정확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중에서도 유력한 학설은 두 존재한다.
그 첫 번째는 《수서》의 경적지(經籍志)를 대표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서한(西漢) 시기의 궁정 도서인 한서(漢書) "예문지"에는 "기(記)" 141 편이 있다. 이 중에서 먼저 대덕(戴徳)이 85 편을 골라 "예기"를 만들었다. 다음 대덕의 큰 조카였던 대성(戴聖)이 대덕의 예기에서 또한 46 편을 골라 별도로 "예기"를 만들었다. 대덕과 대성을 구분하기 위해 대덕을 대대(大戴), 대성을 소대(小戴)라고 부른다. 따라서 대덕의 "예기"를 대대례기(大戴禮記), 대성의 "예기"를 소대례기(小戴禮記)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 후한(後漢) 말의 대학자 마융은 소대례기 3 편을 추가, 현재 총 49 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기(記)"에서 "대대례기", "대대례기"에서 "소대례기"가 태어난 것이다.
두 번째 학설은 정현의 "육예론"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에서 대덕과 대성이 따로따로 골라, 각각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는 원래 따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외에도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는 "기"에서 고른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후창(后蒼)의 곡대기(曲臺記)를 계승한 것으로, 본래는 49 편이었다고 하는 학설도 존재한다. 이것은 황회신(黄懐信) 등이 편찬한 "대대례기 휘교집(黄懐信) 주(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학설의 성립을 인정하기에는 몇 가지 전문적인 문헌 비판을 필요로한다. 어쨌든, "대대례기"와 "소대례기"의 성립에는 확실한 학설이 아니다.
한나라에있는 "대대례기"와 "소대례기"는 모두 학관에 세워질 수 있어, 후한에는 열네 박사의 하나가되었다. 이 두 사람 중 후한 말기의 대학자 정현은 "소대례기"에만 주석을 붙였다. 이후 정현의 명성도 있고 정현의 주석이 붙은 "소대례기"가 쓰였기 때문에 "대대례기"의 비중은 작아지고 "소대례기"만 유행하게 되었다. 결국 "소대례기"를 줄여 "예기"라고 불르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예기"의 원형이다. 또한 현존하는 "대대례기"는 81 편 중 39 편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편 수를 세는 방법은 다양하다.)
오경(五經)의 하나로 일컬어진다. 예경(禮經)이라 하지 않고 ≪예기≫라고 한 것은 예(禮)에 대한 기록 또는 주석(註釋)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예기≫의 성립에 대해서는 그 설이 일정하지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공자는 삼대(三代 : 夏·殷·周) 이래의 문물 제도와 의례(儀禮)·예절 등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스스로의 책무로 삼았고,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예를 익히고 실천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공자 사후 각 국으로 흩어져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한 제자들에 의해 예에 대한 기록이 쌓여 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생전의 스승에게서 들은 이야기, 학설, 스승과 나눈 대화 등을 문자로 정착시켰고,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기도 하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자의 제자, 또는 그 문류(門流) 후학들에 의해 기록된 예설(禮說)들이 늘어나서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200여 편이나 되었다.
그리고 이 때쯤에는 전문적으로 예학(禮學)을 연구하는 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덕(戴德)·대성(戴聖)은 흩어져 있는 예설들을 수집, 편찬한 사람들이다. 대덕은 자를 연군(延君)이라 하는데 대대(大戴)라 일컬어지며, 대성은 자를 차군(次君)이라 하는데 소대(小戴)라 일컬어진다. 대덕과 대성은 숙질간으로 대덕이 대성의 작은아버지가 된다.
두 사람 모두 한나라의 선제(宣帝) 때 학자인 후창(后倉)의 학통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한나라의 뛰어난 학자인 정현(鄭玄)의 ≪육예론 六藝論≫에는 “지금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는 대덕과 대성의 학(學)이다. 대덕은 기(記) 85편을 전하였으니 곧 대대례(大戴禮)이고, 대성은 예 49편을 전하였으니 곧 이 예기(禮記)다.”라 하여, 예기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대덕의 85편은 대대례기, 대성의 49편은 소대례기로 일컬어졌다. 정현이라는 큰 학자가 나와 ≪주례 周禮≫·≪의례 儀禮≫와 함께 소대례기에 주석을 붙여 삼례(三禮)라 칭하게 된 후 소대례기가 ≪예기≫로 행세하게 된 것이다.
대대례기는 흩어져서 일부가 없어지고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40편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대대례기 85편에서 49편을 정리, 편찬한 것이 소대례기인지, 아니면 이 두 ≪예기≫가 각각 별개로 편찬되어 전승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대개 후자로 보는 것 같다.
정현은 ≪예기≫를 주석하면서 자주 신중하고 엄밀한 학문적 자세를 취해 원전을 존중하였고, 잘못임이 분명한 대목일지라도 원문의 글자를 고치지 않고 대신 주석으로 자세하게 지적해 두는 데 그쳤다. 이러한 정현의 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 당나라의 공영달(孔穎達) 같은 학자는 “예는 바로 정학(鄭學)이다.”라고 그를 높이 추켜세우기도 하였다.
공영달은 당태종의 명을 받아 ≪오경정의 五經正義≫의 편수에 참여하였다. ≪예기정의 禮記正義≫ 편찬에 있어서는 정현의 주를 바탕으로 웅안생(熊安生)·황간(皇侃)의 ≪의소 義疏≫를 참작해 독자적인 정리를 하였다. 이후로 ≪예기≫는 정주공소(鄭注孔疏)라 해서 정현의 주와 공영달의 소가 원전 못지 않게 존중되었다.
≪예기≫는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잡다하게 기록한 것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체계가 없고 번잡한 느낌이 없지 않으며 편차(編次)의 배열도 일정한 원칙이 없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은 별록(別錄)―지금은 없어졌지만 공소(孔疏)에 인용된 정현의 정목록(鄭目錄)에 의해 내용의 일부분을 알 수 있다―에서 내용에 따른 분류를 하고 있다.
통론(通論)에 해당하는 편은 ③·④ (원전 편차임.) 단궁(檀弓) 상하, ⑨ 예운(禮運), ⑬ 옥조(玉藻), 대전(大傳), 학기(學記), 경해(經解), 애공문(哀公問), 중니연거(仲尼燕居), 공자한거(孔子閑居), 방기(坊記), 중용(中庸), 표기(表記), 치의(緇衣), 유행(儒行), 대학(大學)이다.
제도(制度)를 내용으로 하는 편은 ①·② 곡례(曲禮) 상하, ⑤ 왕제(王制), ⑩ 예기(禮器), 소의(少儀), 심의(深衣), 명당음양기(明堂陰陽記)는 ⑥ 월령(月令), ⑭ 명당위(明堂位)이고, 상복(喪服)에 관한 기록은 ⑦ 증자문(曾子問), ⑮ 상복소기(喪服小記), · 잡기(雜記) 상하, 상대기(喪大記), 분상(奔喪), 문상(聞喪), 복문(服問), 간전(間傳), 삼년문(三年問), 상복사제(喪服四制)이다.
세자법(世子法)은 ⑧ 문왕세자(文王世子)이고, 자법(子法)은 내칙(內則)이고, 제사(祭祀)에 관해서는 교특생(郊特牲), 제법(祭法), 제의(祭義), 제통(祭統), 길례(吉禮)로는 투호(投壺), 향음주의(鄕飮酒義)이고, 길사(吉事)로는 관의(冠義), 혼의(昏義), 사의(射義), 연의(燕義), 빙의(聘義)이고, 악기(樂記)로는 악기(樂記) 등이다.
≪예기≫의 판본은 원문(原文, 經文)만을 수록한 것, 원문과 주석을 합록한 20권본(本), 정의(正義)만 수록한 단소본(單疏本) 70권, 원문·주·소를 모두 수록한 63권본 등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명나라 호광(胡廣) 등이 칙명을 받아 찬집한 ≪예기집설대전 禮記集說大全≫ 30권이 널리 읽혀지고 또한 판각도 되었다. 이는 원래 ≪오경대전 五經大全≫의 하나로, 수록된 판본이기도 하다.
≪예기≫가 우리 나라에 어느 때 전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의 ≪삼국지 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나 ≪주서 周書≫ 등에 “서적으로는 오경(五經)이 있다.”는 등의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수용된 듯하며 통일신라 이후로는 관리 등용 시험에 필수 과목이 되는 수가 많았다.
우리 나라 학자에 의한 주석은 고려 말 권근(權近)의 14년에 걸친 연구의 결실인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26권 11책)이 첫 번째 저술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예학의 흥성과 함께 뛰어난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가 간행되었다.
시경(詩經)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경》은 전한시대에 〈제시(齊詩)〉·〈노시(魯詩)〉·〈한시(韓詩)〉·〈모시(毛詩)〉 라는 네 가지 종류의 책이 나왔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그중의 모시뿐이어서 별도로 모시라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시(詩)라고만 불리었으며, "시"라는 말의 어원은 여기서 나왔다. 주나라때 편찬되었다 하여 주시(周詩)라고도 하다가 당나라 때 와서 오경의 하나에 포함되면서 시경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이다.
'풍(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160개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아(雅)'라는 것은 연석(宴席)의 노래로,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구분된다. 소아 74편과 대아 31편은 조정에서 불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頌)' 40편은 왕조·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의 노래라고 여겨진다. 어느 것이든 고대의 이름없는 민중이나 지식인의 노래이다.
주(周)는 제13대 평왕 때에 도읍을 호경(鎬京)으로부터 하남성(河南省)의 낙양으로 옮겼는데(기원전 770년), 그때 일을 노래한 것이 있다. 주실 동천(周室東遷) 이전, 즉 서주(西周)의 것으로는 제11대 선왕(宣王, 재위 : 기원전 827년 ~ 기원전 782년) 시대의 노래로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이 《시경》 중의 옛 부분이다. 주 왕조(周王朝) 창업의 모습을 노래한 것도 있으나 그것들도 선왕기(宣王期)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설에 의하면 주왕조 초기인 문왕·무왕시절의 노래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사실이라고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가요를 모은 것이 된다. 공자는 고대의 가요를 통해서 당시 정치·사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풍(風)'에는 애정의 노래라든가 일하는 노래, 유랑의 노래 등이 많으나, '아(雅)' 또는 '송(頌)'에는 천(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왕조를 찬양한 것이 있다. 또 천은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이라 믿고 천을 원망하여 천의 권위의 붕괴를 노래한 것도 많다. 천의 권위의 붕괴를 말하는 것은, 위정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시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주왕조를 뒷받침하고 있던 천(天)의 사상에 대한 무명의 민중이나 지식인의 비판의 소리를 엿들을 수 있다. 천(天)은 지정공평(至正公平)하지 못하다는 원성(怨聲)은 바로 주 왕조의 권위에 대한 피지배층의 비판이다.
고대 중국의 시가를 모아 엮은 오경(五經)의 하나로, 본래는 3,000여 편이었다고 전하나 공자에 의해 305편으로 간추려졌다. 『사기』에 의하면 공자가 311편을 가려냈다 하나 이 중 여섯 편은 제목만 전한다.
여기에 실린 노래들은 철기(鐵器)의 보급으로 농경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봉건제가 정착되어 사상과 예술이 처음으로 활짝 피던 주왕조 초에서 전국(戰國) 중기에 불려졌다. 분포 지역은 황하(黃河)를 중심으로 한 주나라 직할 경역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공자는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 육경(六經) 중에서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그 만한 전범(典範)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공자는 “시 300편을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라고 하였고, 아들 백어(伯魚)에게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시 공부를 권하였다.
『시경』 305편은 풍(風)·아(雅)·송(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풍은 국풍(國風)이라고도 하며 여러 제후국에서 채집된 민요·민가이다. 사랑의 시가 대부분으로, 남녀간의 애틋한 정과 이별의 아픔 등이 아주 원초적인 목청으로 소박하게 그려져 있다.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로 나누어진다. 궁궐에서 연주되는 곡조에 붙인 가사로 귀족풍을 띠고 있다. 송은 종묘의 제사에 쓰이던 악가(樂歌)로, 주송(周頌)·노송(魯頌)·상송(商頌)이 있다. 풍·아·송에 부(賦)·비(比)·흥(興)을 더한 것이 이른바 육의(六義)인데, 논란이 있기는 하나 대개 전자는 내용·체재상의 구분이고 후자는 수사상의 분류로 본다.
고대 제왕들은 먼 지방까지 채시관(採詩官)을 파견해 거리에 나돌고 있는 노래며 가사들을 모아 민심의 동향을 알아보고 정치에 참고로 삼았다고 하며, 조정의 악관(樂官)에게 곡조를 붙이게 해 다시 유행시킴으로써 민심의 순화에 힘썼다고 한다. 악보가 전해지지 않아 시의 곡조는 알 수 없다.
서경(書經)
《서경(書經)》은 중국 유교의 5경(五經) 가운데 하나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중국의 고대 국가들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주나라의 정치철학을 상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한 제일의 자료이다.
크게 《우서(虞書)》·《하서(夏書)》·《상서(商書)》·《주서(周書)》의 4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요순시대 · 하나라 · 은나라(상나라) · 주나라에 관련된 내용을 싣고 있다.
전국시대에는 공문서라는 의미로 《서(書)》라고 했다. 이후, 유학을 숭상하고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한나라 시대에서, 당시의 유학자들은 존중하고 숭상해야 할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에서 《상서(尙書)》라고 하였다. 혹은 상(尙)은 상(上)을 뜻한다고 보아 "상고지서(上古之書, 상고시대의 공문서)"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주요 경전인 5경(五經)에 속한다는 뜻에서 《서경(書經)》이라고 불렀다.
《서경》의 판본은 크게 나누어 《금문상서(今文尙書)》와 《고문상서(古文尙書)》가 있다. 신나라(新, 8년 ~ 23년) 왕망(王莽) 때 유흠(劉歆, ? ~ 23년)이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들고 나옴에 따라, 기존의 판본인 《금문상서》를 지지하는 금문가(今文家)와 새로운 판본인 《고문상서》를 지지하는 고문가(古文家) 사이에 금고문 논쟁(今古文論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현존하는 판본은 《위고문상서》와 《칭화대본 죽간상서》가 있다.
《서경》은 요임금(堯, 기원전 2356년? ~ 기원전 2255년?[3])부터 주나라(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56년) 시대까지 요(堯) · 순(舜)의 2제와 우왕(禹王) · 탕왕(湯王) · 문왕(文王) 또는 무왕(武王)의 3왕들이 신하에게 당부하는 훈계와 군왕이 백성에게 내린 포고와 명령, 군왕에게 올린 신하의 진언, 전쟁을 앞두고 백성과 장병들에게 한 훈시, 대신들 사이의 대화 등을 담고 있다.
《서경》은 서약(誓約)하는 글인 "서(誓)"와 고시(告示) 또는 포고(布告)하는 글인 "고(誥)"가 주가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전형적인 것들로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반경(盤庚): 은나라 시대의 고시문(告示文)을 주나라 사람이 추기한 것
목서(牧誓): 주나라 무왕의 서약문(誓約文)
낙고(洛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강고(康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주고(酒誥): 주나라 때의 고시문
이들 중 〈목서(牧誓)〉에서 주나라 무왕은 "지금 저 발(發)은 공손히 하늘의 벌을 행하고자 합니다(今予發惟恭行天之罰 · 금여발유공행천지벌)"라고 말하고 있는데, 《서경》의 글들은 모두 이와 같이 조상신(祖上神) 혹은 상제(上帝)에 대한 신앙이나 노예 사회에서의 왕의 권력을 보여주는 무겁고 엄격한 색조(色調)로 일관되어 있다.
성립
《서경》은 3000편이 있었다고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고문(古文) 25편, 금문(今文) 33편 등 58편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원본이 소실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고문은 한나라 경제 때 노나라의 공왕(恭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허물다 벽에서 발견한 춘추시대의 문자체(진(晉)나라의 문자)로 씌여진 고본이고, 금문은 구전된 것을 한나라 문제 때 복생(伏生)이 당시 통용되던 예서로 정리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고문상서와 금문상서는 별차이가 없었다고 하나 이후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로 나뉘어 전수되었다. 고문상서는 동한 광무제 때 무성편이 서진 말기에 나머지 15편이 전부 없어졌고, 현재는 위고문상서만이 전해지고 있다. 공안국의 위고문상서는 동진 원제때 매색(梅賾)이라는 사람이 위고문상서를 조정에 바쳐진 후 청나라 때까지 천여 년 동안 진짜로 받아들여졌다. 현재 전해지는 고문상서는 공안국 혹은 매색의 위고문상서이다.
현행본 58편 가운데 이르바 '오고'라고 일컫는 대고, 강고, 주고, 소고, 낙고와 금등, 자재, 다사, 다방 등이 서경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성립이 된것으로 주나라 초기의 기록이라고 한다. 오고는 문체가 가장 난해하여 더 고대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볼때 고요모에는 사상적으로 노장철학과 유가철학이 분화되지 않은 것도 옅보여 고오가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 의문을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구성
《서경》은 모두 58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33편을 금문상서(今文尙書)라 부르고 나머지 25편을 고문상서(古文尙書)라 한다. 금문상서는 원래 29편이었지만 일부를 분할하여 편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BC 4세기 이전에 작성된 진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문상서는 원래 16편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오래전에 소실되었다. 4세기에 나타난 모작은 원본의 제목을 붙인 16편에 9편을 더하여 모두 2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의 5편은 중국의 전설적인 태평시대에 나라를 다스렸다는 유명한 요(堯)·순(舜)의 말과 업적을 기록한 것이다. 6~9편은 하나라(夏, 기원전 2205년경 ~ 기원전 1766년경)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17편은 은나라의 건국과 몰락(기원전 1122년)에 대한 기록인데, 은나라의 멸망을 마지막 왕인 주왕이 타락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주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며 사치스럽고 음탕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마지막 32편은 기원전 771년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서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가치
《서경》은 중국 역사서의 효시로 후대의 《사기》와 《한서》같은 본격적인 정사는 아니지만 중국 고대사의 원천이 되는 책이다. 서경의 기록 대부분은 사관에 의해 사실적으로 쓰여져 사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다. 또한 서경은 중국 고대 사상의 뿌리로 유가의 덕치주의, 도가의 무위이치, 묵가의 숭검비명, 법가의 법치주의 등의 사상을 포괄하고 있다. 서경의 내용과 언어 특징은 은주 시대의 갑골 그리고 청동기에 적힌 글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제작연대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칭화전국간의 상서
2006년 홍콩의 유물시장에 나타나, 2008년 중국 칭화대 졸업생 자오웨이궈(趙偉國)가 기증한 전국시대 죽간들(칭화전국간)은 대다수가 서적류로, 중국의 전통적인 분류 체계 중에서 '경'과 '사'에 해당하는 문헌들로 추정된다. 이 중에는 20편 이상의 상서류 문헌이 포함되어 있으며 고문상서에 해당한다. 이 상서류 문헌들은 현전하는 상서와 일주서와 유사한 문헌, 이전에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문헌들도 포함하고 있다. 또 위고문상서의 〈열명〉, 〈함유지덕〉과 편명은 대응하나 내용은 전혀 다른 〈부열지명〉, 〈윤고〉가 발견되어 이 위고문상서의 성립 연구에서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유교 경전. 오경(五經) 중의 하나로,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 정치의 기록이다
고대에도 제도상으로 사관(史官)이 있어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 변동·문물 제도 등을 낱낱이 문자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옛날에는 그저 서(書)라 일컬었으며 때로는 왕조(王朝)의 이름을 위에 얹어 우서(虞書)·하서(夏書) 등으로 일컫기도 하였다.
공자(孔子)는 이 서를 대단히 중히 여겨 번잡한 것을 정리해 다시 편찬했다는 설이 있으며, 시(詩)와 더불어 제자들의 교육에 핵심적인 교과 과정으로 삼았던 것 같다.
한대(漢代) 이후 ≪상서 尙書≫라 일컬었는데, 상(尙)은 상(上)과 통하여 ‘상대(上代)의 서(書)’라는 뜻이라고 한다. 송대에 와서는 다시 ≪서경 書經≫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경(經)은 경전(經典)이라는 말로 성인이 산정(刪定)한 책이라는 존중의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는 ≪상서≫·≪서경≫의 두 명칭이 통용되고 있으며, 고증이 어렵고 난해한 글로 알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서경≫은 이른바 이제삼왕수제치평(二帝三王修齊治平)의 도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왕으로 추숭하는 요(堯)·순(舜) 이제에 우(禹)·탕(湯)·문무(文王·武王) 삼 왕을 합해 이들이 몸을 닦고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그 덕을 더욱 펼쳐서 나라를 다스리고 결국 온 천하에 평화를 이룩한, 그러한 도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모든 경전 중에서 정치서로는 으뜸으로 꼽았으며 삼경 또는 오경에 넣어 존중해 왔다. 공자가 산정한 뒤 전국 시대를 거치는 동안 ≪서경≫은 많이 산일되었다.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난을 만나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대에 이르러 금서율(禁書律)이 해제되자 다시 햇볕을 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금문상서 今文尙書≫·≪고문상서 古文尙書≫·≪위고문상서 僞古文尙書≫ 등의 일컬음이 생기게 되었다. ≪금문상서≫는 진 박사(秦博士)였던 복승(伏勝, 伏生)이 은밀히 ≪서경≫을 벽 속에 감추고, 난을 피해 사방으로 흘러다니다가 평화를 되찾은 뒤 돌아와서 벽을 열어 보니 겨우 28편(혹은 29편)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당시 통용되는 문자인 금문(今文)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승이 벽 속에 감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어 두고 있다가 구전(口傳)한 것이며, 다시 문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당시 쓰던 문자인 금문으로 정착을 시켰다는 설도 있다. 이 28편(29편)의 글이 ≪금문상서≫이다.
후한 무제(武帝) 때 노(魯)의 공왕(恭王)이 집을 넓히려고 공자의 구택(舊宅)을 부수었는데 벽 속에서 많은 고서가 나왔다. 이 고서들을 공자의 후손인 공안국(孔安國)이 정리하면서 그 중의 ≪서경≫을 이미 알려져 있는 ≪금문상서≫와 비교해 16편을 더 찾아냈는데, 이를 ≪고문상서≫라 한다.
그 뒤 성제(成帝) 때 장패(張覇)라는 사람이 다시 고문 102편을 얻어 임금에게 바쳤는데, 이것은 위서(僞書)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위고문상서≫라고 한다. 그 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매색(梅?)이라는 사람이 ≪고문상서≫를 헌상하였는데, 공안국의 전(傳 : 注解)까지 곁들여 모두 58편이나 되었다. 그 내용은 ≪금문상서≫와 일치하는 33편과, 달리 불어난 고문계(古文系) 25편으로 되어 있었다.
이 매색의 헌상본은 위고문(僞古文)이라는 설이 분분하였고, 공안국전은 위공전(僞孔傳)이라 하여 위서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 이르러 공영달(孔穎達)이 ≪상서정의 尙書正義≫를 편정할 때 이것을 정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널리 세상에 통용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읽혀지고 있는 ≪서경집주 書經集註≫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서경≫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중국 이제 삼 왕 시대의 기록으로 사관에 의해 작성된 것이며, 주로 정치 상황을 내용으로 담고 있지만, 당연히 천문·지리·윤리·민생 문제로 광범위하게 관련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정치 상황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철학적·사상적 면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전체를 일관하는 애민(愛民)·중민(重民) 사상은 공자와 맹자(孟子)로 계승되어 민본주의(民本主義)로 정착이 되었다.
이상 정치의 실현을 위해 내세운 명덕신벌론(明德愼罰論)은 후세의 현실 정치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리고 오전(五典)·오교(五敎)는 오륜(五倫)으로 발전하여 유교 도덕의 핵심이 되어 오늘날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를 설정하는 데 기준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 이미 자제 교육의 교재로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경주에서 출토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 두 젊은이가 3년 안에 ≪시경≫·≪서경≫·≪예기≫·≪좌전≫을 익힐 것을 맹세한 것으로 보아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신년은 732년(신라 성덕왕 31)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는 과거의 중요 과목이었으며 정주학(程朱學)을 수용한 이후 ≪서경집주≫가 통용되었는데, 주자(朱子)가 못다 한 주석을 제자 채침(蔡沈)이 완성한 것이었다.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權近)이 구결(口訣)도 붙이고 ≪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예기≫·≪주역≫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볼 수가 없다. 이언적(李彦迪)·조광조(趙光祖) 등 초기 학자의 선도적 연구에 이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많은 학자들이 사상적으로 부연하는 글들을 문집에 남기고 있다.
역경(易經)
《역경(易經)》은 유학(儒學)의 삼경 중 하나로, 세계의 변화에 관한 원리를 기술한 책이라 일컬어 지고 있다. 《주역(周易)》이라고도 한다. 쓴 연대는 대략 동주 시대로 추정된다.
고대의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의한 점(占)은 그것들을 불에 구웠을 때 생긴 금(線)을 판단의 재료로 하여 길흉을 점치는 일변 서죽을 써서 길흉을 점치는 방법이 주 대에는 행해졌다. 이러한 점(占)의 말이나 점법의 정신을 해설한 것이 《역경(易經)》이다. 주 대의 점서(占書)라는 데서 《주역(周易)》이라고도 호칭한다.
서죽(筮竹)을 조작하여 남은 수가 기수(奇數)일 때는 양(陽) 즉(ㅡ), 우수(偶數)일 때는 음(陰) 즉 (--)이라 하여 그것을 세 번 반복하여 괘(卦)의 상(象)을 얻는다. ㅡ 인지 -- 인지 결정하려고 3회 반복하여 얻는 조합(組合) 여덟 가지를 8괘라고 한다. 건(乾), 곤(坤), 진(震), 손(巽) 등이 그것이다. 8괘를 알맞게 둘씩 조합하여 조합의 가능 한계인 64괘를 얻는다. 이 64괘 각자의 설명을 괘사(卦辭)라 하고, ㅡ 이나 --을 각각 효(爻)라고 하거니와 이 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을 효사(爻辭))라고 한다. 이 괘사와 효사를 《역경(易經)》의 경(經)이라고 한다. 경의 해석이나 역(易)의 정신을 표기한 것을 10익(十翼)이라고 한다.
그런 말을 신비화시키고 권위를 부여하려고 괘사(卦辭)는 주의 문왕(文王)이 지었고 효사(爻辭)는 주공이 지었고 10익(十翼)은 공자가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괘사나 효사는 점(占)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특정한 작자를 생각할 수는 없으므로, 신빙성이 없다. 오늘날은 이들이 동주(東周)의 후기에서 기원전 403년 이후 전국시대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졌다고 간주한다.
주역의 철학상 요소
태극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나 삼라만상을 움직이게 하는 끝없는 우주의 순환 원리로, 이를 인격화하면 신이다.
음양
태극은 음양으로 양분되는데 양은 하늘, 남자, 광명, 위, 해, 강인, 정신, 불, 선 등을 나타내고 음은 땅, 여자, 암흑, 아래, 달, 유약, 육체, 물, 악 등을 나타낸다.
사상
음양은 음과 양으로 다시 양분되어 사상이 이루어지고 사상의학도 여기에서 나왔다.
태양 - 양으로서 양으로 작용하는 것
소음 - 양으로서 음으로 작용하는 것
소양 - 음으로서 양으로 작용하는 것
태음 - 음으로서 음으로 작용하는 것
해석하는 방법
주역은 일반으로 난해하다고 간주되는데 역경의 해석문이 은유를 이용하여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 은유를 현실에 맞게 읽는 방법에서 크게 두가지 방법이 흥행했는데 상수역과 의리역으로 나뉜다. 상수역은 주역이 우주 전체의 원리를 포괄한다고 사상에 입각해서 해석하며 해석문보다는 음양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괘의 기호학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의리역은 주역이 군자의 수양에 대한 내용만을 다룬다는 대전제하에서 괘의 기호학적 해석보다는 해석문의 유교적 해석에 중점을 둔다. 이 두가지 방법은 여러 가지 변형 방법을 낳으면서 발전했는데 상수역이 의리역의 방법의 일부를 수용하기도 하고 의리역이 상수역에 영향받기도 하면서 발전했다.
이 두 가지 방법 이외에도 불교나 도교에서 각자의 교리에 맞게 해석한 방법이 발전했지만, 유교의 상수역이나 의리역만큼은 발전하지 못하였다. 근대에 들어서서 유교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특히 주역의 입지는 더욱 더 좁아졌는데 그 이유는 미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의리역이나 상수역 같은 고전적인 해석보다는 객관적이고 대상을 파악할 때 직감이 아니라 개념, 판단, 추리 따위를 들어 밝혀 가는 해석 방법이 새롭게 제기된다. 예컨대 주역을 상나라의 역사로 보는 방법, 주역은 점쟁이의 공리공론에 불과하다는 입장 등 다양한 방법이 제기된다.
주역 계사전
〈계사전〉은 고대 중국 사회에서 점서 일종으로서 기능해 온 《주역》이 새롭게 해석될 토대를 제공했다. 즉 〈계사전〉은 《주역》의 난해하고 심원한 세계로 이끌어 줄 철학성·총론성 글인 셈이다.
〈계사전〉의 저자와 관련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전통적으로 공자가 〈십익〉을 지었다고 하나, 송 대 이후 학자들 간에 그 진위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중에는 〈계사전〉이 전국 말에서 한 초에 걸쳐 여러 학인의 손을 거쳐 쓰인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계사전〉이 담는 사상의 폭과 깊이에는 방대한 학식과 통찰력이 있다고 주장된다.
〈계사상전〉과 〈계사하전〉으로 나뉘는데 이는 중국의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체용(體用)적 사유에 의거한 것이다. 즉 〈계사상전〉(체)이 형이상적이고 본체론적 내용을 주로 담는다면, 〈계사하전〉(용)은 형이하적이며 인사적인 내용을 많이 포괄하나 이런 분류는 원칙 차원에서 하는 구분이며, 모든 장의 서술 내용이 전술한 기준에 부합되지는 않는다. 〈계사전〉에서 또 하나 특기할 만한 것은 글의 서술 방식이 저자의 특정한 사상적 관점에 입각하여 수미일관하게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계사전〉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역(易)의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 일견 가능한 듯하나 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변화의 도’를 체(體)로 삼는 《주역》의 근본 종지에 위배되므로, 주의하여야 한다.
역경에는 강설(講說)과 강석(講釋)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말만의 번역과, 그 말을 문자로 다시 옮겨 책으로 펴내는 일이 있다. 이 역경에 종사하는 승려를 역경삼장(譯經三藏)이라고 하는데, 중국에는 수많은 역경삼장들이 인도어의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중국 역경의 기원은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서역에서 온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낙양에서 ≪사십이장경 四十二藏經≫ 등 5부를 번역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한 한역의 시초로는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때 중국에서 활동한 안세고(安世高)와 지참(支讖)을 들고 있다.
중국의 역경이 큰 의의를 갖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사용한 문자가 한문이라는 점과 연관된다. 중국에서 새로운 경전이 들어와 역경이 되면 곧 그것이 우리 나라에 전해져 새로운 불교사상을 꽃피게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승려들 중에서도 역경에 직접 참가한 고승들이 있었다. 백제의 겸익은 중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범어(梵語)를 배우고, 특히 율부(律部)를 전공한 뒤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할 때 범문(梵文)으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번역하여 72권으로 엮었다고 한다.
또 신라의 원측(圓測)은 당나라의 현장(玄奘)이 인도로부터 돌아와서 역경을 할 때 그 역장(譯場)의 증의(證義)로서 참석하였고, 그 뒤에도 당나라에서 역경과 저술 등에 종사했으며, 신라의 승려 승장(勝莊)도 당나라에 머물면서 의정(義淨)의 역장에서 증의가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 경전이 들어온 이후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우리 나라의 말은 있으되 글이 없었으므로 말만의 번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 말만의 번역시기에 원효(元曉)나 의상(義湘)을 비롯한 수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이룬 업적은 오늘날 비록 이것이 한문으로 기술되어 전해지고 있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큰 업적으로 손꼽힌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을 비롯한 수많은 경의 종요(宗要)를 지었는데, 이러한 고승들에 의해서 한국불교는 사상적으로나 교리적으로 골격을 이루고 발전해 왔다.
말만으로 이루어진 역경은 또 신라의 방언(方言)으로 기술된 향가(鄕歌)를 그 범주에 넣어 생각할 수도 있으며, 균여(均如)의 방언으로 된 ≪십구장원통기 十句章圓通記≫ 등은 우리 글이 있기 이전의 역경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의 창제 이후 비로소 우리말과 글에 의한 경전 번역이 시도되었으나 최초의 ≪훈민정음≫이나 ≪석보상절 釋譜詳節≫은 새로 창제된 우리 글의 쓰임새를 가늠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본격적인 경전의 번역은 ≪능엄경 楞嚴經≫이 그 효시이다.
≪능엄경≫을 간행한 조선 세조 때의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는 유생들의 반발을 받으면서 한글의 홍포와 불교의 흥법(興法)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법화경≫·≪금강경≫·≪반야심경≫·≪원각경≫ 등의 대승경전과 ≪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 등의 선서(禪書)를 역간하여 한글 보급에 기여하였다.
이 역경사업에는 고승 신미(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 등과 윤사로(尹師路)·황수신(黃守身)·김수온(金守溫)·한계희(韓繼禧) 등 간경도감의 도제조(都提調) 및 제조들의 도움과 힘이 컸다.
이와 같은 국역 불전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문화사적 의의가 매우 큰 것이다. 그러나 간경도감을 세운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여 간경도감이 폐지되면서 국가가 주관하는 역경사업은 거의 중지되었고, 이후의 조선시대에는 사찰이 중심이 된 한글 음역(音譯)의 경판조조(經板彫雕)가 성행하였다.
이러한 한글 음역이 성행한 것은 경전의 수지독송(受持讀誦)의 공덕을 기린 것이지만, 동시에 한글 유포에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경판조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으로는 유교의 입장에서 거부반응을 갖지 않는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이 음역되거나 번역되고 판화까지 곁들여 상당히 많은 양이 발간된 사실이다. 이것은 유생의 압력을 벗어나면서 불교를 펴려고 한 조선시대 승려들의 사명감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화기에 들어서서는 역경사업이 공명심이나 공리심에서 추진되는 예가 허다하였다. 민족항일기에 불경 번역을 강력히 주장하고 역경사업에 착수했던 고승은 백용성(白龍城)이다.
그는 대중에게 불교 교리를 이해시키기 위해 우리말로 번역된 경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는데, 그가 3·1운동 후 옥중에 있을 때 다른 종교인들이 모두 한글로 된 종교서적을 보면서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이와 같은 뜻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는 1921년에 출옥하자 곧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역경에 착수하였으나, 그의 역경사업에 대한 불교계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냉담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몇 번 중단했다가도 다시 계속하여 ≪금강경≫·≪능엄경≫·≪원각경≫·≪화엄경≫ 등의 경전을 번역하였고, 한글로 된 많은 저술도 남겼다.
또 1937년에 간행된 최초의 우리말 ≪불교성전 佛敎聖典≫은 불교 역경사에 기억될 만한 일이다. 이 ≪불교성전≫은 통도사·해인사·범어사(梵魚寺)의 3본산 종무협회(宗務協會)가 출연한 2,200여 원 중 300원이 역경원에 보조됨으로써 허영호(許永鎬)가 번역하여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역경사업은 다음해에 가서 보류되고 다시 계속되지 않았다. 8·15광복 후에도 일부 승려들에 의해 역경이 다소 이루어지기는 하였으나 크게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1963년에 동국역경원(東國譯經院)이 설립되면서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운허(耘虛)가 역경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꾸준히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번역작업을 계속하여 수십 권의 한글대장경을 편찬하였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이 역경을 포교(布敎)·도제양성(徒弟養成)과 함께 종단의 3대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그 진척사항도 그다지 원활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