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선씨는 1971년 6월 협동호에 승선했다가 납북되어, 이듬해인 1972년 5월 10일 귀환한 선원이다. 인터뷰를 위해 이씨의 집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코끝에 전해오는 알코올 향이었다.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이후 그는 납북사건만 생각하면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 매일 술을 마신다고 했다. 오히려 술 한잔을 하면 용기도 생기고, 기억력이 좋아지며, 말도 잘하게 된다는 그는 방을 가득 채운 술병을 치우며 자리를 만들었다.
이씨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 대진 위에 위치한 '포진'이라는 마을이라고 했다. '포진'이라는 마을은 한국전쟁 전 북한 지역이었다. '포진'에 살던 이씨 가족은 전쟁 발발 후 곧바로 피난길에 올라 강원도 '인구'라는 마을에 정착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내다가 종전이 되어 고향이 가까운 강원도 거진으로 올라왔다고 한다. 이씨는 거진에서 거진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오징어 배를 탔다고 한다.
이씨가 처음 탔던 선박은 무동력 오징어 배로 노를 저어 나아가는 '전마선'이었다. 노를 저어 연안으로 나아가서 오징어를 잡고 돌아오는 선원 생활을 꽤 오래 했다. 그렇게 몇 년 오징어 배를 타던 이 씨는 꽁치잡이 전마선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꽁치잡이 배는 동력선에 무동력 전마선 여러 척을 줄로 이어 그물로 잡는 방식이라고 했다. 1971년 납북될 당시에도 협동호(거진어협지도선)라는 철선을 타고 나가 작업 중 납북된 것이라고 했다.
"협동호라고 본선이 따로 있었어요. 본선이 우리가 타고 있던 무동력선인 뗏마선(전마선)을 열 척씩 줄로 이어서 바다로 나가는 거예요. 본선에서 끌고 가니 어디로 가는지 본선만 알지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선장과 기관장이 방향을 잘 몰랐나 봐요. 나침반 하나에 의존해서 배를 몰았는데 날씨가 좋지 않으니 나침반이 고장 난 모양이더라고요.
협동호 선장은 이쪽으로 가자 하고, 기관장은 저쪽으로 가자며 서로 싸우고 있더라고요.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어. 비가 오고 전부 난리가 나니까 선장하고 기관장하고 그렇게 싸웠어요. 그러다가 북한 배가 나타나서 우리를 전부 끌고 간 거지. 우리는 억울하게 당한 거예요. 납북되는 바람에 내 형제들, 친척들 전부 다 작살낸 거예요.
협동호가 끌고 가던 뗏마선에 1명씩 타고 있었는데, 협동호와 작업하던 뗏마선이 전부 11척이었으니 11명이 모두 잡힌 거죠. 그 사람들 다 인생이 작살난 거지. 우리는 군사분계선을 안 넘었어요. 그런데 비가 오고 하니까 나침반이 말을 안 들어서 방향을 잃어버린 것뿐이지 우리가 월선한 건 아니에요."
"그게 법이에요?"
|
▲ 수사관으로부터 당한 허벅지 구타상황을 재현해 보이는 이명선씨. |
ⓒ 변상철 | 관련사진보기 |
이씨 일행은 북한에 11개월 7일간 억류되어 있었다. 창동호라는 배와 함께 귀환되어 돌아올 때까지 북한에서 포로 아닌 포로 생활을 하며 지낸 것이다. 북한에서 지내는 동안 밥을 주면 밥을 먹고 술을 주면 술을 마시며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고 한다. 억류 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선원들은 귀환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감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술을 마시면 북한 사람들에게 술주정을 하며 항의하였다.
"우리가 돌아온 건 남북적십자회담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5월 10일경에 우리를 내려보내 주더라고요. 휴전선 부근에 오니까 해경배가 나와 있어요. 그 해경배가 우리 배를 전부 끌고 내려가더라고요. 우리는 거진으로 갈 줄 알았더니 거진이 아니라 속초로 끌고 가더라고요. 아무래도 우리하고 같이 귀환한 창동호가 속초배라 그런가 보다 했어요.
배에서 내려서 경찰서로 간 것이 아니라 무슨 여인숙으로 끌고 가서 조서를 꾸몄어요. 거기서 엄청 두들려 맞았어요. 내가 죽다가 살아나온 사람이에요. 대한민국에 돌아와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어요. 나는 지령도 안 받았는데 지령 안 받았다고 엄청 때리더라고. 꿇어앉혀 놓고 허벅지를 너무 때려서 20년 넘게 시퍼렇게 멍이 안 빠지더라고.
진짜 억울한 게 먹고 살려고 바다 나갔는데, 선장이 배를 잘못 끌고 가서 우리가 납북된 거지. 그래도 수사관들이 '북한에서 지령받은 놈은 다 불었다'고 하면서 그렇게 때리더라고요."
당시 수사 기록에 따르면, 협동호 선원 중 함재욱이라는 선원이 합동 심문을 받던 중 화장실 벽에 못을 대고 자해했다는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그는 머리에 5cm가량 못이 박혀 헬리콥터로 원주기독교 병원으로 후송되는 위급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함재욱은 나보다 한 10살 정도 더 많은 형이었어요. 함재욱은 협동호로 납북되기 전에 이미 몇 번 납북되었다고 해서 더 맞았어요. 나중에 출소해서 함재욱이 만나 들어보니 함재욱이 조사받다가 머리를 못에다 들이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때리고 고문을 하니까 죽어버리려고 했다고.
조사받을 때는 죽지 않았는데 결국 몇 년 지나고 나서 기관장 차치운, 선장 이정호, 막내 선원 이길용, 함재욱이 거진으로 와서 전부 자살했어요. 얼마나 고통이 심했는지 4명이나 약 먹고 목메고 해서 자살했다는 거 아니에요. 대한민국 법이 개새끼에요. 먹고 살려는 사람들을 그렇게 고문을 해서 죽게 했으니 그게 법이에요?"
"진짜 억울한 것은"
|
▲ 당시 수사기록에 기재된 납북지점. 수사기록을 따르더라도 협동호는 군사분계선을 월선하지 않았다. |
ⓒ 변상철 | 관련사진보기 |
이씨는 선원들의 자살에 경찰의 지독한 감시와 괴롭힘이 있었다고 했다.
"경찰들 감시가 너무 심했어요, 내가 거진에서 감시가 심해서 울산으로 내려가서 대구리 배(저인망 어선)를 탔어요. 하루 나가면 들어올 때까지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일이 많은 배예요. 내가 대구리 배 타고 바다에 나가면 경찰들이 우리 집에 진을 치고 있어요. 내가 울산에 있을 때 결혼했는데, 처가에 경찰들이 그렇게 찾아오니 우리 장인 영감이 경찰들 올 때마다 개를 잡아다가 요리해서 경찰들에게 갖다 바쳤어요.
우리 사위는 간첩 아니라면서 그렇게 갖다 바쳤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경찰 놈들이 더 와요. 보신탕 먹는다고 맨날 와요. 처먹을 건 다 처먹으면서 내가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지, 어디서 누구를 만나는지 물어볼 건 다 물어보는 거요. 내가 바다에서 돌아와 집에 있을 때는 어디 갔나, 뭘 했나, 누구를 만났나 하고 아주 귀찮게 다 물어봐요.
내가 이렇게 당했는데 우리 자식하고 친척들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울산에 20년을 사는 동안 경찰들이 계속 찾아왔어요. 그렇게 울산에서 살다가 거진으로 올라와서도 형사들이 줄줄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 나도 다른 선원들처럼 약 먹고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뭔 낙이 있다고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이씨는 자신 때문에 자녀들이 큰 회사에 들어갈 생각도 못 했다고 한다. 자녀들 뿐만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국가의 제재를 받으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큰 조카들도 모두 이씨의 납북전과 때문에 막노동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게 사는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며 이씨는 미안해했다.
"아니, 막말로 먹고살려고 바다에 나간 죄 밖에는 없잖아요. 실제 우리가 월선을 한 것도 아니고. 배야 선장, 기관장이 몰았는데 우리가 왜 죄를 뒤집어써야 하냐고요. 그리고 우리 피해받는 거야 그렇다고 하지만 나 때문에 우리 자식들하고 친척들에게는 피해주고 살지 말아야죠. 그러니 내가 술을 안 먹고 살수가 있나요.
진짜 억울한 건 내가 억울한 것이 아니라 자식들, 친척들이 정말 억울한 거죠. 그 아이들이 어디 나가서 사람 구실을 하며 살지 못하잖아요. 나는 괜찮으니 우리 자식들 피해나 꼭 벗겨주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