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화산(九華山)은 지금 중국의 안휘성 池州市 靑陽縣에 있다.장강의 남쪽에 있는 구화산에는 化城寺라는 사찰이
있는데,이곳에는 신라의 왕족중 한명인 교각(김교각)이란 승려가 成佛(깨달은 부처)을 하여 '等身佛(성불할때 자신
의 몸과 크기가 같은 모습의 불상)' 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실제로 모형을 갖춘 불상이 화성사에 지금도 있기는 하나,
그것이 교각의 등신불 인지는 확인할수는 없다.아무튼 안휘성 청양현의 구화산은 양쯔강의 남쪽에 있으면서 중국
에서는 地藏菩薩(지장보살)의 화신이 도래한 최대 도량중 하나로 유명한 곳이다.이곳에 7~8세기 경 신라왕자 교각
이 주지를 했다는 고승전 기록이 있다.물론 반도가 아닌 대륙 신라의 승려다.반도는 역사신라의 일부분에 해당하는
가장 주변부로 보면 무리가 없다.대략 15년 전에 공영방송(KBS?)에서 九華山의 김교각을 재조명 하면서 부터 불교
계를 비롯해 많은 한국사람들이 구화산의 화성사를 방문한다.지금은 구화산과 화성사를 연결하는 버스터미널과 입
구에 한글로 쓰여진 안내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2, 한때 구화산의 화성사 주지였다는 '교각' 은 반도 신라의 어느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의
호류사 절에 벽화를 그려 주었다는 기록도 한국 문헌에 전혀 없고, 일본역사 문헌에만 있는 사례와 같다.그래서 정
확히 알수가 없다.역사는 기록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추측은 난무한다.화성사와 (김)교각에 대한 기록은 당시
신라와 역사시대를 같이 하면서 원활한 교류를 했다는 唐나라 문헌에도 없다.있을리 없다.당시 장강의 대부분지역
은 신라의 강역 이었기에 없는 것이다.(김)교각의 존재를 기록해 놓은 문헌은 12세기 이후(남송)에 쓰여진 '宋고승
전' 이 유일하다.약간의 기록이 남겨져 있는 '해동고승전과 구화산지' 의 화성사와 (김)교각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사람들이 '송고승전' 을 원전으로 삼아 필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宋고승전' 만 봐도 교각과 신라역사의 진실을 알
수가 있다.
3, 그런데 '宋고승전' 을 보면,교각이란 이름보다 '지장보살' 로 기록된다.즉 지장보살이 교각이다.화성사 주지 교각
(김교각)에 대해 기록하기를 '지장보살(교각)은 신라인이 아닌 暹羅國太子(섬라국 태자)' 로 기록한다는 사실이다.
(송고승전 원문에 '地藏菩薩是 暹羅國 太子' 로 쓰여진다).아호가 '喬覺' 이었던 그는 영휘 4년(651년) 24살 나이로
江南의 池州府 동쪽 청양의 구화산에 이르러 불법을 전파하는데 온갖 노력을 다했으며,성불을 하기 위한 정성이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그가 성불하고 열반한 그자리에 화성사를 창건했다고 기록한다.당시 이지역은 안휘란 지역
省 명칭은 없었고 장강의 남쪽 일대로 '강남' 으로만 불렸을 때다.그러던 중 성불의 깨달음에 도달했을 즈음 구화산
정상에 端座(단정하게 가부좌)하니 그때 나이 75세였고,그후 24년이 지나 開元 16년 (724) 7월 30일 밤에 成道(열
반)하니 그때 나이 99세 였다고 쓰고 있다.이때를 신라 애장왕 3년(803년) 이라는 애고적 해설도 있으나 한국문헌
에는 기록이 없어 증빙 할수가 없다.아무튼 그후 신라 사람들이 구화산의 화성사를 찾아와 교각의 불법을 구하려고
(수행) 찾아오는 자가 많았다는 기록은 있다.'國' 의 의미도 지역(땅)이란 뜻이지 권력 구조의 정부 의미는 약하다.
4, 그러나 이것도 구화산과 근처의 신라(동국)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지 반도의 신라인들이 지금의 안휘성 구화산의
교각을 많이 찾았다는 얘기가 아니다.교각이 구화산에서 중생구법을 위해 '四大部經(남녀 재가 불자들과 비구니와
비구승들을)' 구하려 간곳은 인근의 '南陵(구화산 동북쪽)' 이었다.그의 포교 활동 범위가 이렇다면 이곳이 바로 그가
포교 배경으로 삼았던 곳으로 역사의 신라 중심부와 가까운 강남 이있었음을 알려준다.즉 지장보살인 교각이 스스로
신라의 위치를 강남의 池州府 구화산 일대 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신라의 교각이자 지장보살의 수행을 보면 그
는 개인의 완성이자 스스로 성불하는 소승불교의 전파를 목표로 두었던 승려였지,반도의 대승불교와는 거리가 멀었
다.대륙도 황하일대는 구국의 대승불교가 성행했고,장강 일대와 남방은 개인의 성불인 소승불교가 유행 했었다.그
흔적은 지금도 여전하다.대륙 신라 '청양의 구화산' 은 반도로 옮겨와 충남 '청양의 九峰山' 으로 변형 되었다.
5, 구화산의 교각(지장보살)을 TV를 통해 신라의 승려로 재조명할때 그 미디어는 '지장보살이 섬라국의 태자' 였다
는 원문의 문구중 '地藏' 다음으로 이어지는 '보살과 섬라국의 태자' 문장 을 지우거나 흐릿하게 글짜를 깨서 내보내
는 수법을 섰다.즉 시청자들의 눈을 어둡게 만든 것이다.섬라국은 지금의 '泰國(타이랜드)'을 말하는 것이고,1939년
이전까지 현재의 태국은 '暹羅(섬라)' 란 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또한 영토도 지금의 중국 국경에 이르는 지역까지
넓었다.지금도 중국 운남성 남부의 '서쌍반나 태족자치주' 지역은 泰族이 많이 살고있다.섬라의 '暹' 은 태양이 떠오
르는 '日光' 을 말하고 섬라의 '羅' 는 신라의 羅와 같은 뜻으로 '땅(land:타일랜드),고을(州)' 를 말하는 것이다.대륙의
'東岳이 泰山' 이듯이 泰國도 태양이 떠오는 '동국' 의 뜻을 가진 나라인 '섬라' 란 국명을 가졌다.
6, 이것은 신라의 뜻이 '동국,東土,東州' 로 통하는 것과 같다.따라서 역사의 신라 칭호도 반도에 국한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있었다고 권력이 강요한 것이고 세뇌 되었을 뿐이다.'宋고승전' 을 기록하는 자가 섬라의 '暹' 의 중국어
표기가 'Xiam(Siam=시암)'이고,신라의 新의 중국어 음역 표기가 'Xin(Sin=신)' 임을 혼돈하여 음역 移記시 한자 표기
를 잘못 쓸수는 있다.이를테면 섬의 발음인 'Xiam(시암=샴)' 을 빨리하다 'Xin(신)' 이 되어 적당한 한자를 찾다가 생
겨난 음역의 착오 일수도 있다.그러나 '섬라나 신라나 모두가 동국' 이란 뜻은 같으니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실제로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 건물들의 구조나 모양들을 보면 현재의 태국과 미얀마의 불교사찰 스타일을 옮겨다 놓은 듯하
다.반도 사찰들의 밋밋한 모습은 없다.
7, 또 하나의 가정은 김교각이 성불(열반)후 많은 신라 사람들이 찾아 왔다는 것을 착안하면,안휘성의 구화산 인근과
黃山일대의 신라를 생각해 볼수가 있다.구화산은 대륙의 금강산인 황산의 서쪽 줄기에 속해 있다.그러면 신라의 화랑
도들이 풍치좋은 경승지를 찾아 다니면서 심신을 도야 했다는 수련장의 쓰임도 있었을 것이다.또한 신라의 마의태자
가 나라잃은 슬픔을 잊고자 들어갔다는 금강산이 곧 황산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현재의 중화사가 나오기
전의 동국이자 근세기 조선이며,역사 이씨 왕조의 영토는 최소한 줄여도 반도를 포함해 지금의 '산동,강소,강서,절강
과 복건,안휘성 일대' 를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이지역이 한말때 이항노가 말하던 '華東' 지역인 것이다.그래야만 세종
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이 품은 이씨 왕조의 왕들 廟號와 영토를 그려 낼수가 있다.현재와 같이 중국에 省제도 가
안착한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부터다.그 이전은 모두가 군벌과 토호들의 자치주나 자치고을에 불과 했고
유력 가문들의 압제가 판을 치던 분열 사회였다.모든 경계와 호칭이 현재와는 완전히 달랐다.예를 든다면 19세기 말
경 자유시및 영주와 군주들의 도시가 300여개 이상 펼쳐져 있던 독일의 경우보다 더 많았다.
8, 산동성 일대에는 신라院 이란 불교 사찰이 많이 있었고,강소성과 절강성에는 신라坊이 있었다는 기성의 역사해설
이 있다.이는 곧 신라인(동국인)들이 사는 고을과 영역들이 현대륙에 수없이 많았다는 뜻이다.이를 현대륙이 확장할
시대에 신라(동국)사람들이 개척한 동방 거주지나 장소로 생각하지 않고,반도의 신라인들이 대륙상인들과 해상무역
을 하기 위해 설치했던 임시장소나 휴식처 또는 임시 거점지로 설명하는 어리석음이 있다.이런 기성해설은 정말 유치
하다.그렇다면 지금도 '복건성 龍岩市' 에는 신라구 라는 區가 있는데,그것도 반도의 신라인들이 福建내륙 지역까지
옮겨가 區와 區廳을 세운 것인가? 반도의 신라 왕손이었다는 교각이나 성불했다는 김교각은 물론 그의 불법 수행을
배우려 많은 신라인들이 '구화산의 화성사' 를 찾았다는 얘기를 현재화 하면 어떻게 될까? 당시 반도에서 어떻게 가야
할까?모두 서해바다이자 중국의 동지나해를 거쳐 상해에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간후 남경을 지나 지금의 안휘성
구화산 지역으로 갔다고 해야한다.바다 건너 수천리 길이다.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역사 해설이 아닌 거짓말이다.근본
적으로 불가능한 逆 이동이다.반도의 신라에서는 갈수가 없는 거짓의 불법 구도의 여정인 것이다.
9, 혜초도 반도가 아닌 대륙 신라에서 천축국으로 갔고,당말 황소의 난 토격문을 썼다는 최치원도 대륙 신라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유학이란 말은 해석 권력을 가진자들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낸 거짓말 들이다.이런 기록들에 대한
적당한 역사 해설은 지금의 구화산 지역과 황산 일대가 신라 강역이었고,현재 태국의 태자인 지장이 신라에 소승불교
를 포교하는 과정에서 장강 유역의 大신라국 왕가로 귀화해 왕자가 되었다.그후 신라의 구화산 지역에서 구도 중 불심
을 깨달은(성불) 교각이 되어 김교각이란 명성(이름)까지 얻었다고 말해야 적절하다.신라가 강성한 위력을 발휘 했을
시 강역은 역사서 상으로 '9州,5小京,117郡,293縣' 을 갖춘 거대 규모의 대국임을 잊어서는 안된다.흔히 생각없이 말하
는 조선시대란 어느시대를 말하는가?그런 시대는 없거나 시대의 확인이 불가능하다.'조선왕조실록' 이란 것도 조선
(동국)지역 내의 '이씨왕조 기록이자 대륙 이씨 집안의 기록' 이지 반도의 기록은 아니다.실록이란 기록내에 조선이란
국호와 칭호는 없다.我邦과 聖朝는 있다.지리지에서 보이는 '縣' 은 토호가 다스리는 '변방의 작은 왕국' 의 의미로 쓰
여진 것이지,반도에서 처럼 面이나 里에 위치할 행정구역은 아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교각 스님이 태국의 태자였군요. 새로운 내용이네요.
봉건잔재라고 문화대혁명때 많이 없에고 고쳤는데도 남아 있는것이 있습니다.수많은 금석문 글자들의 핵심부분을 쪼아내고,문서들은 지워낸 흔적이 남아 있지요.한족들의 중국을 만들기 위해서.낙양의 용문석굴 불상조상기,산서성의 천룡산 석굴들의 불상조상기들을 보면,국적이나 출신지역들을 많이 쪼아내 정체를 모르게 한것들이 많이 있습니다.북경 올림픽전후해서도 공산 권력유지를 위해 많은 유물과 유적들을 없에기도 했지요.이유는 북망산과 그일대에서 한족의 중국사와 관계없는 백제유장들과 고구려 후손들이 묻힌 묘지석이 나오기 때문이지요.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