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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전기의병의 지휘부는 양반유생이 중심이나 이북지역과 일부 의진의 경우에 평민이 지휘부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전기의병의 지휘부를 봉기지역에 따라 살펴보면 〈표 5〉와 같다.
시기 | 봉기 장소 |
지휘부 | ||
유생 | 비유생 | 불명 | ||
1894. 7 | 안동 | 서상철徐相轍 | 한인석韓麟錫 이경재李罄載 한수동韓守東 | |
1895. 7 | 상원 | 김원교金元喬 | ||
1895. 9 | 유성 | 문석봉文錫鳳(무과) 오형덕吳亨德 김문주金文柱 송도순宋道淳(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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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1 | 강계 | 김창수金昌洙(문과) | 김규진金奎鎭 김이언金利彦 | |
1896.1 | 이천 | 민승천閔承天 김하락金河洛 구연영具然英 조성학趙性學 김태원金泰元 |
방춘식方春植 | 신용희申龍熙 |
1. | 여주 | 심상희沈相禧 | ||
1896.1 | 제천 | 유인석柳麟錫 서상렬徐相烈, 무과 이필희李弼熙 이춘영李春永 안승우安承禹 주용규朱庸奎 신지수申芝秀 원규상元奎常 원용정元容正 안성해安成海 정운경鄭雲慶 정인설鄭寅卨 이경기李敬器 이범직李範稷 이원하李元廈 박주순朴胄淳 장충식張忠植 이조승李肇承 홍선표洪璇杓 이기진李起振 정화용鄭華鎔 |
김백선金伯善 (포수) | |
1896.1 | 춘천 | 이소응李昭應 이진응李晉應 이경응李敬應 정인회鄭寅會 |
성익환成益煥(군인) 박현성朴玄成(상인) 김경달金敬達(포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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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 | 강릉 | 민용호閔龍鎬 김원섭金元燮 민의식閔義植 심홍택沈鴻澤 이영찬李永燦 |
박한옥朴漢玉(포수) 전치운全致雲 |
전석영全錫永(장리) 전귀석全貴錫 주명승朱明昇 최문환崔文煥 최중보崔仲甫 최중봉崔中奉 |
1896.1 | 삼척 | 김헌경金▲{金+憲}卿 | ||
1896.1 | 홍주 | 김복한金福漢(문과) 이설李偰(문과) 안병찬安炳瓚 이세영李世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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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1 | 안동 | 김도화金道和 권세연權世淵 유난영柳蘭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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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2 | 영양 | 김도현金道鉉(향반) 유시연柳時淵 | ||
1896.2 | 문경 | 이강년李康秊(무과) | ||
1896.2 | 예안 | 이만도李晩燾 | ||
1896.2 | 진주 | 노응규盧應奎 정한용鄭漢鎔 | 서재기徐再起(승려) | |
1896.2 | 장성 |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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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3 | 김산 | 이기찬李起燦 허위許蔿 여중룡呂中龍(향반) 여영소呂永韶 양제안梁濟安 이시좌李時佐 강무형姜懋馨 조동석趙東奭 윤홍채尹鴻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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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2 | 예천 | 박주상朴周庠 | ||
1896.2 | 나주 | 이학상李鶴相 이승수李承壽 | 김창균金蒼均 박근욱朴根郁 정석진鄭錫珍(이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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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3 | 해주 | 某氏 (포군 17명) | ||
경주 | 이채구李采九 | |||
의령 | 이청로李淸魯 | |||
의성 | 김상종金象鍾 | |||
청송 | 심성지沈誠之 | |||
영해 | 신돌석申乭石 | |||
의주 | 조상학趙尙學 |
〈표 5〉에서 볼 수 있듯이 화서학파의 인물들 특히 유중교와 유인석 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표 5〉에 든 유인석 등이 주도한 제천의병이 그중 대표적 의진이며 이들 중 다수는 전투 중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다. 중군장을 역임한 이춘영·안승우, 소모장 서상렬·이범직, 참모사 주용규·홍사구(이상 6의사) 등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註1) 화서학파의 유생에 의해 주도된 또 다른 의진으로 노응규의 진주의병, 이소응의 춘천의병, 민용호의 강릉의병 등이 있다. 노응규는 경상남도 함양 출신으로 허전許傳에 이어 최익현崔益鉉의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다. 註2) 이소응은 춘천의 유생으로 유중교의 문인이다. 민용호도 박문오의 문인이니 역시 화서학파에 입문한 유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94년 안동에서 거의한 서상철역시 화서학파에 해당한다. 서상철은 제천의병 소모장 서상렬과는 6촌간이 되며 유중교의 문인으로 보
인다.
유성의병의 주도층 역시 전직 관료와 재지유생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의병장 문석봉이 무과 출신으로 현감과 양호소모사를 역임한 관료 출신이며, 중군장 오형덕과 선봉장 김문주 역시 옥천과 공주 출신의 유학幼學이다. 여기에 회덕의 사족 송도순이 군향으로 참여하였다. 송도순은 송준길의 10대손으로 문과출신으로 이조참판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유성의병에는 이들 외에 진사 김종률과 영장 최진동 등이 참여하였다. 註3)
한편 홍주의병의 지휘부는 대장 김복한을 비롯하여 이설·안병찬·이세영 등이 있다. 이처럼 홍주의병에서 의병을 초모하고 봉기를 추진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신분층은 유생들이다. 이를 다시 세분하면 전 현직 관료과 재지유생이 있다. 전자인 전직 관료에는 전 승지 김복한과 이설이 있다. 이들은 구체적인 군사활동을 추진하지는 못하였지만 중앙과 지방에서 요직을 역임한 이들로 이들의 거의는 인근 유생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후자 집단으로는 화성에 거주하는 안병찬을 중심으로, 청양의 이세영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관직 경력이 없는 재지유생들이다. 註4)
이천의병은 김도화 계열로 보이는 김하락을 위시하여 영남 유생 조성학과 구연영·김태원후에 유인석의 문인 등 관료출신 유생들과 신분이 밝혀지지 않은 신용희 등이 있다. 註5) 김산의병의 이기찬·허위와 안동의병의 김도화·권세연, 예안의병의 이만도, 영양의병의 김도현 등도 역시 양반유생들이다. 註6)
한편 지휘부 구성원 중에서 비양반유생이 있어 주목된다. 나주의병의 좌익장 김창균과 우익장 박근욱이 아전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어 전기의병의 특이한 의진 중의 하나로 꼽힌다. 註7) 이는 후기 호남의병의 경우에도 양한묵이나 임병찬 등과 같이 이족 출신 의병장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호남지역의 지역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제천의병의 김백선이 있다. 김백선은 경기도 지평출신으로 동학농민전쟁 때 맹영재와 함께 동학군 진압에 활약한 바 있다. 그는 이춘영의 제의에 호응하여 제천의병의 선봉장으로 참여하여 비록 군율 위반죄로 제천 삼문루에서 참형을 받았으나 상당한 공을 세운 바가 있다.
해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들은 동학군에도 참여한 바 있는 포군들이다. 해주관찰사 이명선이 이들을 귀화시켜 포군을 조직했던 것인데,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이들은 3월 20일경 경무관을 죽이고 관찰사를 구금시키며 거의한 것이다. 이는 상원의병에도 동학농민군이 참여한 것과 관련하여 북한이라는 지역적 특성에서 가능한 현상으로 보인다. 즉 서북지방이 기호나 영남지역에 비해 유교사상과 규범의 뿌리가 약하고 따라서 사회적으로 개방적인 특성을 띄고 있는 점과 관련될 것이다. 이외에도 경주의병의 지휘부를 형성했던 인물들이 아전 출신으로 보이며, 민용호의진의 후군장 박한옥이 포수로 알려지며 註8), 승려 출신인 서재기 역시 노응규의 진주의병에 선봉장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지휘부의 신분별 분포를 보면 이족이나 평민이 〈표 5〉에서 13명전체 88명으로 전체의 14.7%나 차지하고 있어 초기의병장의 신분 구성에서
평민들의 점유율이 예상 외로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 나주의병의 경우에는 현재까지 드러난 지휘부원 36명 중에서 16명이 이족으로 밝혀졌다. 註9) 이는 비양반 신분이 지휘부의 44%를 점하고 있는 예외적인 현상이다. 해주의병의 경우는 뚜렷한 인물이 나타나지는 않으나 주도자 17명 전원이 산포수 출신들이니 역시 비유생의진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춘천의병의 경우는 성익환 등 평민들이 민두호閔斗鎬의 생사당을 부수는 등 민란의 형태로 시작한 특이한 형태이다. 여기에 춘천의병도 초기단계에 평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함을 볼 수 있다. 또한 양반유생으로 분류는 하였을지라도 김도현·여중룡·문석봉 등과 같이 몰락한 양반 즉 향반잔반으로 생각되어지는 인물들이 다수 있다. 그리고 서상렬 등과 같이 비록 양반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기반은 상당히 취약한 이들이 다수였던 것 같다. 경제적 기반 문제는 자료의 제약으로 구명하기는 어려우나 이러한 취약성은 전기의병의 전력의 약화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전기의병의 병사층은 일부의 유생도 포함되나 주로 평민층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그 신원을 분명히 알려주는 기록이 부족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병사층을 구성한 집단으로 포수砲手·보부상褓負商·지방병地方兵 같은 평민이 참여했다. 그외에 소작농민이나 소수의 청병淸兵, 그리고 잠적성이 강한 동학농민군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포수는 의병부대의 주요 전투요원이다. 의병항전에는 전투력을 갖춘 포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제천의병에서는 각촌에 격문을 발송하여 포수의 의병참여를 호소한 것이 눈에 띈다. 이춘영과 안승우가 지평의진을 결성하면서 먼저 김백선의 협조를 요청하였던 것은 바로 전투요원으로서 포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김백선은 포수를 거느리고 의진에 동참하였다.
이들 포수들은 여러 전투에서 실질적인 전투력으로 활약하였으며, 제천 출신 포수 서장석·엄팔용은 충주성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영춘의 권호선이 포수를 이끌고 제천의병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註10)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전투력임에도 불구하고 유생 의병장들은 이들을 단지 용병적인 대우밖에 안했다. 그 결과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제고시키는데 실패하였으며 김백선 처형과 같은 차별적 태도는 전력의 약화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신분문제를 민족문제보다 우선시하는 유생 의병의 한계가 드러난다 하겠다.
병사층을 이룬 다른 집단으로 보부상이 있다. 「의암유선생서행대략」에 “이조승이 장소將所의 영으로 보부상을 거느리고 청풍으로 갔다.”고 한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註11) 이들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는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들이 서신 연락의 책임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보부상들이 참여하였다. 홍주의병 초기 단계인 1895년 11월 28일에 보부상들이 수십명의 선비들과 합류하여 홍주성에 들어왔으며 註12) 이세영이 부상들과 함께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를 도운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註13)
다음으로 전기의병에는 관군 또는 해산된 지방병도 참여하였다. 상원의병의 주요 구성원이 1895년 해산된 지방병들이었다. 註14) 제천의병에도 이들이 무기를 휴대하고 참여하였음이 기록되고 있다. 註15) 이들은 실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의병세력의 지원 요청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의 경우에도 초기단계에는 관군이 참여하였다. 비록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지만 서산·남양·대흥군수가 수백 명씩을 거느리고 홍주로 향하기까지 하였다. 청양군수 정인희의 경우는 청양군 내의 관군을 직접 이끌고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이승우의 변심 후 의병 지도층이 체포된 후에도 공주부 경무관 구완희가 이끄는 관군과 전투행위까지 하였다. 유성의병의 병사층 역시 주로 문석봉의 휘하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구군인들이 중심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홍주의병에는 소작농민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피현령 오영석이 집안 일꾼 백명과 군자금 만냥을 준비하여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알 수 있다. 이외에 안창식安昌植·채광묵蔡光默이 모집한 180명의 민병에는 다수의 소작농민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註16)
이밖에도 소수의 청병이 참여하였음이 특이하다. 여국안呂國安 등 7인이 그들이다. 이들은 제천의병이 북창에 주둔하고 있던 1896년 5월 11일 이인영에 의해 초모되어 의진에 들어왔다. 註17)
전기의병에 동학농민군의 일부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895년 7월 봉기한 상원의병은 평안도 상원에서 봉기하여 황해도 재령의 장수산성으로 이진하면서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발송하여 의병에 참여
할 것으로 권유하였다. 이때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동학 접주들이 상호 연락을 취하여 임종현 등이 동학농민 80여 명을 모아 장수산성에 입성한 것이다. 註18)
한편 1896년 3월 해주에서 봉기한 의병 주도자 17명은 전원 동학농민군들이다. 원래 산포수였던 이들이 해주관찰사에 의해 회유됐다가 이때 거의한 것이다. 이처럼 이북지역의 의병에는 동학세력이 다수 참여하여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이남지역은 일부 부대에 동학군이 참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잠적성이 강한 면을 보여준다. 유인석이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먼저 의병 속에 섞여있던 ‘불순분자’ 4명을 체포 처형하였는데 그중 한명이 신처사申處士라는 자로 처형 직전에 자신이 본래 동학의 두령임을 실토하고 있다. 그리고 3월 30일 처형한 나윤달 역시 동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천의병의 지휘부는 철저한 척사론자들로 반동학의 입장에 섰던 인물들이었다. 평민출신인 김백선이 선봉장이었으나 그 역시 지평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맹장이었다. 그리고 유인석을 비롯한 유생들에 의해 이들이 색출되어 처형된 점으로 보아 동학교도의 참여는 봉쇄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활동은 극히 피동적인 상태일 수밖에 없었으며 관군과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숨어 들어온 성격이 강하다 하겠다.
홍주의병과 유성의병에도 동학교도의 참여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홍주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김복한·이설·안병찬·이세영 등은 바로 유회군을 편성하여 홍주성전투를 감행했던 주역들이었다. 김홍제 역시 남포에서 유회군을 편성하여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워 정3품에 추증되었으며, 무과 출신인 황재현黃載顯 역시 보령에서 유회군을 편성하여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이와 같이 반동학의 기치 아래 뜻과 행동을 같이
했던 이들이 홍주의병에 동참한 것이다. 문석봉 역시 진잠·금산·논산·보은·청산 등지에서 동학군 진압에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에 의해 선정비까지 세워진 인물이다. 유성의병 역시 이때 문석봉의 휘하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던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 동학교도의 참여는 사실상 기대할 수 없었다.
한편 일부의 연구자들이 황현의『매천야록』에서 “유민들이 백여 명 천여 명씩 무리를 지어 모두 의병이라 칭했으며 심지어는 동학의 여당들이 낯을 바꾸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자가 반이나 되었다. 이에 잔인하고 포악하여 음탕하고 약탈하여 도적떼와 다름없는 자도 있었다.” 註19)라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동학교도의 의병참여를 강조한 바 있으나, 이 부분은 호남의병을 설명하는 문장의 일부분이며, 동학군의 행패를 강조한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의병세력에 동학교도의 참여를 강조함은 곤란할 것이다. 호남의병의 경우에 나주의병 주도자들이 동학군의 침입에 수성전을 벌여 승리했던 인물들이고, 기우만의 장성의병 역시 유생들로써 반동학의 입장이 철저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호남의병에의 동학교도 참여는 역시 희박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