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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불사르고
나의 은사 일엽 스님은 스님이기 이전에 시인이며 수필가였다. 만공 큰스님이 일엽 스님을 제자로 받아들이기 전에 말했다고 한다. "그대는 세속에서 여류시인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까지 쓰던 시는 새 울음소리고, 사람의 시는 사람이 되어 쓰게 되는 것이나, 그래도 시라고 쓰게 되고 그 문학적 수양을 하게 되는 것만도 그 방면에 연습을 많이 했기 때문이니 그 업을 녹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글 쓸 생각 글 볼 생각을 아주 단념 할 수 있겠는가? 그릇에 무엇이든 다른 것이 담겨 있으면 다른 것을 담지 못하지 않겠는가?" 일엽 스님은 만공 큰스님에게 빈 마음으로 왔다고 했고 그때부터 절필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장장 30년이 흐른 것이었다. 30년 동안 글을 쓰지 않던 일엽 스님께서 성라암에 머물던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출가를 한 이래 그릇 한 번 치워 본 일이 없고, 빨래도 내 손으로 한일이 없어. 사중의 도반들이나 여러 대중들에게 빚이 많으니 이번에 글을 써서 그것을 갚아야겠어."
나는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스님께서 다시 펜을 들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말했다. "원고지와 만년필을 제가 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나는 일엽 스님에게 원고지와 만년필을 사다가 드렸다. 마침내 스님은 우리 성라암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스님은 아랫목의 벽을 향해 앉아서 글을 썼다. 면벽수도를 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사람들이 편한 자세로 앉아서 글을 쓰시라고 권하면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해."
하루는 차를 대접해 드리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가니 얼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원고지 위를 달려가던 만년필을 내던지는 것이었다. 글을 쓰면서 감정이 복받치면 눈물을 흘리는데, 벽을 보고 앉아 있어야 눈물 흘리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 여겨 돌아앉아 글을 쓴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벽 쪽을 보고 있는 것이 결코 편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30년을 수도에 정진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노선객이었건만, 저 가슴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만들다 보니, 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일엽 스님의 그 글이 천하에서 짝을 찾기 힘든 역작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필에 몰두하시는 스님을 시봉해 드리는 것이 기뻤고 자랑스러웠다.
은사 스님은 집필에 몰두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탈고되어 1962년 5월에 "청춘을 불사르고"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되었다.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낙양의 지가를 올리며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이대 "청춘을 불사르고"를 출판했던 출판사에서, 저자 김일엽 스님이 소설가 춘원 이광수 씨의 숨겨진 애인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충격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판매 전략이었다. 당시 이광수 씨는 납북당해 있었으나 그의 부인인 허영숙 씨는 명륜동에 살고 있었다. 허영숙 씨는 일엽 스님과 평소 안면이 있었기에 가끔 성라암을 찾아오고는 했다. 출판사에서 이광수의 옛 애인 김일엽의 자전적 고백이라고 떠벌여대자 허씨가 헐레벌떡 성라암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노기가 등등했다. 허씨가 일엽 스님에게 따졌다. "스님이 그분과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것은 내가 알고 스님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일엽 스님은 태연자약했다.
"웬 호들갑이오?" "스님은 스님이 그분의 옛 애인이라고 거짓 선전을 떠벌여 대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에요? 이것은 그분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중대한 일이에요." "이광수가 뭐 그리 대단하며 김일엽은 또 뭐가 그리 대단할 것이 있어요.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몸뚱이도 내줄 수 있거늘, 까짓 별 가치도 없는 허명을 좀 들먹인다고 펄쩍 뛸 것까지야 있겠어요? 내버려 두시오."
허씨는 약이 올라 얼굴이 상기되었다.
"도인 같은 소리는 그만 좀 하세요. 나는 참을 수 없으니 출판사 쪽에서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고소를 하겠어요."
나의 은사 일엽 스님은 대범한 인물이라는 것이 내가 스님을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다. 일엽 스님은 스캔들까지도 대범하게 무시해 버렸다. 이런 큰 인물의 생각이 담긴 글이었으니 "청춘을 불사르고"는 스캔들을 조작하여 세인의 관심을 끌지 않았더라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청춘을 불사르고"는 출판사상 유래가 없는 베스트셀러가 된 동시에 성라암은 그 베스트셀러의 산실로도 기념비적인 장소가 되었다.
책을 출판해서 들어온 수입은 시봉이 관리했다가 스님이 열반하신 후에 불양답을 사는 데 썼다. 자중에 진 빚을 갚겠다던 스님의 뜻이 실천에 옮겨진 것이다. 일엽 스님은 법문을 걸레처럼 쓸 것이라고 말씀하곤 했다. "걸레가 지나가면 더럽던 곳도 깨끗해지잖아. 내 법문을 듣고 마음이 청정해질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야."
그래서 노년의 당신은 사람 만나는 것을 그리 피하지 않은 편이었다. 해소병이 있어 말씀을 많이 하면 기침이 일어나고 건강이 악화되기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급적 중간에서 따돌려 만나지 못하게 했는데, 정작 당신은 누구라도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방으로 들여보내게 했다. 그리고 스님은 상대에게 열과 성을 다하여 법문을 들려주시고는 했다. 6,25사변 때의 일이었다고 한다. 수덕사에 드나들던 돌중 하나가 6.25발발하자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누구도 그 빨갱이 중의 비위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는 일약 산중의 무법자가 되었다. 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하루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벌건 대낮에 술에 취하여 비구니들만 있는 견성암에 벌거벗고 나타나서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이년들 다 나오너라!"
비구니들은 혼비백산하여 모두 다 지대방으로 숨어 버렸다. 고요한 산중에서 일어난 때 아닌 소동의 불씨를 끈 사람이 일엽 스님이었다. 일엽 스님은 옷을 들고 밖으로 나와 돌중과 마주섰다.
"스님이 이성을 잃어서야 되겠소. 빨리 이 옷 입으시오."
고삐 끊어진 망아지처럼 견성암 앞마당을 길길이 날뛰던 돌중은 일엽 스님의 한마디 말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두 사람은 대치하여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중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일엽 스님의 눈은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돌중이 먼저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일엽 스님의 기에 눌려 옷을 받아 입고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춘성 큰스님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비구니는 물론 비구 스님들까지 겁이 나서 못 나서는 판에 담대하게 앞에 나서서 일을 처리할 만큼 여유가 있던 분이 일엽 스님이다.
당시에는 비구니들이 서울 나들이를 오면 마땅하게 바랑을 풀어 놓고 볼일을 볼 수 있는 거처가 없었다. 일엽 스님은 성라암을 전국 비구니들의 회관으로 가꾸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우리는 뜻을 세우고 요사채를 증축하려 했으나 이곳이 공원 부지여서 당시의 건축법에 따라 건축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일엽 스님은 손수 진정서를 작성하여 관계요로에 보내는 등 비구니 회관 건립을 위해 앞장을 섰다. 그러나 결과부터 얘기한다면 이때 스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건축 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은 것이 제일 큰 장애였지만 그보다 수덕사 쪽에서 스님을 자꾸 모셔가려고 한 때문이었다.
일엽 스님을 시봉하고 있던 경희 스님과 월소, 정진 스님 등이 먼저 수덕사로 내려간 뒤에도 스님은 성라암에 머물고 계셨다. 그들은 이따금 찾아와서 스님을 졸랐다. "스님, 이제 볼일이 다 끝났으니 견성암으로 돌아가시지요." "내가 무슨 보따리냐, 이리저리 끌고 다니려고 하게. 너희들이나 거기 가서 살아라. 난 여기서 지내련다."
일엽 스님은 여러 명의 상좌를 두었지만 말년에 주로 경희 스님과 경희 스님의 제자들인 월송, 정진 등의 시봉을 받았다. 이들은 노스님을 편히 모신다는 명분으로 세숫물을 방으로 들여가는 등 손발을 까딱하지 못하게 했다. 선객이어서 가뜩이나 운동이 부족한데 이런 식으로 감싸니 잘 시봉한다고 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는 명 단축시켜 드리는 것같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스님은 잘 다니시지 못했다.
나는 스님에게 말했다.
"스님, 힘들어도 운동을 좀 하셔야겠어요."
나는 찬물로 매일 마사지를 해드리면서, 손수 밖으로 나와 세수를 하게하고 화장실도 다니시게 했다. 처음에는 내가 부축했으나 곧 당신이 할 수 있다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출입을 했다. 하루는 당신이 잡수신 밥상을 들고 부엌까지 오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이구, 스님. 무거운 걸 드시면 안돼요."
스님은 웃음을 띠었다.
"내가 할 수 있나 한번 해봤다."
몸을 움직이니 방안에만 계실 때보다 빠른 속도로 건강이 좋아졌다. 당신도 기뻐하고, 우리 보기에도 좋았다. 이럴 때 수덕사의 벽초 스님이 찾아왔다. 벽초 스님은 불사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이번에 견성암을 증축 이전시키려고 하는데 이런 큰 불사를 앞두고 스님이 이곳에 와 계시면 되겠습니까?" "나 없이 하면 안 되겠어요?" "일엽 스님이 계셔야 일이 잘 풀려 나가게 생겼으니 모시러 온 거지요."
일엽 스님은 벽초 스님이 3일을 묵을 동안 따라가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나흘째 되는 날 나를 불렀다. "법성아, 아무래도 내가 내려가서 좀 봐주어야 할 판이야. 그쪽 일이 어지간해지면 다시 올라올게."
성라암에 오신 지 꼭 3년 만의 일이었다. 스님은 3년 동안 이곳에 머물며 "청춘을 불사르고" 외에도 계속해서 집필에 매진했으며, 서울의 불자들을 위해 많은 법문을 들려주셨다. 벽초 스님을 따라 덕숭산 수덕사로 내려가신 은사 스님은 좀처럼 다시 서울 나들이를 하지 못했다. 나는 그 후로 은사 스님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 툭하면 수덕사로 향했다. 공부를 위해, 상의드릴 일이 있을 때, 문안 여쭙기 위해 찾아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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