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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6월28일(수)흐림
인터넷에 <박열>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고 알려준다. 아나키스트 朴烈박열(1902~74)의사의 삶을 생각하다.
그가 옥중에서 감회를 읊은 시를 알아본다.
獄中雜詠옥중잡영
靑山年年春色新, 청산년년춘색신 청산은 해마다 봄빛으로 새로운데
碧海歲歲霑四濱; 벽해세세첨사빈 푸른 바다 연연이 사해의 해변을 적시겠지
獄中夜半深自愧, 옥중야반심자괴 옥중의 깊은 밤 부끄러움 깊은데
吾不能濟五尺身. 오불능제오척신 오척단신 이 몸 다스리기 어렵구나.
옥중에서 보낸 22년(1924년 투옥 21세~1945년 출옥 44세). 새털 같은 많은 낮과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소시 적 서당(7세 때 문경에서 서당에 다님)에서 익혔던 문장과 한시를 기억하며 문자를 희롱하다가 옥중의 감회에 운을 붙여 시를 끄적여 보았을 것이니, 이것이 유일한 취미라면 취미였을 것이다. 감옥에서 죽지 않고, 병신이 되지 않은 채 22년을 버티려면 제 몸 하나를 건사하고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오척단신의 몸은 언제든 썩은 짚신짝처럼 던질 순 있어도, 던지는 데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 죽기는 쉬우나 욕됨을 감내하면서 살아남는 것은 더 어렵다. 그래서 吾不能濟오불능제, 나는 내 몸을 다스릴 수 없구나! 라고 탄식한다. 老子도 말했다. 吾所以有大患者오소이유대환자는, 爲吾有身위오유신이니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으니 나에게 몸이 있음이로다. 몸은 때 맞혀 먹여주어야 하고 입혀주어야 하고 너무 춥지 않게 너무 덥지 않게 살펴주어야 한다. 그런데 식민지 대역죄인이 감옥에서 받은 대접이 오죽했으랴.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려웠을 수인생활이 얼마나 가혹했으랴! 바람에 이는 잎 새에도 괴로워할 만큼 섬세했던 윤동주(1917~1945)는 열악한 후쿠오까감옥에서 죽어갔는데 다행히 강건한 기골을 타고났던 박열은 吾不能濟오불능제라 탄식하면서 매일을 버틴 것이다. 나는 내 몸을 다스릴 수 없구나! 이 말은 ‘몸은 무상하다. 이 몸은 내가 아니며, 나의 것이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는 게송을 외우는 것과 같다. 오직 감옥에서 나갈 그 날을 기다리며 몸의 상태를 알아차리며 정신을 깨어있게 단련한 것이다. 보라, 나는 너희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이며 야만적인 제국주의 권력의 횡포에 맞서 인간의 양심과 정의를 지키면서 당당하게 승리했노라고 선포할 그 날, 감옥에서 나가는 날까지 올곧게 자신을 지킨 것이다. 출옥은 그에게 낡은 질서에서 벗어남이요,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었다. 그러나 그 앞에 열려진 세계는 해방공간의 혼란과 6.25남북전쟁이었으니 험한 길 넘어 다시 험난한 길을 가야만했구나.
金風戱梢笑聲高, 금풍희소소성고 가을 높이 나무 끝에 탄식하고
斜陽照窓影漸長; 사양조창영점장 창에 비친 저녁놀 그림자 길어져가네
落葉舞天似金鳥, 낙엽무천사금조 하늘에 춤추는 낙엽 금빛 새 날개인양 반짝이는데
省獄無爲獨斷腸. 성옥무위독단장 옥에 갇혀 할 수 없는 나는 홀로 간장을 끊는다.
옥중에서 맞는 늦가을 얼마나 처량하고 쓸쓸할까? 감방 벽으로 스며드는 한기가 여윈 몸을 엄습하고 환기창으로 비쳐드는 낙조는 비감하여라. 그 가운데 한 잎 낙엽 떨어지며 놀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황금빛 새의 깃털인 듯 날리는 일엽에서 영원속의 찰나, 찰나에 깃든 영원을 감득한다. 그러나 박열은 시적인 감상에 젖을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나가 완수해야할 소명을 생각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시간만 까먹는 수형생활이 너무도 아까워 탄식한다. 조국의 부름에 바쳐야할 청춘을 敵國적국의 감옥에서 썩다니 얼마나 원통한가! 내 청춘을 돌려다오, 일본제국제국주의의 원흉 히로히토 천황 놈아!
乾坤車輪轉, 건곤차륜전 하늘과 땅이 수레처럼 돌고 도니
本來無尊卑; 본래무존비 본래 높고 낮음이 없는 것이다
世界渾圓球, 세계혼원구 세계는 원래 둥근 하나의 공인데
何處有邊耶. 하처우변야 어디에 변두리가 있을쏘냐?
사회의 밑바닥을 구르며 살았던 삶은 그로 하여금 세상을 몸으로 배우고 익히게 해주었다. 그가 만난 세상은 부당한 권력구조에서 고통당하는 피압박자들과 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의 세계이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지향했다. 아나키스트, 모든 권력은 인민의 자유를 강제한다. 어떤 권력이라도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의 희생을 강요한다. 모든 권력기관이 해체된 무정부세상, 공생과 동지애로 이룩된 세상을 만들자. 우선 조선을 일본제국주의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고 믿고 싸우는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이다. 그들은 노자와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1842~1921)을 따르는 이상주의자이다. 박열의 눈으로 본 세상은 世界渾圓球세계혼원구-세계는 원래 둥근 하나의 공이니 何處有邊耶하처우변야-어디가 주변부이며 어디가 중심부인가? 당신이 밟고 있는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다. 당신을 중심으로 세계가 펼쳐있으니 어떤 세계를 건설할 것인지는 당신의 자유선택에 달렸다. 이것이 아나키스트 박열이 살았던 경지이다.
形骸是婢僕, 형해시비복 몸뚱이는 부리는 종이요
死生卽恩愛; 사생즉은애 죽고 삶은 사랑과 은혜로다
帶東恩愛屬, 대동은애속 동쪽나라의 은애를 허리에 두르고
逍遙雲內外. 소요운내외 구름을 넘나들며 소요하도다.
식민지 백성이었던 박열은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를 타고 현해탄을 오고가면서 바다 끝을 바라보고 구름에 휩싸인 심경에 들어갔다 나왔다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시는 배를 타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면서 일어났던 감회를 옥중에서 반추하면서 썼던 것 같다. 내 몸뚱이는 내가 부리는 시종이어서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인신의 자유가 있어 자발적 의지로 무엇이든 실행할 수 있다. 천부의 인신자유의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문제는 나의 사적인 일이 아니다. 천하의 공명정대한 공의에 봉사하는데 내 인생을 바쳤거니, 나의 삶과 죽음은 해 뜨는 나라 조선에 바쳐진 것이다. 나라의 은혜를 허리에 두르고 구름을 넘나든다. 나라의 은혜를 갚겠다는 결연한 자세이다. 知恩者지은자 報恩보은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은혜를 갚는 사람이라 했으니, 박열이 그렇다. 나라가 백성에게 해준 게 얼마나 된다고 나라의 은혜를 말하는가?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더구나 조선말 권력집단은 제국주의 침탈 앞에 무력하여 국권을 일제에 갖다 바쳤고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민중을 배신하기까지 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권력에서도 버림받았고 나라를 빼앗은 일제권력에게서도 핍박을 받는 이중의 피압박을 당하는 처지에서도 나라의 은혜를 갚는다는 뜻은 압박받는 민중의 고통에 연민을 느껴 그들과 연대하여 투쟁한다는 의미이다. 약자의 처지에 서서 그들에게 봉사하겠다는 충심이다. 그에게 ‘나라’란 곧 민중이요, 무산자, 빈민대중, 피압박민중이었다. 개 같은 세상을 사는 개새끼의 짖음이 여기에 있다.
박열의 시-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大我無我亦自我, 대아무아역자아 대아와 무아 또한 나로부터이니
無物萬我皆大五; 무물만아개대오 만물과 만아가 모두 한 덩어리이다
遮莫學者說敎家, 차막학자설교가 영특한 학자와 설교가를 막지 말라
自由人進大奔放. 자유인진대분방 자유인 나가는데 거리낄 것 없도다.
아나키스트는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권력체제를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다.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일제의 권력을 해체하는 중간 과정일 뿐이다. 모든 국가권력은 결국 개인의 자유를 훼손하기에 완전히 해체되어야 한다.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소득 대신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를 꿈꾸는 아나키스트는 경쟁과 투쟁보다는 상호부조와 동지애를 믿는다. 그들은 세계적인 우애공동체를 바라보기에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한 지적인 세례를 받은 박열의 관점이 위 시에 드러난다. 대아와 무아 또한 나로부터이니, 만물과 만아가 모두 한 덩어리이다. 사해동포주의, 만민평등주의이다. 이러히 호방한 흉금으로 세상을 안은 사람은 자유인이다. 자유인의 가는 길은 규율이나 어떤 틀에서도 벗어나 마음대로 걸림 없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내가 그 시절 거기에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박열처럼 자신을 불사르며 빛이 되는 불꽃처럼 살았을까?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박열, 그는 시운을 잘못 타고났다. 22년을 버터서 나온 세상이 남북분단과 6.25내전이었으니, 아나키스트는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요, 불청객이었다. 차라리 출옥한 후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일본과 한국이 아닌 태국이나 스리랑카, 미얀마로 가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었었더라면 후인들에게 영원을 지향하는 푯대가 되었을 텐데 라는 상상을 해본다.
2017년7월1일(일)맑음
오늘부터 봉선사 연꽃축제가 열린다. 아침부터 떠들썩하다. 거창하게 지어놓은 가설무대의 고성능 스피커에서 음악이 큰 소리로 울려 나온다. 절 도량 구석구석으로, 숲속으로 스피커 소리가 침투하여 寂寥적요를 깨뜨린다. 새들은 도망가고 스님들도 방안에 틀어박혀 꼼짝 않는다. 구경꾼들과 장사치들은 몰려오는데 수행하는 스님들은 숨을 곳이 없다. 십 수 년 전부터 산사음악회가 유행하더니 전국의 절마다 음악회와 축제가 벌어져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안달이 났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절로 많이 끌어들이면 포교가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구경삼아, 재미삼아 절에 온 사람들은 제대로 된 불교를 만나기 힘들다. 그저 불교문화와 유흥이 뒤섞인 잡탕을 조금 맛볼 뿐. 불교 좀 괜찮네, 불교 좀 볼만한 게 있네. 이 정도의 감흥만 줄 뿐,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이건 유흥이지 포교가 아니다. 사판스님들을 절에 수입이 좀 늘어날까, 신도가 좀 늘어날까 이런 속셈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건 제 살 베어 먹기이다. 이 절의 음악회나 축제에 왔던 사람이 저 절의 음악회나 축제에 간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숫자가 늘기는커녕 똑 같은 수의 친불교성향 사람들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뿐이다. 친불교성향의 사람들이 한 번 절에 들른다고 해서 불교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절에 오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거나 불교에 물들도록 만드는 프로그램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만 불러들여 잔치 집 같이 법석대는 가운데 우왕좌왕하다가 돌아가도록 내버려둔다. 이게 무슨 포교인가? 포교의 목적이 희석된 산사음악회나 축제가 무슨 소용인가?
부처님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 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비구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 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 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저버린 지 얼마나 오래인가? 우리가 부처님을 욕되고 하고 불교를 욕되게 하고 있지 않는가? 송구할 따름이다. 불교가 한구석으로 밀려난 한국 땅에서 말세 비구노릇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한때는 미얀마로 가서 아주 돌아오지 말까, 태국에서 눌러 살까도 생각했었는데 결국 텃새가 둥지를 떠나지 못하듯 아직 이 땅에 붙어산다. ‘붙어산다.’는 표현에 가슴이 찡하다. 어감도 나쁘고 비굴하고 소심한 처세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한국불교에서 스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겨우 붙어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낀다. 승가가 존경받지 못하는 데 승가의 일원인 스님이 무슨 면목으로 중생 앞에 떳떳할 수 있나? 승가가 청정하지 않고 비불교적으로 살아간다고 비난 받고 있는데 일개 스님이 무슨 염치로 비구승의 당당함과 자부심을 세울 수 있으랴? 사회의 지성인들로부터, 재가불자로부터 ‘중들아, 너희들부터 잘해라. 너희가 수행을 올바르게 잘하나, 포교를 잘하나, 욕심을 내려놨나, 분노를 자제하나,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있냐?’라는 비판이 빗발친다. 지금 조계종 승가는 도덕적 권위를 상실했다. 승가가 존경받지 못하니 수행승들도 당연히 존경받지 못한다. 한국 땅에서 수행승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굴욕을 감수해야 한다. 먼 구름 너머로 우뚝 솟아 인간 세계를 압도하며 내려다보고 있는 칸첸중가를 그린다.
2017년7월2일(일)비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바라보니 여름 산사의 맛이 난다. 처마에 달린 낙숫물 줄기가 은방울로 역어진 주렴처럼 드리워 시야를 차분하게 정리해준다. 선방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좌선하는 멋이 하안거의 별미이다. 이럴 때는 이근耳根⇔聲境성경=耳觸이촉→耳受이수. 들리는 것을 듣고, 듣는 것이 들린다. 能/인식주관 과 境/인식대상이 觸하여 찰나생성 찰나소멸을 반복하니 옥구슬이 쟁반을 구르는 듯하다. 보통은 觸→受→愛→取로 달려가는 인식과정에서 sati가 耳根을 지키고 있으면 觸→受에서 딱 멈춘다. 연잎에 물방울 굴러 떨어지듯 또르르 또르르 사라진다. 사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사라져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소리의 흔적, 소리의 발자취를 듣는 것이다. 소리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칼로 자르는 듯 찰나의 완전한 소멸, 곧 이어 찰나 생이 일어나지만 sati가 지속되면 소멸되는 국면이 뚜렷해진다. 마음은 寂寥적요로 스며들어 안온해진다.
옛 군자들은 여름의 멋을 西池償荷서지상하 東林聽蟬동림청선이라 했다. 서쪽 연못에서 연꽃을 감상하고 동쪽 숲에서 매미소리를 듣는다. 절집의 풍경이 그러하다. 石井석정에서 솟는 샘물을 받아 모아 절 앞에 蓮池연지를 만들어 연을 심고, 뒷산에는 松竹송죽을 심어 병풍으로 두르면 새와 매미가 와서 울어대니 자연의 음률이 아닌가. 옛 스님들이 일찍이 명당길지에 터를 잡아 절을 세웠기에 지금 스님들은 복덕이 적지만 그분들의 은혜를 입으며 살아가고 있다.
비가 오니 봉선사연꽃축제는 소강상태에 들었다.
2017년7월3일(월)비
어젯밤 천둥치고 번개가 번쩍이다. 밤새 비오다가다. 하루 종일 비 오락가락 맑았다 흐렸다. 수행자는 세상과 시비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남이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다만 그렇게 바라볼 뿐 따지거나 불평할 일이 아니다. 원래 세상이란 게 그렇다. 범어로 세상은 Loka이다. 부서지는 것이란 뜻을 띠고 있다. 세상이란 부서지는 것들의 모임이다. 과거의 것들은 전부 부서져 사라졌고, 지금 부서지고 있고, 앞으로도 모두 부서질 것들의 덩어리. 그 가운데 잠간 머물 뿐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허우적대는 나도 한 조각 쓰레기이며, 물거품 하나가 강물에 떠도는 것이 삶인데, 무얼 더 바라랴. 부서질 것들을 사고파는 장터에서 취할만한 것이 무어 있으랴? 그냥 돈 없는 장돌뱅이가 구경하다가 파장이 되면 퇴장하면 그뿐이다. 모든 것이 부서져 간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숲에서도 마을에서도, 안에서도 밖에서도,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들이쉼과 내쉼에서도. 위기의 순간에 걸터앉아 숨 한번 쉬는 것도 다행한 일이다. 아직 살아 있으니, 나날이 다행한 일이다.
2017년7월4일(화)맑음
간밤에 비 소리가 부산했다. 마당이 비에 씻기고 패여서 물길이 났다. 듬성듬성 풀이 파랗게 돋았다. 하늘을 우러러 보니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바야흐로 한 여름의 정취가 무르익는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룰 수 없는 부처님의 꿈을. 기라성 같은 선배 스님들이 한 결 같이 가신 길이 꿈이었을까? 그런 꿈은 꾸어봄직한 꿈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신명을 초개와 같이 던지며 세세생생 그 길을 갔던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그걸 願力이라도 하고, 大願이라 하고,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했던 것이다. 대승불교는 보리심을 강조한다. 인간의 善意志에 주목하여 수행하려는 의지를 일깨우고, 북돋운다. 수행의 목적을 公利에 둔다. 그래서 일체중생의 행복을 위해 한 생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을 수행할 것을 서원한다. 세세생생 수행할 수 있을지 아닐지 누가 장담하겠는가? 그래도 그렇게 결심하고 서원하는 것이다. 왜? 수행하겠다는 결의는 善法이고, 선법을 증장하고 지속하는 것이 버릇이 되면 그것이 善業이 되어 자신과 주변이 밝아지고 평화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담마 법수에 결의(信解, 아디목카, adhimokkha)와 열의(欲, 찬다, chanda)가 있는데 보리심은 이 둘을 합친 것 같다는 감이 온다. 초기불교에서는 재가를 위한 가르침과 출가를 위한 가르침을 차이를 두어 단계적으로 가르친다. 재가불자를 위해서는 公利에 이바지하는 선업을 닦는 것이 유익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출가자에게는 세간으로부터의 해탈을 구하라고 가르친다. 세간에 끌려들게 만드는 자기안의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나아가 3계로부터 궁극적 해탈을 구한다. 그러기에 염오-이욕-해탈의 과정을 밟는다. 대승불교 권에서 태어난 스님은 출가자의 본분인 해탈지향과 세간적인 公利에 봉사하는 바라밀행 사이에서 균형을 취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면 해탈과 공리주의가 서로 상충되어 보인다. 하지만 니까야를 읽어보면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할 소지는 없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연민히 볼 것을 말씀하시고, 모든 곳에서 모든 생명의 안락을 염하고 모든 생명을 향해 자애를 보내라고 항상 권장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혜와 자비는 수행의 두 날개가 된다.
염오-이욕-해탈에 몰두했을 때는 어느 순간이라도 해탈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과 예감에 사로잡혀 언제 열반이 오나 이런 망상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이제 열반이 올 낌새가 느껴지네, 곧 열반이 경험될 것 같아, 이번 경행에서 열반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이런 종류의 망상이 1997년~1998년 미얀마 숲속센터에서 일어났었다. 그러나 그건 망상이요, 수행의 장애이었지 바른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염오-이욕-해탈에 꽂이면 그런 심리적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일부 스님들도 그런 것을 느꼈던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는 자비심계발이 보조수행으로 곁들여지면 훨씬 온화해질 것이다.
삶은 한정되어 있다. 오래 살고자 할 필요도 없지만 일찍 죽으려 할 필요도 없다. 사는 날까지는 사는 것이다. 빚진 사람이 빚을 다 갚는 날까지 버티며 살아가듯. 회색 빛 동산에 어느 날 꽃 하나가 내게로 오더니 나를 보고 웃었다. 잠시 연못가를 함께 거닐며 노닐었다. 그랬더니 회색빛 정원이 장밋빛으로 변하고 삶이 환해져 살맛이 났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안다. 꽃이란 禪定이요, 잠시 동안의 즐거움이란 喜樂과 淸淨과 輕安이다. 노동자가 술 한 잔 마시고 하루의 노고를 달래듯 그 잠시 동안의 법희로 수행의 수고로움을 달랜다. 출가수행자의 삶에는 기본적으로 허무주의가 깔려있다. 어떻게 끝낼지를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을 선택하는 자유를 누리는 게 출가수행자의 특권이다.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죽음 앞에서 당당해야 비로소 100% 자유의지를 말할 수 있다. 죽을 것인가, 더 살 것인가는 항상 내 손안에 있다. 사는 의미가 빛바래지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사는 의미가 항상 가슴 속에 빛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본래부터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그냥 살 뿐이라고 한다. 그렇다. 삶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말이겠다. 자기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서 일부러 멋지게 보이거나 튀는 인물인 걸 과시할 필요는 없다. 몸은 생체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유통기한이 다할 때까지 저절로 굴러간다. 나무가 살아가는 것과 같다. 식물성인 삶이다. 출가수행자의 삶은 어찌 보면 식물의 삶과 같다. 최소한의 기능만 하면서 살아간다. 詩的시적으로 표현해서 걸어 다니는 나무Walking tree, 말하는 나무Speaking tree라고 해도 되겠다. 나무가 돌아다니며 법석을 피우거나 시끄럽게 하지 않듯 수행자는 숲속 한 곁에 가만히 서있거나 앉아 있다. 사람들이 숲의 고마움을 몰라주어도 숲은 숲인 채로 그 자리를 지킨다. 수행자도 세상의 한 곁에서 주어진 제 자리를 지킨다. 나무들은 그렇게 제 자리를 지켜왔고, 浮圖부도들도 그렇게 제 자리를 지켜왔다. 나는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가?
2017년7월5일(수)맑음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점심 공양 후 잠깐 풀 뽑는 울력하고 쉬다. 햇볕이 따가운 낮 동안에는 방 안에 칩거하다가 볕이 누그러진 오후에 숲속으로 가서 경행하다. 숲속 오솔길을 왔다 갔다 한다. 숲에는 여러 가지 냄새가 있다. 송진 냄새, 풀잎 냄새, 땅에서 나오는 냄새, 그 밖에도 미묘한 것이 있을 테지만 둔한 내 코는 감별하지 못한다. 간혹 고라니가 놀라서 뛰어가기도 하고 오소리가 먹이를 찾아 주둥이로 사방을 훑으며 지나간다. 짐승들은 배고픔에 시달리며 하루 종일 먹을 것을 찾아다닌다. 몸뚱이를 가지고 태어난 자체가 괴로움이다. 그들의 몸은 괴로움의 원인이요 결과이다. 허기진 몸을 먹여주어야 하기에 하루 종일 먹이를 찾아 헤매야 하고,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도망가고 숨으면서 긴장해야한다. 몸뚱이 하나를 붙들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심초사하는 것이 짐승들의 삶이다. 사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람도 일종의 짐승이며 동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내안에 깃들인 짐승의 버릇과 동물의 업을 깊이 생각해보아야겠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는 것은 차치하고 내면에 깃든 동물 같고 짐승 같은 면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2017년7월6일(목)맑음
오후 4시부터 5시는 숲속 오솔길 경행이다. 날씨가 무더우니 숲속을 흐르는 공기도 뜨뜻하게 데워져 있다. 간혹 숲의 깊은 곳으로부터 시원한 미풍이 한 줄기 불어오면 축 쳐진 잎들이 춤을 추며 살아난다. 나무 사이를 흐르는 개울은 숲의 핏줄이다. 실개울이 흐르며 둠벙에 고였다가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며 굽이져 나아간다. 물 흐름이 작은 소리로 가만히 속삭인다.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건 소리가 아니라 노래다. 숲은 혼자 즐거워하는 아이가 되어 흥얼거린다. 사실 숲은 다섯 살짜리 아이다. 자애와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숲으로 들어가 그 아이를 만날 수 있으리라. 反老還童반로환동이란 말이 있다. 늙음을 돌이켜 아이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몸이야 무상하니 세월이 가면 늙겠지만, 마음은 어떻게 쓰느냐 따라서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현자의 말씀이다. 어떻게 해야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을 수 있을까?
상윳따 니까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부처님 말씀이 이같이 나에게 들리었다. 한 때 세존께서 사위성의 뿝파승원에 있는 미가라마뚜 강당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저녁 무렵 홀로 명상을 하시다가 일어나서 지는 햇볕에 등을 따뜻하게 하고 계셨다. 마침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세존의 두 손과 두 발을 만지며 이와 같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이제 세존께서는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는 늘어져 주름이 지며, 몸은 구부정해지고, 시력과 청각능력이 떨어지며, 냄새와 맛을 잘 느끼지 못하고, 촉각도 무디어 지는 조짐이 보입니다.”
“그러하다, 아난다여. 젊음 속에서도 늙게 되어 있고, 건강 속에서도 병들게 되어 있고, 삶 속에서도 죽게 되어 있다. 안색은 청정하거나 고결하지 못하고, 사지는 늘어져 주름이 지며, 몸은 구부정해지고, 시력과 청각능력이 떨어지며, 냄새와 맛을 잘 느끼지 못하고, 촉각도 무디어 지는 조짐이 보인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처럼 말씀하시고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시로써 말씀하셨다.
아, 가련한 늙음이여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미모도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나니.
누군가 백세를 살더라도
그 또한 죽어야 하는 운명이라네.
죽음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부수며 온다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우리와 똑 같이 늙어가셨다. 부처님은 영생불멸하고 전지전능한 신(神)이나 절대자, 혹은 창조주를 자처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을 사셨기에, 누구보다도 인생의 실상을 폭넓고 깊이 체험하셨다. 그러기에 그 분의 가르침은 세상에 충실히 살아가되 세상을 뛰어넘는 길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떤 것이 늙음을 뛰어 넘고, 세상을 뛰어 넘어 죽음을 건너가는 길일까?
그 때 세존께서 홀로 명상하는데,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다섯 가지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 다섯 가지는 무엇인가?
믿음의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
정진의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
바른 기억의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
집중의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
지혜의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
마침 대범천왕의 싸함빠티가 세존의 생각을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사이에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세상에 존경받는 님이시여, 그렇습니다. 올바른 길을 잘 가신 님(sugata, 善逝)시여, 그렇습니다. 다섯 가지 능력을 닦고 익히면, 불사(不死)에 뛰어들고 불사로 건너가고 불사를 궁극으로 한다는 사실을 제가 알고 또 봅니다.”
다섯 가지 능력을 오근(五根)이라 하는데 신근, 진근, 염근, 정근, 혜근(信根, 進根, 念根, 定根, 慧根)을 말한다. 이것은 늙고 죽음(老死),즉 유한한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는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 늙어도 늙지 않으며 죽어도 죽지 않는 경지는 우리가 모두 희구해 마지않는 것이 아닌가? 늙고 쇠잔해져 죽어 소멸하는 육체의 감각기관이 아닌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고 상속하는 선업종자(善業種子)로서의 정신적인 감각기관이 바로 오근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삼보(三寶)와 인과법을 믿는 능력을 갖추면 <믿음이란 정신적인 감각기관>을 갖춤이요, 악업을 참회하고 정화하며 선업을 짓기를 열심히 하는 정진력을 갖추면 <정진이란 정신적인 감각기관>을 구비함이요, 생각 생각에 바른 기억을 잊지 않고 지켜 가면 <바른 기억이란 정신적인 감각기관>을 갖춤이요, 행동과 말씨와 마음 씀이 한결 같아 오롯한 일념이 드러나면 <선정(禪定)이란 정신적인 감각기관>을 갖춤이요, 사물과 상황을 꽤 뚫어보아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지혜라는 정신적인 감각기관>을 갖춘 것이 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정신적인 감각기관을 갖춘 사람은 살아서는 안심의 경지를 누리며, 죽을 때는 불사의 경지로 들게 될 것이다.
숲에서 부처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고 상상해본다. 당신이 해줄 말만 간단히 말씀해주시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리로 가신다. 그리고 침묵에 잠기다. 숲도 침묵하고 대지도 침묵한다. 이윽고 어둠이 숲을 감싸면 천지가 평화에 잠긴다. 이것이 아리야 승가와 함께 지내는 하룻밤이다.
첫댓글 스님!
수행일기를 읽으며 여러가지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안타까움,허무함,수행,정진,희망
제가자로서 부처가되겠다는 꿈을 어떤이는 콧방귀 끼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이 꿈을 꾸지 않으면 이 허무함을 어떻게 달래며 무엇을 붙잡고 가야하나요?
그래서 공부하는건 아니지만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남에게 방해되는것도 아닌데 꿈한번 야무지게 꾸겠습니다.
항상 정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