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22]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두 번째 사구게(四句偈)
“수보리야,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맞부딪침과 어떤 법에도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금강경 제10분)
여기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다”(應無所住 而生其心)라는 말씀이 두 번째 사구게이다.
아내가 영화에 ‘마음이 머무르고 있으면’, 내가 ‘여보’ 하고 불러도 아내는 나의 부름을 듣지 못한다. 아내가 꽃의 아름다움에 황홀해(머물러) 있으면 아내는 손자들의 말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내의 마음이 텅 비어 있어야, 남편이 부르는 소리도 듣고 그리고 손자들의 떠들어대는 소리도 듣게 된다. 마음이 텅 비어 있어야 새소리도 듣는다. 꽃의 향기도 맡는다. 마음이 텅 비어야 사람도 보이고, 하늘도 보이고, 그리고 땅도 보이는 것이다. 눈앞의 모든 현상(現狀)이 한눈에 다 보이는 것이다.
부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四相)이 없다”(재14분)고 했다. 4상이 없기에 부처는 공이다. 부처는 무아이다. 무아이기에 어디에도 집착할 我가 없다. 부처는 공이기에 부처는 열반이다. 하지만 부처는 우리 중생들과 함께 살고 계신다. 열반이 속세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깨친 사람은 열반의 세계에도, 그리고 속세(俗世)에도 살고 있는 것이다. 중생들과 함께 살고 계시면서 또한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 속세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면서도, 공이기에, 구제하고 있다는 생각 없이 구제하고 계신다.
부처는 꽃은 보면서도 꽃에 머무름 없이 꽃을 본다. 소리를 들으면서도 소리에 머무름이 없이 소리를 듣는다. 맛을 보면서도 맛에 집착하지 않는 채 맛을 본다. 부처는 어떤 것에도 머무름 없이 항상 마음을 내고 계신다. 우리도 아상·인상, 등 4상(四相)을 떠나 있으면, 부처처럼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낼 수가 있는 것이다.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야겠다.”고 해서 그냥 쉽게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도(道)를 닦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머무는 바가 없으면 오직 마음뿐이다
<임간록>(林間錄)(혜홍각범 스님, 1071-1128)에, “응당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어다.”에 대한 설명이 있기에 여기에 적어보겠다.
‘금강경의 '머무는 바 없이 마땅히 그 마음이 난다’고 한 가운데 ‘머무는 바 없는 것’이란 색에도 머물지 않는다. 소리에도 머물지 않는다, 미혹에도 머물지 않는다. 깨달음에도 머물지 않는다. 체(體)에도 머물지 않는다. 용(用)에도 머물지 않음이다. ‘그 마음이 난다’라는 말은 일체 법 그대로에서 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善)에 머물러 마음을 내면 선이 나타나고, 악(惡)에 머물러 마음을 내면 악이 나타나서 본심을 숨어버리게 되니, 머무는 바 없으면 시방 세계가 오로지 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조계스님의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나부기는 것도 아니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진실로 알 수 있겠다.
또한 수산주(당말 5대 때 사람)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바람 부니 마음이 나무를 흔들고
구름이 피어나니 성품이 티끌을 일으킨다.
오늘의 일을 밝히려 하면
본래의 사람을 어둡게 하리라.
청담스님 설법 <금강경대강좌)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도 그렇다.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의 말이 제대로 안 들어온다. 마음이 상했기에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영감이 좋게 말해도 밉고, 나쁘게 말해도 밉다.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된다. 그래서 영감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온다. 그런데 감정이 앞선 중생이니까,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온다. 팔월추석이 되면, 마누라가 “아이들에게 고무신 하나 사 줍시다,” “옷가지나 사 줍시다.” 라고 하면, 마누라의 심정을 먼저 이해해준다. 그러자고 말을 해준다. 그리고 돈을 얼른 주는 것이다. 만약 돈이 없으면, ‘어디 가서 빚을 내 오든지 해 보자’고 말해준다. 빚도 못 낼 형편이면 ‘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 됐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아들도 불쌍하지만, ‘마누라 당신 말을 못 들어주니 참 안 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준다. 그러면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게 들린다.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을 모르게 되고, 또 며느리 사정도 모르게 된다. 응무소주(應無所住)로 아무 생각 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환히 알게 된다. 그러면 거기에 맞추어 줄 지혜가 나온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안 하기 때문에, 주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지옥으로, 삼악도로만 가서 인간세상이 혼란해지는 것이다.
아무 데도 머물지 않는 무소주(無所住)가 옳은 것이다. 머무는 것은 그릇되게 머무는 비극(悲劇)이다. 또 중생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육도만행(六道萬行)을 행해야 한다. (육도만행이란 불·보살이 6바라밀을 완전하게 수행하는 것). 이게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해도 한 것도 없이하라’ 이게 항복기심(降伏其心)이다. 일체 중생· 무량무수 중생을 제도했지만 사실 제도한 나도 없고 제도한 생각도 없고 또 제도 받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도를 깨치는 데 있어서 석가모니하고 혜능하고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해보겠다.
6조 혜능 대사(慧能, 638-713)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 말은, 혜능 대사(大師) 때문에 유명해졌다. 왜 혜능대사 때문에 이 말이 유명해졌는가? 그 이유를 알아보자.
혜능대사는, 스님이 되기 전까지는 그의 원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그냥 나무꾼으로만 알려졌다. 나무꾼은 산에서 나무를 해서 시장에 가서 판다.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면서 가난하게 산다. 집안이 가난하기에 그는 공부를 배워본 적이 없다. 글자를 읽을 줄을 모른다. 무식했기에 금강경은커녕 어느 경전도 전에 읽어보았거나 들어본 적이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그는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한다. 마을로 가서 나무를 판다. 어느 날은 여관에서 나무를 판다. 피곤했기에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잠깐 쉰다. 바로 그때 여관에서 투숙하고 있던 한 손님이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이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라)이란 말을 듣고서 혜능은 단박에 깨친다. (단박에 깨쳤다기보다는, 이미 깨쳐있었는데, 자기가 깨쳐있었다는 것을 모루고 있다가, 금강경을 듣고서 자기가 깨쳐있었음을 스스로 확인했었는지도 모르겠다.)
혜능은 그 손님에게 “어느 곳에서 오셨기에 이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 손님은 대답해주었다.
“나는 기주 황매현 동빙무산에서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는데, 지금 그 곳에는 문인이 천여 명이 넘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오조대사가 승려와 속인들에게 다만 <금강경> 한 권한 지니고 읽으면 곧 자성을 보아 바로 부처를 이루게 된다고 권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혜능은 숙세의 업력이 있어서, 곧 어머니를 하직하고 황매의 빙무산으로 갔다. 오조 홍인화상을 예배하였다, <돈황본단경 편역>(선림고경총서 1)
인연이라는 게!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은 <금강경> 제10분에 있는 구절이다. 나무꾼이 쉬고 있는 사이, 만약 손님이 금강경을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었다면, 제10분까지 읽기 전에, 나무꾼은 좀 쉬다가 금방 나가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나무꾼이 앉아서 쉬고 있는 사이에, 그 손님이 금강경 제10분을 이미 읽어버렸고, 그리고 제11분후부터 읽기 시작했었다면? 나무꾼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꾼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나무꾼은 불교하고 인연이 없어서, 자기가 깨쳤다는 사실도 모르면서, 그냥 나무꾼으로서 일평생을 살다가 죽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깨침’의 인연이 있었기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그 대목을 독송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나무꾼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이라는 것이, 혜능으로 하여금 이 대목을 듣고 깨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 같다.
5조(五祖) 홍인 화상을 찾아간 혜능
지게꾼은 5조홍인을 찾아간다.
홍인화상께서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저는 영남사람으로 신주의 백성입니다. 오직 부처되는 법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홍인화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너는 영남 사람이오, 또한 오랑캐니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혜능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으나 부처의 성품은 남북이 없습니다. 오랑캐의 몸은 스님과 같이 않사오나 부처의 성품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돈황본단경 편역; 선림고경총서 1)
나무꾼은 방앗간에서 여덟 달 남짓 방아를 찍었다. 여기서 나무꾼은 혜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방아를 찍으면서 절에서 일을 했어도, 내 생각으로는, 헤능은 절에서 홍인화상의 설법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리고 참선도 제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로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신수(神秀)상좌가 벽에사 게송을 써놓았다.
몸은 보리의 나무로
마음을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끝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
위이 게송을 보고, 혜능은 무식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벽에다 자기의 게송을 쓰게씀 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에 물들이오.
5조 홍인화상은 혜능의 게송을 읽어보고, 혜능이 본래 깨친 분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봤다. 그를 불렀다. “앞으로 네가 많은 중생을 제도할 사람이니 금강경을 한 번 더 배우라”라고 말해준다. 저녁에 데리고 앉아서 금강경에 대해 말해주면서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라” 라고 말해준다. 이 말을 듣고 혜능은 한 번 더 크게 깨닫는다. 두 번 깨달은 것이었다. 오도송을 지어 홍인대사에게 바친다.
어찌 마음 성품이 본래부터 청정함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마음이 본래 생멸(生滅)하지 않는
자리임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본래 구족한 줄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본래 동요하지 않을 줄 알았으며,
어찌 자기 성품이 만 가지 법을 내는 줄을 알았으리.
(돈황봉단경 편역, 선림고경총서 1)
마음성품은 본래부터 청정하고, 본래 생멸이 없고, 본래 구족되어 있고, 본래 동요하지 않고, 만 가지 법을 낸다는 것을 단박에 깨쳤던 것이다.
1조(一祖)부터 5조까지는 깨친 도인이 단 한 명씩뿐이었다. 그런데 혜능 밑에서 ‘깨친 스님’이 갑작스럽게 46명이나 나왔다. 이때부터 선불교가 중국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부처하고 혜능대사의 다른 점
금강경 제14분에 보면, 여래는 과거 5백 생 동안 인욕선인이 되어 수행을 했었다. 한때는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찢겨가면서까지 인욕(忍辱)을 닦은 적도 있었다. 제15분에는, 부처는 연등부처님으로부터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로 하리라”라는 수기를 받았었다. 그리고 부처는 싯달타라는 이름으로, 왕궁에서 태자로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예언자 ‘아시타’를 불렀다. 아시타는 어린 싯달타를 보듬고 그의 관상을 보았다. 그리고 싯달타는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싯달타는 어렸을 적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결혼도 했다. 아이도 가졌다. 싯달타는 29세 때, 도를 닦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갔다. 6년 동안의 긴 고행 끝에 도를 깨쳤다. 36세 때 부처가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혜능은, 싣달타에 비하면, 아주 쉽게 깨친 편이다.
혜능대사는 도를 깨치신 분이니까, 분명히 천안·혜안(天眼·慧眼)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천안을 갖고 계셨다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들의 전생이며 미래를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혜능은 자기 전생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혜능의 전생에 대해 전연 모른다. 혜능이 태어나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으며, 그의 어머니는 언제부터 혼자가 되었는지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수바드라 이야기
<참선요지> (허운(虛雲)화상, 중국, 1840-1959, 대성 스님 옮김)에 수바드라 이야기가 나온다. 뭔가 혜능대사하고 비슷한 점이 있기에 여기에 적어보겠다.
옛날에 석가모니불에게 수바드라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홀로였다.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괴로워했다. 부처 밑으로 출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세존이 계신 곳으로 찾아갔다. 때마침 세존은 외출 중이었다. 여러 큰 제자들이 그를 위해 과거의 인연을 관찰해보았다. 팔만 겁 중에 선근을 심은 일이 없었다. 그래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때 수바드라는 괴로움이 극에 달았다. 성 밖으로 나갔다. 업장이 이렇게 무거우니 차라리 어디에 부딪쳐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막 자살하려고 하는 참에 어느 곁에 부처가 나타나셨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수바드라는 묻는 대로 대답했다. 세존은 결국 그를 제자로 삼았다. 부처님의 처소로 돌아왔다. 그는 7일 만에 깨쳐 아라한이 되었다.
여러 제자들이 그 까닭을 몰라 세존께 여쭈었다. “그대들은 단지 팔만 겁 안의 일만 알고 있었다. 팔만 겁 이전에 일찍이 그가 선근(善根)을 심었던 것을 모른다. 그는 그때도 역시 가난했다. 나무를 해다 팔면서 살았었다. 하루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다. 도망칠 길이 없었다. 그는 급히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호랑이는 나무 위를 쳐다보았다. 호랑이는 나무를 돌아가며 물어뜯었다. 나무가 부러지려고 했다. 그의 마음은 다급했다. 누구 하나 구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때 그는 문득 대각부처(大覺佛陀)님은 자비력을 갖고 있어 능히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나무불(南無佛), 빨리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 호랑이가 ‘나무불’ 소리를 듣더니만 그를 멀찍이 피했다. 그의 목숨은 다치지 않았다. 그는 이 일로부터 깨달음의 종자인 '바른 인'(正因)을 심었다. 오늘에야 그것이 자라서 성숙한 것이다. 그래서 과위(果位)를 증득한 것이다”라고 세존은 설명해주셨다. 여러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기뻐했다.
허운하고 혜능하고의 비슷한 점
수바드라도 부처님의 처소에 온지 7일 만에 깨쳐 아라한이 된 것을 보면, 수바드라도 금생에서는 전연 도를 닦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수바드라도 나무하다 팔면서 살았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었기에, 그도 교육은 전연 받지 못했을 것이다.
수바드라는 "나무불, 빨리 저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빔으로서 바른 인(正因)을 심어놓았던 것이다.
위에서, 부처의 큰 제자들은 수바드라의 전생을 팔만 겁 전까지 살펴보았다고 했다. 그런데 5조 홍인화상은 도를 깨치신 분이다. 홍인화상도 천안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천안이 있었다면? 왜 혜능대사의 전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그냥의문(疑問)해본다.
우리들은 금강경을 독송하고 있기에, 혹은 이미 금강경을 독송했었기에, 우리는 이미 불교의 ‘바른 인’(正因)을 심어놓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시 여기는 것 중에 하나는 “남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수바드라나 혜능은 지게지고 산에 올라가 나무나 했던 아주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5계를 지킨다는 생각도 없이 5계를 지키면서 살았었던 사람들이었다. 우리도 언젠가는 수바드라나 혜능처럼 도를 깨치게 될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