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말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
네이버 블로그 - 청주 집사요 043)294-4114/ 마음이 편안해지는 시
권오삼 시인의 동시 중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작품이 있다. 30년 전인 1981년에 발표된 「발」이다.
나는 발이지요.
고린내가 풍기는 발이지요.
하루 종일 갑갑한 신발 속에서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지요.
때로는 바보처럼
우리끼리 밟고 밟히는 발이지요.
그러나 나는,
삼천리 방방곡곡을 누빈 대동여지도
김정호의 발.
아우내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누나의 발.
장백산맥을 바람처럼 달렸던
김좌진 장군의 발.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발.
그러나 나는,
모든 영광을 남에게 돌리고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이지요.
-「발」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나’로 의인화된 발이다. “고린내가 풍기는” “무겁게 짓눌리며 일만 하는” 발이 죽은 듯 지내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발은 어떤 한 사람의 구체적인 발이 아니라, 김정호, 유관순, 김좌진, 손기정 같은 역사적 인물의 발까지 아우르는, 머릿속에 그려진 발이다. “모든 영광”의 뒤에서 그 영광을 이루는 밑받침이 되고도 “어두컴컴한 뒷자리에서 말없이 사는” 그런 발을 시인은 눈여겨보고 애틋해하고 자랑스러워한다.
이번 동시집 『진짜랑 깨』에도 발에 관한 시가 있어 눈길이 간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신발 속에서만 지냈던 발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끗이 닦는다.
발등을 닦고
발뒤꿈치도 닦고
발바닥도 닦는다.
발가락을 닦을 땐
발가락들이 시원하다는 듯
자꾸 꼼지락거린다.
발을 닦고 자리에 누우면
잠도 뽀송뽀송 잘 온다.
-「발 닦기」 전문
「발」에서 발이 스스로 자기 존재를 외쳤다면, 「발 닦기」에서는 발의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생한 발을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끗이 닦는다.” 발은 보통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일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두 작품이 이를 주목한 점은 같다. 그런데 발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태도는 각기 다르다. 「발」에서 시인은 발로 하여금 ‘나는 이런 발이오!’ 하고 외치게 했다면, 「발 닦기」에서는 발이 시원하고 편안하도록 발의 주인으로 하여금 발등, 발뒤꿈치, 발바닥, 발가락까지 구석구석 꼼꼼히 닦게 하고 있다.
동시 하면 예쁘고 귀여운 것을 소재로 고운 말로 써야 한다고 대부분 생각하던 시절에 권오삼 시인은 ‘고린내 풍기는’ 「발」을 들고 나왔다. 곱상한 말, 빗대는 말을 버리고 씩씩한 말, 직접 내세우는 말을 썼다. 그 말은 똑바르게 앉아 정색을 하고 들어야 할 것 같고,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발 닦기」에 오면 말이 순서가 가벼운 악기 연주 소리처럼 부드럽게 들려오고,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살갗을 스치듯 상쾌한 느낌으로 흘러간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듣고 있다는 시늉을 해 불 필요가 없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기분이 맑아지고 좋아지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김이구 평론집, 창비, 2017)’에서 옮겨 적음. (019.04.17. 화룡이) >
첫댓글 권오삼 님의 시는 언제나 미사여구로 꾸며진 시가 아니라 삶의 향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30년 전 꽃과 항아리 동인으로 활동할 때의 시나 지금의 시나 변한 것이 없습니다. 참 심기도 굳기도 하신분이죠. 한 가지 생각으로 평생을 산다는 것 본받을 일이라 믿습니다.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다른 개성과 독창성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습작기에는 이론적인 면을 두루 섭렵하면서 다양한 시 작법도 익혀야 하겠지만,
이름을 얻고 난 뒤(등단 이후)에는 남의 눈치를 보거나 흉내내기로 시인의 위치를 유지하려 해선 곤란할 터입니다.
우리 회원님들 모두 누구누구의 아류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시의 텃밭을 일궈 나가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