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면 몸에서 뿜어내는 뜨거운 에너지를 느낀다. 좌절과 실패의 청년 시절을 만회하기 위해 수출전선의 세일즈맨으로 출발해 국내 최고 연봉을 받는 샐러리맨에서 글로벌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그리고 이제 그 기업을 사들인 오너로서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어느 분야나 1인자에게는 분명 남다른 이야기가 있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성공과 웃음의 뒤안에는 좌절과 눈물이, 그리고 변화의 물결에 맞추기 위한 수많은 도전이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도 그랬지만 속도혁명의 디지털 시대에는 더욱 남다른 비전과 자기혁신을 요구한다. 포브스코리아는 각 분야에서 1인자로 인정받는 인물을 만나 정상에 서기까지의 역정을 돌아보고 그의 철학과 세상을 보는 눈을 함께 나누는 자리를 마련한다. 시리즈로 소개할 ‘정상에 선 사람들’의 조건과 이야기는 가치있는 벤치마킹 대상이 될 것이다. <편집자>
해방둥이로 올해 예순인 윤윤수 회장은 오늘도 가방을 메고 퇴근한다. 중고생들이 책가방으로 즐겨 쓰는 까만 ‘휠라’배낭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승용차에 오른다. 그 안에는 낮에 미처 보지 못해 밤에 집에서 검토할 서류가 들어있다. 인터뷰 약속이 잡힌 3월 14일 오전 10시, 윤 회장은 와이셔츠 바람으로 서울 서초동 휠라코리아 사옥 5층 마케팅실에서 제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일벌레’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이 전혀 싫지 않아요. 사실 일 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윤 회장은 격식과 체면치레를 거부한다. 집무실부터 실용적이다. 서류를 확인하고 결재하는 집무용 책상과 컴퓨터 책상, 회의 겸 외부인사를 만나는 원탁과 의자 등이 전부다. 접견실도 따로 없고 사무실에서 손님들을 만난다. 바로 이런 점이 한국 진출을 노리던 휠라 경영진의 눈에 띄었나 보다.
2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100일도 안 돼 어머니를 여의었고, 아버지마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암으로 잃었다. 재수, 삼수 모두 실패한 뒤 후기로 한국외국어대에 들어갔는데 친구 대신 시험을 보다가 적발돼 무기정학을 당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입대해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나오니 벌써 서른 문턱이더군요. 제 인생에서 20대는 암흑기였습니다.”
잃어버린 20대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밤낮없이 뛰었다. 첫 직장으로 해운공사(한진해운의 전신)에 들어갔는데 무역 일을 하려고 사표를 던졌다. 30여 통의 이력서를 썼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서른둘의 나이에 다시 신입사원이 될 수도 없어 택한 곳이 미국 유통업체 JC 페니. 그는 여기서 신발과 핸드백을 구매하는 일에 수완을 발휘했다. 그 결과 37세의 나이에 신발제조업체 (주)화승의 수출 이사로 스카우트됐다.
이리저리 회사를 옮기며 직급이 몇 단계 뛰기도 했지만 실패도 많았다. 품질 점검을 소홀히 한 채 수출한 플라스틱 헬기 장난감의 고장 난 와이어를 고쳐보려고 추운 겨울날 미국 시카고의 한 장난감 회사 사장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화승의 최연소 임원 시절 대량 제작한 수출용 ET 인형을 저작권 시비에 걸려 몽땅 청계천 노점에 풀어놓기도 했다. 이 일로 회사에 60만 달러의 손실을 입히고 1984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사 자리에서 밀려난 뒤 직접 무역회사(대운무역)를 차렸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절반 이상이 실패담입니다. 휠라코리아 사장이 되기 전까지는 여느 샐러리맨과 다를 게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잇따른 실패에도 결코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회사를 세웠지만 뚜렷한 비즈니스 모델도, 돈도 없었다. “솔직히 있는 거라곤 입뿐이었다”고 회고하는 윤 회장은 JC 페니 근무 시절 안면을 튼 사람부터 만나면서 죽기살기로 덤볐다. 직원 넷이 장난감부터 신발, 프린터 리본, 전선에 이르기까지 돈이 될 만한 것은 전부 취급했다. 이 시절 윤 회장은 수출 비중이 큰 신발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고, 이것이 휠라와 연결고리가 됐다. 의류 중심이었던 휠라에 한국의 신발산업을 접목했고, 여기서 윤 회장의 성공 신화가 시작됐다.
최고 연봉 샐러리맨에서 글로벌 전문경영인으로,
그리고 오너로… 91년 휠라코리아의 CEO로 발탁된 그는 철저한 현지화 전략으로 휠라코리아를 전 세계 27개 휠라 지사 중 가장 알짜로 키웠다. 연평균 30%대의 매출 신장률로 전 세계 휠라 매출 중 10%를 휠라코리아가 일으키며 윤 회장은 재계의 신화 제조기로 불리기 시작했다. 휠라의 엔리코 프레시 전 회장이 “휠라는 이탈리아에서 탄생했지만 성장은 한국에서 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윤 회장은 신바람이 나서 세계를 무대로 뛰었다. 당시 대한항공 마일리지가 300만㎞로 대한항공 사상 두 번째로 많았다고.
“휠라는 브랜드 파워도 있었지만 한국인이 좋아하는 디자인과 실용적인 제품을 자체 개발하고, 다른 브랜드와 달리 동남아에서 만들어 들여오지 않고 국내 생산을 고집함으로써 제품의 질을 높인 결과입니다.”
93년 휠라여자오픈골프대회를 시작으로 벌인 공격적인 스포츠 마케팅도 주효했다. 한국에서 벌어들인 이윤을 한국에 환원하자는 윤 회장의 뜻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휠라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북한 대표팀을 지원해 기업 이미지를 높였다. 2003년 6월 휠라USA와 함께 이탈리아 본사를 공동 인수하는 데 성공한 윤 회장은 마침내 올해 1월 휠라코리아의 지분을 100% 인수했다.
지사 경영자가 본사로부터 회사를 사들인 것으로 이른바 내부경영자인수(MBO ·Manage-ment Buy-Out) 방식. 휠라코리아의 지주회사인 SBI의 최대 주주인 미국계 투자회사 서버러스가 인수를 먼저 제의해왔으며, 윤 회장이 장고 끝에 결단을 내렸다.
“투자회사가 먼저 계약서를 써준 뒤 인수자금을 마련하도록 한 것은 이례적이지요. 아마 ‘진 윤(Gene Yoon; 윤 회장의 영문 이름)’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윤 회장 자신부터 그동안 모은 전 재산 68억원을 올인했다. 다른 경영진도 출자하고 우리사주, 사모(私募)자금 조달, 주식공모, 은행 대출 등을 동원해 인수자금(총 인수금액 1억2,700만 달러 중 실제 지급금액은 이미 지급한 향후 로열티 등을 뺀 8,000만 달러)을 마련했다.
이로써 91년 설립 당시 100% 외국계 회사였던 휠라코리아는 국내 기업으로 거듭났다. 그동안 휠라코리아가 번 돈 중 매년 200억원 이상이 국제 광고 분담금과 외국인 주주 배당 등으로 해외로 빠져나갔는데, 이제 이를 마케팅 비용으로 쓰거나 국내 투자자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됐다. ‘휠라’ 브랜드는 계속 쓰는데 로열티는 지사 시절 6.5%보다 낮은 3.5%. 대신 본사로부터 디자인 ·마케팅 ·제품개발 관련 정보를 받는다.
윤 회장은 이제 오너 겸 투자자로 변신했다. 연봉을 20억원에서 5억원으로 줄였고, 자동차도 벤츠에서 체어맨으로 바꿨다.
“이제 우리 직원들이 주주로서 회사 성장에 대한 과실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됐습니다. 그동안 저만 고액 연봉을 받아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직원들도 많은 돈을 벌게 될 겁니다.”
휠라코리아는 2007년 증시 상장을 목표로 잡았다.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의 공모가를 적어도 3만원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것이 윤 회장의 복안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이 착착 진행 중이다. ‘새끼 브랜드(Second Brand)’로 갈수록 커지는 디스카운트 마켓(Discount Market ·중저가 시장)에 진출하는 한편 휠라보다 더 고급스러운 명품 수준의 프리미엄 브랜드도 개발한다. 이미 브랜드 이름도 정했다는데 윤 회장은 영업비밀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선수단 지원을 계기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한 북한 진출도 추진 과제 중 하나다.
“일본과 중국 ·홍콩 ·대만 ·베트남 등 아시아 시장은 휠라 본사보다 우리 휠라코리아가 역사 ·지리 ·정서적으로 더 가깝습니다. 아시아 고객의 정서에 맞는 디자인과 색상으로 파고들면 큰 기회가 될 것입니다.”
윤 회장은 지난 2월 15일 국내 기업으로 거듭난 휠라코리아의 도약을 알리는 ‘JUMP 2005 패션쇼’에 모델로 깜짝 출연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골프 드라이버 티샷으로 패션쇼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면서 공격경영의 시작을 알렸다.
돈은 좇지 말고 와서 붙도록 해야 윤 회장이 스타 CEO요,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갑자기 유명해진 것은 96년 그의 연봉 18억원이 공개되면서부터다. 당시 월급쟁이 사장으로선 최고 연봉으로 국세청에서 발표하는 종합소득세 납세 실적 87위에 올랐다. 최고 경영자들은 흔히 연봉 공개를 꺼린다. 돈 많이 버는 사람에 대한 주변의 질시와 편견이 부담스러워서다. 그러나 윤 회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뒤로 숨지 않는다. 스스로 그만한 돈을 받을 만큼 남보다 열심히 일을 해왔으며, 번 돈을 떳떳하게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봉이 최고 34억원일 때도 있었는데 사실 절반은 세금으로 나갑니다. 나머지 70%는 제가 쓰고, 30%는 남들을 돕는 데 씁니다. 친척들도 돕고요.”
윤 회장은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반(反)부자정서가 옳지 않지만 부자 스스로 그런 인식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고교 친구들 사이에 그의 별명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다. 다들 ‘윤윤수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붙여준 별명이라고.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에게 이제는 그가 도움을 주려고 한다. 이것이 그 스스로 ‘나눔의 경제학’이라고 이름을 붙인 돈 쓰는 방식이다.
“과거 부의 형성 과정을 보면 일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국민이 떨떠름하게 보는 것 아닐까요. 자신이 일군 부를 유지하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의 돈에 대한 철학은 독특하다. 평소 ‘사람이 돈을 좇으면 추해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돈 돈 돈’하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돈은 염두에 두지 말고 열심히 일하면 돈이 그 사람에게 와서 붙는 법입니다.”
윤 회장의 좌우명은 ‘기본에 충실하자’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교훈과 같은 기본 덕목-정직, 성실, 노력을 떠올린다. 자신의 ‘좌절과 실패의 2030시절’을 자주 회상하며 각오를 다지는 그는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한다.
“내가 한국에만 머물렀으면 이렇게 돈을 벌었겠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면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국내 생활에 안주하면서 ‘3D’는 싫다고 하면 누가 밥을 떠먹여 줍니까. 한국인의 노하우를 배우려는 개발도상국이 많아요.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등 기회는 널려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탕주의는 곤란합니다.”
휠라코리아의 ‘등산 경영’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통하는 그에게도 걱정은 있다. 바로 건강이다. 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심장 ·갑상선 ·백내장 등 큰 수술을 다섯 번이나 받았다.
“솔직히 2002년과 2003년에는 체력이 달려 힘들었습니다.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 가슴의 수술 자국을 보이며) 정신력과 운동으로 이겨냈습니다. 이제 혈색도 좋아졌고 골프를 치면 거리도 꽤 나갑니다.”
매주 일요일 골프만으론 부족한 것 같아서 시작한 게 등산이다. 서울고 동창인 윤영달 크라운제과 사장이 권해 주말 산행을 시작했다. 토요일이면 빼놓지 않고 직원들과 어울려 산에 오른다. 1월 3일 시무식도 직원들과 함께 관악산 정상에서 가졌다. 관악산과 청계산 ·수락산 등 서울 근교의 산은 두루 섭렵했으며 어느새 등산 예찬론자가 됐다.
“서너 시간 산을 타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오르내리면서 직원들과 비즈니스 외에도 많은 대화를 나누지요. 건강도 다지고 의사소통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산 아래 목욕탕에서 계급장 떼고 앉아 집안의 대소사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흉허물이 없어지고 한 식구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는 여태 ‘은퇴’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벌여놓은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아서 계속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집에 있다면 답답해서 하루도 못 견딜 겁니다. 바삐 살면서 짬을 내 잠깐 쉬는 데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럴 때는 편한 속옷 차림으로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성공한 샐러리맨으로 꼽지만 정작 자신은 ‘성공’이라는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오늘 사업이 잘 된다고 해서 어디 내일도 잘 되란 법이 있습니까? 성공이라고 믿는 것이 어느 순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성공이란 죽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란 정지해선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계의 중심에 서겠다는 글로벌 기업인의 기업경영 산행은 오늘도 계속된다.
내가 본 윤윤수 회장 |
이완섭 내추럴 하우징·내추럴 바이오테크 회장
윤윤수 회장은 내 고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다. 해방둥이인 그는 태어나자마자 마을을 휩쓴 전염병에 어머니를 잃는 슬픔을 안고 자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돼 고모 손에 외롭고 어렵게 자랐다. 고교 시절 성적이 처지는 동기들 집에서 공부를 도와주며 기숙을 해결하느라 자주 짐을 싸야 했다. 대학도 서울대 의대에 연거푸 낙방하고 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는데, 친구의 부탁으로 대리시험을 치르다 적발돼 무기정학의 고배를 마시며 힘겹게 졸업했다.
그는 이런 어려운 역경을 딛고 연봉 20억원대의 국내 최고 월급쟁이로 우뚝 섰다. 정직과 성실을 모토로 한 그의 역정은 인간 승리라 아니 할 수 없고, 내가 그의 친구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특히 외환위기의 해일이 우리가 땀 흘려 쌓은 것을 쓸어가고 국내에서 외산품 배격 분위기가 팽배할 때 그는 용기있게 나서서 ‘외국 브랜드라도 국내에서 만들면 국산품’이라고 외쳤다. 세계화와 개방경제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그의 주장은 국민의 공감을 얻었다.
그는 편한 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 이제 이뤄놓은 것만으로도 평생을 편안하게 보내고 환갑의 나이에 한발 물러서서 여유를 가질 수도 있으련만 각고의 노력 끝에 유례가 없는 ‘기업인수 사건’을 저질렀다. 세계적 브랜드 휠라를 우리 것, 국산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한 해의 3분의 1을 해외와 비행기에서 보낸다.
그동안 쌓은 경험과 내공에서 나온 자신감을 무기로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명승부를 벌이고 있다. 그런 윤 회장도 자신이 없는 게 있으니 대중 앞에 서면 얼굴이 벌게지고 한참 말을 잇지 못하는 ‘벌벌증’이다. 요즘은 제법 초청강연도 다니며 들을 만하다는 본인 이야기지만, 나는 달변보다 어눌해도 진실을 말하는 ‘윤윤수식 연설’에 점수를 주고 싶다.
그는 참 인간적이다. 외롭고 어렵게 자란지라 불우한 이웃을 돌아보고 어루만지는 따뜻한 가슴이 있다. 자녀 혼사에 있어서도 배경이나 재력보다 실력과 건강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에게서 나는 또 한수 배운다. 이런 그가 최근 몇 년 사이 대수술을 여러 번 받아서 건강이 걱정된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 7시면 출근하는 윤 회장의 대장정은 어디가 결승점인지…. 마라톤이 끝나는 그날까지 건강하길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