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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숙명(宿命)의 그늘 1
계절이 초겨울 길목으로 접어들었다.
엿가락처럼 굽이진 산길. 곤은 이 숲길을 돌고 돌아 어느 고적한 산사(山寺)로 향하는 중이다.
마음 복잡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
어제 인편으로 급히 배달된 하루꼬의 서신을 받았다. 내심 우려하던 일이 실제로 그녀에게 닥친 듯 좋지 않은 느낌이 번져난다.
일본에 와 절을 찾아가기는 처음이다.
유적한 분위기라든가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조망이 매우 빼어나다는 따위를 고마꼬에게 귀가 아프도록 들어서인지 처음 찾는 금천사가 낯선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하루꼬는 금천사 조망대에서 전쟁의 악운이 부디 자신을 피해 가도록 곤과 함께 기망(祈望)할 것이라 했다.
걸음마다 울적함이 솟구쳤지만 우선 하루꼬를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에 빠른 보행으로 산길을 올랐다.
토오쿄오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모든 주요도시가 거의 폐허로 변해 가고 있는 현황인데도 교오또오 만큼은 온전한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상점들은 전쟁을 잊은 것처럼 평온하고, 조선이나 중국등지에서 헐값으로 들여왔거나 노략질해온 고품(古品) 가게들도 여러 곳 문을 열고 있다.
산로 중에 숲으로 가려진 절들이 수없이 눌러앉아 있었다. 이 낡은 절들이 알맹이 없는 조개껍질처럼 보인다.
갖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가운데 곤은 금천사조망대에 다다라 고마꼬가 자랑하던 난간에서 교오또오 시가지를 내려 보았다.
“이상한데. 무엇 잘못 되기라도 하였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필시 그녀에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늦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아니나 다를까 자기 쪽으로 총총히 걸어오는 젊음 부인이 눈에 들어온다. 전통복장으로 단정하게 차려 입는 사십대 초반 아주머니는 일본 어디서나 흔히 대할 수 있는 보편적 아낙의 모습이다.
여인네는 눈이 마주치자 금방 곤을 알아보았다.
“저...실례지만, 혹시 하루꼬양을 기다리시는 가네모도곤상이 아니신지요?”
“그렇습니다. 혹 하루꼬상에게 어려운 사정이라도 생겼는지요?”
“약속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기다리고 계셨군요. 하루꼬의 말대로 좋은 분이 틀림없으시군요.”
“아! 역시 하루꼬에게 힘든 일이 야기되고 말았군요. 이를 어쩌지요?” “그렇답니다. 참, 저는 하루꼬의 집안언니뻘 되는 하야시후미꼬라는 아녀자입니다. 제가 하루꼬를 대신하여 가네모도상을 만나러 나온 데에는 말씀하신대로 하루꼬의 형편이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아낙은 들고 있는 작은 손가방 안에서 편지 한 통을 끄집어냈다.
“이 편지는 하루꼬가 떠나기 직전 눈물범벅으로 적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가네모도상을 대함에 결례된 점이 있더라도 하루꼬를 보아 용서해주십시오.”
여인네는 말하는 도중에 손수건으로 붉게 젖은 눈시울을 훔쳤다.
“하루꼬는 육군의무대 필수요원으로 징집되었답니다. 갑자기 일정이 당겨지는 탓에 가네모도상과의 약속을 본의 아니게 지킬 수 없게 되었지요. 지금쯤은 어딘지 모를 전장으로 배속되기 위해 오오사까역에서 출발하는 군용열차에 탑승해 있을 것입니다.”
아낙은 하루꼬를 가엾어 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사정이 악화되었군요?”
“하루 전만 하여도 하루꼬는 가네모도상을 만나보고 떠나는 줄 알고 매우 격앙되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만, 변경된 일정으로 어쩔 수 없이 약속장소로 나오지 못하게 되었답니다.”
“아!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루꼬는 너무 많이 울어 퉁퉁 부은 얼굴로 집을 나섰지요. 이 편지도 불과 두어 시간 전 하루꼬가 집결지로 향하기 직전에 급히 적은 것을 제가 전해드리고자 부랴부랴 가지고 나온 것이랍니다.”
아낙은 하루꼬의 편지를 합장하듯 손 모아 곤에게 내민다.
곤은 답례하고 묵묵히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낙에게 양해를 구한다음 비켜서서 겉봉을 열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친애(親愛)하는 가네모도상에게!
풀무치오빠!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해요.
먼저 이 말부터 할 수밖에 없군요. 하루꼬의 처지를 부디 이해하고 용서해주어요. 이번만큼은 결코 하루꼬가 철없는 장난으로 오빠를 놀리는 것이 아니랍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갑자기 닥칠 줄이라고는 저도 미처 생각지 못했어요. 막상 엄습하니 무엇 어찌할 바를 모르겠군요.
오빠! 이미 들어서 아실 테지만, 하루꼬는 천황폐하의 부름을 받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느 전장으로 출전하게 되었답니다.
너무 보고 싶어요.
우리가 만났던 날이 까마득하게 느껴지는군요.
이를 줄 알았으면 오빠를 자주 만났어야 하는 건데...
하루꼬의 나쁜 버릇 때문이에요.
하지만 오빠의 가슴에는 언제나 미찌꼬언니가 차지하고 있었기에 쓸쓸한 하루꼬가 비집고 들어설 빈자리가 없었어요.
언니가 왜 오빠를 바보멍텅구리라 조롱하는지 나는 그 감춰진 까닭을 잘 알지요.
곤은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 물빛 하늘 한 조각을 올려보았다.
처량한 하루꼬의 얼굴이 허공 한편으로 떠다니고 있다.
아! 오빠모습이 자꾸만 앞을 가리기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모르겠군요.
떠나가 전에 오빠의 가슴에 다시 한 번 꼬옥 안겨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정답게 뛰놀았던 부산산사의 추억을 떠올리며 금천사의 오솔길도 거닐고 싶었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얼마나 속상한지 몰라요.
곤이 주저앉는 가슴을 다잡아 하루꼬의 심정을 헤아리며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간다.
하루꼬는 날마다 오빠의 꿈을 꾸었어요. 지난밤에도 저를 반기며 웃어주는 오빠의 모습을 보았지요.
오늘 오빠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한 번 더 주어졌다면...미찌꼬언니에게 기울어 있는 오빠의 마음을 되돌려 다시는 이 하루꼬를 떠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으리라 작정하였어요.
아...! 살면서 지금처럼 내가 가엾고 불쌍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어요.
지난밤 꿈에서 본 오빠의 얄미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였는데 하루꼬 얼굴에는 눈물만 출렁거렸어요.
“오! 가엾은 하루꼬야!”
곤은 저도 몰래 번져 나는 눈물을 아낙에게도 감추지 않았다.
오빠는 하루꼬의 작은 가슴에서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었어요. 아마 바보같은 오빠만 모르고 있었지만요.
아! 오빠가 저를 기다리고 있을 교오또오의 하늘이 오랜만에 활짝 열려있군요.
고집통! 하루꼬를 기다리다 혹 지쳐 죽을까봐 이 편지를 친척 언니에게 부탁하여 전하는 것이에요. 하루꼬가 오빠를 구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아야 해요.
오빠가 저의 편지를 읽고 있을 즈음이면 불쌍한 하루꼬는 아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군용열차 칸에 몸을 내맡기고 있을 테지요.
오빠! 고집쟁이 하루꼬를 부디 잊지 말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오빠가 죽는 그날까지 영원토록 기억해주어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여인은 잊어진 여인이랬어요.
하고픈 이야기가 산처럼 쌓였는데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군요.
작별을 고해야 하는 하루꼬 처지가 참으로 비참하답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히 잘 지내셔요. 하루꼬는 죽어서도 영혼만은 오빠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사요나라.
언제나 풀무치오빠의 가슴에 누운 하루꼬 올림.
곤은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아낙을 돌아보며,
“지금이라도 오오사까로 달려간다면 하루꼬씨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잠시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열차가 그때까지 머물러만 있다면요. 요즈음은 열차가 지연되는 일이 허다하긴 한데요...만약 그렇다면 헌병조장이나 담당군조에게 몇 푼 쥐어주고 사정해 보십시오. 운이 좋으시다면 아마 기대해보셔도 될 것 같기도 하구요.”
아낙이 손수건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마음을 정하셨다면 저를 염두에 두지마시고 서두르십시오.”
“어떻게 감사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저는 희망을 가지고 오오사까역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어서요. 어쩌면 오사까행 급행열차를 타실 수 있을 지도요.”
곤은 아낙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산양처럼 절 아래로 뜀박질하여 내려갔다.
다행이었다. 간발의 차로 막 출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요도가와(淀川)철교를 덜컹거리며 지날 때 폭격으로 부셔진 도시의 몰골이 흉물스레 차창에 내다보인다.
곤은 손에 꼭 쥔 하루꼬의 편지를 몇 번이나 읽어보았다.
하루꼬와 지낸 아름다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빙글빙글 가슴을 어지럽힌다.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을 밀쳐내며 제일 먼저 뛰어내린 곤이다.
눈에 띄는 사람마다 붙들고 군용열차에 관해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군용열차는 이미 한 시간 전쯤 역을 빠져 나간 뒤였다. 환송 나온 사람들도 거의 흩어져 돌아갔고 일부 사람들만 남아 역사 바깥에서 마른 눈물을 훔치고 있을 뿐이다.
곤은 몸 한가운데 큼직한 구멍이 뻥 뚫린 허탈감을 느꼈다.
“오! 하루꼬야! 가엾게도 그 혹렬한 열차에 실려 끌려가고 말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주정뱅이처럼 실컷 취해보고 싶었다.
하루꼬의 체취와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아! 그렇지.”
문득 한 곳이 생각났다. 지난 번 만났을 때 하루꼬가 주변지기들과 어울리면 가끔 들린다는 어느 술집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있는 모모다로오라는 술집이다.
찾아가니 커다란 건물의 틈새를 비집고 꾸며낸 소담스런 가게였다.
하루꼬에게 들어 알지만 여러 가지 안주류를 구워 파는 것이 특색인 꼬치구이 전문집이다.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하루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테이블 군데군데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곤은 구석진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오리살점을 대나무꼬챙이에 꿰어 구워 놓은 것 서넛에다, 하루꼬와 주거니 받거니 마셔본 경험이 있던 일본청주를 한잔 주문했다.
모여 앉은 사람들 대화는 자기들이 먼저 시작하여 치르고 있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관심 밖이었고 울적한 마음을 달래 그저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매우 완고해 보이는 어느 노신사가 곤에게 비꼬는 투로 말을 던져왔다.
“호오! 여기 대단한 젊은이가 앉아 계시네. 휴가 나온 군인도 아닌 것 같은데.”
곤은 시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 묵묵부답하였다.
“무엇하는 젊은인지 몰라도 지금이 어느 때라고 낮부터 술타령인가?” “죄송합니다. 어쩌다보니 좋지 않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불쾌하게 보이신다니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노신사는 대단한 그 무엇이라도 건진 것처럼 곤을 물고 늘어졌다.
“자네 무엇 하는 사람인가? 신분부터 좀 밝혀보게.”
“죄송합니다.”
곤은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다 마시지도 않은 술값을 치르고 얼른 술집을 나와 버렸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한 남자가 곤을 뒤따라 나왔는데,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는 자리에 홀로 앉아 남몰래 주변을 자주 살피던 그 사람이다.
은근슬쩍 다가와 곤과 어깨를 붙여 걸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젊은이! 잠깐 좀 보세나. 자네는 조선사람이 분명하지?”
“네에?”
“감추려 하지 말게. 젊은이가 비록 일본말을 유창히 한다지만 어딘가 달라. 그리고 동질감이라는 것은 아무리 낯선 곳에서 여타(餘他)의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마음을 조금만 쏟아 기울이면 금방 같은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네. 경계하지 말게나. 나도 같은 조선사람일세.”
곤을 불러 세운 이 남자는 오오사까주재 모 신문사 정치사회부에 근무하는 남도삼이라는 사람으로, 그의 일본 명은 미나미무라도오산이며 매우 드물게 일본 언론계에 발탁된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곤은 이상한 일에 연루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에게 무슨 용건이라도 계신지요?”
“조용한 곳에 가서 나와 몇 마디 좀 나누어주게나. 나는 직업이 기자이니 취재를 빌미 삼는다면 누구의 눈에도 자연스럽게 보일 것일세.”
동족이라는 남자의 말을 일언지하로 뿌리칠 수 없다.
남자는 곤을 근처 공원의 조용한 벤치로 데려가 앉히며,
“나는 남도삼이라는 신문기자일세.”
“네에. 저는 김 곤이라고 합니다.”
“자네 나를 좀 도와주게.”
“네엣? 무슨 급한 일이신지 몰라도 저는 남을 도울만한 그런 처지가 못 됩니다.”
“그런 말 말게. 나는 사람을 보면 단번에 됨됨이를 파악한다네. 젊은이가 나를 도와줄 적임자임을 즉시 알아차렸네.”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완고한 일본인 노인의 질매(叱罵)에 굳이 변명치 않고 또 비굴하게 모면하려는 기색 없이 자리를 큰 모습으로 털고 일어나는 것은 내면에 범치 않은 인품이 갖추어졌다는 것일세.”
“저에게는 참도 어려운 말씀으로 들립니다.”
“분명 위험한 일이지만 남의 시선만 잘 피한다면 어려운 일은 아닐세.”
이 생면부지의 남자가 곤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정은 자기를 대신해 누구를 만나 무엇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남자가 말하는 대략의 이야기는,
남도삼은 일본형사들이 살인자로 지목하여 추적하고 있는 이정기라는 조선인열사(烈士)를 급히 만나야할 곡절이 있다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남자가 말하는 이정기협객은 어떤 도움 없이 단신 일본으로 건너와 조춘보라는 매국노를 단칼에 처단한 의협지사라 하였다.
“현재 오갈 데 없이 일경의 추적에 쫓기는 위험한 처지로 상해로 가기위해 은신중이신데, 다행히 임시정부가 비밀리에 구조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네.”
남도삼은 이협객을 도와주는 중간 연결책이었다.
문제는 사냥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 오오사까경찰의 노련한 형사 고지마류우세이인데 이 자가 항상 남도삼을 의심하여 자나 깨나 뒤를 캐고 다닌다는 것이다.
설명에 의하면,
이정기협객이 척결한 조춘보는 조선사람이면 누가 봐도 민족의 반역자이자 흉적(凶賊)이었다.
들어내 놓고 일제와의 우호를 떠들고 다니던 자로써, 아무리 나라가 망하고 없다하나 조선인으로써의 수치도 모르는 매국노임에 분명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영달만을 위해 일제에 의지하여 지내던 자로, 자신의 눈에 거슬리면 동족까지 누명을 씌워 팔아먹는 못된 자였다.
악성고리대금업을 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동족을 더욱 고난에 빠트렸고, 도굴한 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를 남몰래 나라밖으로 유출시켜 치부했다.
그가 이번에도 도적질한 민족의 유산을 밀거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자 이협객이 적기로 여겨 단신 뒤따라 처단한 것이라 한다.
조춘보가 게이샤(일본의 전통기생)를 끼고 노는 밤중의 방심한 틈을 노려 기어이 가슴에 단검을 꽂았던 것이다.
곤이 내막을 듣고 보니, 이 자는 민족의 미래로 보아 분명 백번천번 죽임을 당해 마땅한 자임이 분명하였다.
이 사건은 오오사까의 화재거리로 신문사마다 대서특필되었고 많은 일인들의 관심도 끌었다. 곤도 오다의 저택에서 이 기사를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협객은 당분간의 은신처와 상해로 가기위한 약간의 경비를 지원받기 위해 남도삼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란다.
이협객에게 남몰래 도움을 주려는 남도삼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일경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움직인다지만 행동에 제약이 따랐다.
지금까지의 공든 탑이 모두 허물어진다 해도 사명으로 각오한 일이니 두렵지 않으나, 만에 하나 자신의 부주의로 이지사의 신상에 화가 미치면 더 끔찍하다는 것이다.
남도삼이 여러 어려운 일들을 숨어 하고 있지만, 일과 직업에 대해 나름대로의 긍지와 흡족함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에 솔선하여 나서는 것은 뜻을 지닌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남도삼에게도 모질게 어려웠던 과거가 있었고 누구 못지않은 굶주림도 뼈저리게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영달에 매달리는 것보다 민족의 장래를 지켜보는 고뇌가 그의 가슴을 더 매질했다.
나라 잃은 처지에 가져봐야 무엇을 더 가질 것이며 성공해본들 그 위상이 어디까지이랴 하며.
목수 일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던 시절도 잠시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있는 것 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았고 끼니를 다 챙겨 먹는 날보다 건너뛰는 날이 훨씬 많았다.
시력장애를 가진 남도삼의 아버지는 갈수록 빛을 잃어 이 때문에 어느 날부터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고,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어머니마저 결국 집을 나가자 실의에 빠진 아버지까지 실족하여 세상을 떠났다.
홀로된 남도삼에게 남겨진 고통이란 슬프고 외롭다 못해 세상이 모두 끝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었다.
가슴 파내는 게 또 하나 있다면 배움의 열망을 접어야하는 아픔이다. 언덕배기에 홀로 앉아 시들고 초라한 눈빛으로 얼마나 울었던가!
아직 세상 어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에 죽도록 세상을 원망했던 것이다.
사람이 잠잘 곳만 있고 세끼 밥만 잘 먹으면 되는 것인데 배운다는 것이 무엇 대단한 것이기에 가슴을 찍어내는 것일까!
이런 남도삼에게 글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었다.
남몰래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며 야학을 운영하고 있던 최상구라는 사람인데, 남도삼은 주린 배 움켜쥐고 이를 악다물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드디어 주경야독 상아탑을 향한 어려운 가시밭길을 헤쳐 일본에서도 손꼽는 명문대 영문학부를 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고생 끝에 이룬 금자탑이었지만 남도삼은 자신이 조선사람 임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민족을 등져 일제의 창이나 칼이 되었던 다른 지식인들에 비해 확고한 민족성을 지닌 의지였다.
내막을 알고 난 곤은 흔쾌히 승낙했다.
“말씀을 다 듣고 나니 제가 정말 부끄럽습니다. 할일을 가르쳐 주십시오.”
맡길 일을 설명하면서 남기자는 조금은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제발 조심하여야 하네. 지금도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네. 내가 알아서 따돌릴 것이니 이 일을 잘 부탁함세. 시간이 없다네. 늦어지면 이협객이 초조할 것일세. 일본이 쓰러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모두 어엿하게 만날 수 있음을 확신하네.”
“저도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목숨을 걸어도 실수는 않습니다.”
곤은 즉시 남도삼이 일러준 장소로 향했다.
과연 남도삼이 말한 곳에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었고 인상착의와 암어(暗語)도 척 맞았다.
한적한 해변의 큰 나무들이 밀집된 움푹한 틈에서 두 사람 뜻을 같이하는 감격의 말을 주고받았다.
“오! 남기자를 대신해서 위험한 일을 감사하게도 젊은이가?”
“협객님! 그동안 어렵게 지내시느라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었겠습니다.”
“나를 몰래 만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위험한 일인데도 젊은이가 흔쾌히 맡아주다니 고맙기 그지없네.”
“그분은 감시의 눈길을 피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었습니다. 본인의 위험보다 협객님의 안전을 더 우려하였지요.”
“남기자의 품성으로는 그럴 것일세.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네. 이름이나마 가르쳐주시지 않겠는가?”
“저는 김 곤이라고 합니다. 받으십시오. 이것을 전해드리고자 대신 왔습니다.”
“고맙네. 일본이 머잖아 항복하고 말 것이니 그때 떳떳이 나타나 보답해드리겠네.”
“당연한 일에 보답이라니요.”
이 모든 장면을 바위에 붙은 패각충처럼 숨어 일일이 염탐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제삼의 남자는 고지마류우세이형사다.
어떻게 낌새를 맡았는지 몰라도 남기자가 보이지 않자 다소 실망해하는 표정이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촌보도 움직이지 마라.”
권총을 손에든 고지마의 출현에 이협객의 얼굴빛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이다.
“나는 오오사까 경찰서에 근무하는 고지마류우세이형사다. 두 사람에게 몇 가지 조사할 것이 있으니 잠시 협조하여 서까지 동행해주기 바란다.”
이협객이 곤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저자를 맡아 기회를 만들 것이니 젊은이는 우리의 관계를 처음부터 없어 모르던 일로 하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시게. 자네의 호의는 살아평생 잊지 않겠네.”
“협객님은 남아 어쩌시려고요?”
“나는 일본으로 건너올 때부터 이미 나를 버렸던 사람일세. 내 걱정은 말게. 정의가 살아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분명 다시 만날 것일세.”
곤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니 됩니다. 제가 저자를 맡을 것이니 협객님께서 먼저 몸을 피하십시오. 여의치 않으면 별것 아닌 몸 기꺼이 여기서 던지겠습니다.”
“조센징들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은가. 둘 다 뒤 돌아서서 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어라. 내 말에 복종치 않으면 가차 없이 이 자리에서 발포하여 즉결처분할 것이다.”
고지마가 불안감을 느꼈는지 위협의 강도를 높여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태세다.
그의 위협에도 이협객은 두려움 없이 성큼 앞으로 나서며,
“형사님께서 무엇인가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드릴 것이니 우선 그 총부터 치워주셨으면 합니다.”
이협객이 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딴청을 피우며 바람을 잡는다.
“이놈이!”
재차 고지마의 위협에도 이협객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사님!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고향의 이야기를 캐묻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가슴에 총구를 들이대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내막부터 알고 난 다음 서로 동행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살인을 저질렀기에 이미 오래전에 수배가 떨어졌다. 남도삼과의 관계도 알고 있다. 그자는 대일본제국의 적이 될 자임을 처음부터 의심했었다. 더 이상 나를 조롱하려들면 서까지 갈 것 없이 이 자리에서 바로 쏘아 죽일 것이다. 그럼으로 폐하와 일본을 배반하는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너희 조센징들에게 본보기로 삼겠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면 이런저런 핑계도 소용없는 것이다.
이협객이 자기를 도와준 청년만이라 구하기 위해 죽기를 작정한 듯 대들었다.
“그렇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그자는 조선인으로 보아 죽어 마땅한 자이다. 그자는 조선백성의 피를 팔아 자신만의 부를 누린 자로서, 천만번 죽여도 시원찮은 조선백성의 도적이다. 내가 그자를 우리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것이 어찌 당신네 일본인들에게 죄가 되어 끌려가야한단 말인가?”
이협객은 고지마의 총부리 앞에 당당하게 가슴 펴 항거했다.
“이놈이 정말 죽기로 작정했구나.”
“한 마디만 더 하겠다. 이 젊은이는 나와 하등 무관한 사람으로 내가 조금의 도움을 구하고자 만난 것뿐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젊은이에게 인생을 망치는 엉뚱한 죄목을 씌워 추궁치 않기 바란다.”
“모두 조사과정에 알게 될 것이다. 재차 내 경고를 무시하면 예고한 대로 이 자리에서 사살하겠다.”
“나는 어찌되어도 상관없다. 나로 인해 무고한 젊은이가 피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을 뿐이다. 이 젊은이를 나의 일에 연관시켜 아까운 젊음을 희생시키는 일이 없도록 배려해 주면 황천에서도 감사할 것이다.”
고지마가 오히려 이지사의 결의에 질려 한 걸음 물러섰다.
“예키, 이놈!”
이정기지사가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대처하자 다급해진 고지마가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기려는 위험천만의 순간, 곤이 번개처럼 몸을 날린 것도 바로 그 찰나다.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순식간에 달려들어 고지마의 손을 비틀고 목을 휘감아 제압하였다.
“지사님께서는 아무 걱정을 마십시오. 여기 일을 저에게 맡겨두시고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지사는 순식간에 사태를 역전시켜버린 동족젊은이의 날렵한 행동에 잠시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서,
“이보시게 젊은이! 나는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를 못하나 만약 내가 떠난 다음 뒷일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시는가? 그것을 알기 전에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것일세. 나의 일에 자꾸 애꿎은 동포가 관련되니 참으로 우려되지 않을 수가 없네.”
곤은 이정기지사의 의연함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면 사태가 더 복잡해집니다. 협객님께서는 염려마시고 일신에 또 다른 위험이 닥치기 전에 어서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저는 후환이 없도록 이 자를 죽여 시신을 몰래 처리한 후 이곳을 벗어날 것입니다.”
강철 같은 곤의 손아귀에 붙잡힌 고지마는 마치 올가미에 걸린 작은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했다.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벌써 호흡장애로 입술이 새파랗게 변색되어 있었다.
곤이 사정 두지 않고 고지마의 목을 꺾어 목숨을 빼앗으려하자 이지사가 급히 곤을 만류하며,
“여보시게. 잠시 내 말부터 좀 들어주게. 우선 그 일본인형사가 당장에 질식할 것 같으니 숨통부터 좀 트여주게나.”
“곧 죽을 자인데 인정스런 말씀은 다 무엇이신지요?”
“내 간곡히 바라건대 부디 그 사람을 놓아 살려주시게.”
“제가 아둔하여 지사님의 말뜻을 아직 알아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이 계시다면 마음을 열어 따르겠습니다.”
곤은 의아하여 반문해 물었다.
“내 비록 민족의 이름으로 조춘보를 처단하였지만, 남의 나라에 숨어와 저지른 살인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네. 조춘보가 매국노이기는 하지만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던 가족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편치 않은 것도 사실일세. 저 일본인 형사도 자신의 직분을 다 하고자 하는 일인데 어찌 내 한 목숨 살기위해 남의 목숨 거두기를 바라겠는가. 개인적이라면 저 사람과 우리가 무슨 원한이 있겠나.”
“하지만 이 자를 놓아주는 즉시로 지사께서는 위험에 처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일세. 차라리 잡혀가 세상에 내놓고 내 뜻과 의지를 밝히려내. 간청하건대 젊은이는 나로 인한 쓸데없는 살인을 제발 거두어주시게.”
곤은 망설이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
“젊은이! 그 일본인형사를 쳐다보며 살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여 그를 부디 살려주게나. 내가 대신 죽더라도 원망치 않을 것이며 젊은이의 은혜는 저승에서라도 잊지 않을 것일세.”
이지사의 대범함에 곤은 감동하였다.
“광명정대한 협객님의 넓은 뜻을 어찌 저 같은 자가 감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사님 같으신 분을 제 생애에 대면한 이 인연만으로도 저의 삶에 영광일 따름입니다.”
상황을 파악한 고지마형사도 이지사의 의연함에 숙연한 표정이다.
곤은 고지마를 손아귀에서 풀어주며,
“잘 들었을 것이오. 당신의 목숨은 바로 이분 지사님께서 살려주시는 것이오. 그러나 일의 옳고 그름이 분명치 않을 때는 맹세코 당신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오. 그때 가서 나의 수단이 가혹하다고 원망치 마시길 바라오.”
고지마도 사람의 말귀를 통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또한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나는 비록 짧은 시간이나마 오늘 이 자리에서 깨달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부끄럽게도 이제야 세상살이의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듣고서 오늘에야 내 가족의 소중함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고지마의 얼굴에 한 줄기 감명이 일고 있다.
“평생 가슴의 지표로 여겼던 가치관이 흔들리고 나름대로 애써 달려온 삶의 흔적이 모래탑처럼 부질없게도 여겨집니다. 이제부터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감오(感悟)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고지마는 이지사를 가리키며,
“저분의 문제는 본인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도울 것입니다. 수형(受刑)과정이 공정하도록 조력할 것입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남에게 내 마음 있는 그대로를 보였습니다.”
살의가 비켜갔을 때 곤의 모습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눈이 있었다.
그림자!
곤의 주변에서 한동안 사라졌던 그림자가 또다시 출현을 시작한 것이다.
심심풀이로 풍걸
첫댓글 헉! 누굴까😳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눈"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편을 기대 합니다🙏🙏
매국노 조춘보를 처단한 협객 이지사가
지금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이나라 개판 천국에 언 놈부터 처단 할까!
상상만 해도 오싹!
등장 인물들의 캐릭터를 통해
작가의 깊이 있는 내면 세계를 엿볼수 있는 훌륭한 작품👍
정의의 칼끝에 맺혀 있는 영롱한 이슬 한방울💧💧
두근대는 가슴으로 단숨에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멋진 풍걸님
정말 대~단 하십니다👍
진짜 달래 여사님도 엉성한 잡글 읽으시는 모양이네용.(너무 띄워놓고 간질이지 마삼.) 감사감사. (글고 유럽왕가의 작위에는 오등작이 있는데 첫째가 공작, 다음이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순위랍니당.)
곤으로 살러낸 풍걸님
고맙습니다
또 기다림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ok일베님의 심심풀이로 올리는 글인데 잠시라도 유유자적 되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