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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묵상글 들 (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 우상이 아닌 모상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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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상이 아닌 모상들
오늘 우리가 듣는 콜로새서는 그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말해 주는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모상이시고,
피조물과의 관계에서는 모든 피조물의 맏이,
교회의 머리, 만물의 으뜸이라고 얘기됩니다.
우선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함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모상이라는 뜻이며
우상이 아니라 모상이라는 뜻입니다.
우상은 하느님을 가리거나 오인하게 하는 것이라면
모상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제대로 알게 하는 존재지요.
인간으로 치면 성인 그중에서도 세례자 요한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지 않고 가리켰으며,
자신은 말씀이신 주님의 소리라고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자기는 그분의 신발끈을 맬 자격조차 없을 정도로 그분은 크셔야 하고,
커지시는 만큼 자기는 작아져야 한다고 하며 주님을 옳게 증언하였지요.
그런데 우리 교리는 세례자 요한 뿐 아니라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이라고 합니다.
원래는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씀인데
그러나 실제의 경우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천사와 성인과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게 되지만 어떤 사람은
악마와 같아 그 사람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통해서'라는 말을 돋을새김을 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고",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고, 그분을 통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잇는 길이요 중재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모상이자 중재이신 것처럼
우리도 진정 하느님의 모상답기만 하면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면
몸에서 잘려 나가지 않는 한 다시 말해서
포도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한 우리는 한 몸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마련이지요.
이것은 마치 모세 혈관이 대동맥/대정맥을 통해 심장과 연결되는 것과
같고 그래서 손 끝의 피가 머리까지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단, 모세 혈관이 대동맥/대정맥과 연결되어 있고 끊어져 있지만 않다면.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깊이 묵상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라는 소영광송을
매일 미사에서 바칠 때마다 그리스도론적인 찬미를 하느님께 드립시다.
그리고 한 몸을 이루는 같은 지체들끼리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와 연합을
이루어야 함을 오늘 그리스도 찬가를 묵상하며 다시 한번 마음에 새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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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 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단식을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이 경험한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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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 그레고리오 축일)
오늘은 성 그레고리오 축일입니다, 오늘은 축일을 맞아 <복음> 강론 대신 성 그레고리오에 대해 간략히 보고자 합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540경~604)는 고대에서 중세로의 전환기에 영성 생활을 포함하여 다방면에서 서방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역대 교황 중에서 교황 레오 1세(4세기 말~461)와 함께 그레고리오 이 두 분만을 대(大)교황으로 부릅니다. 또한, 그는 암브로시오(339~397), 히에로니모(347/48~419/20), 아우구스티노(354~430)와 더불어 서방교회의 4대 교부로 칭해지며, 서방교회의 마지막 교부이기도 합니다.
그는 부유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로마에서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부친의 권유로 570년에 정계에 입문하고 573년경에 로마 지방장관에 임명되었스빈다. 575년쯤 세속생활을 청산하고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가문의 대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조하고 몇몇 지인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했으며, 시칠리아 섬에도 6개의 수도원을 설립했습니다.
586년에 로마로 귀환하여 자신의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원장 직분을 맡았고,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첫 번째 수도자출신 교황이 되었으며, 자신을 성 아우구스티노에게서 빌려 와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칭했습니다. 또 약 400명의 베네딕도 수도승들을 북유럽 선교를 위해 보냈으며, 그 중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 케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례 개혁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동방교회와 차별화된 미사경문과 성사예식을 마련했고, 전승에 따르면, 11세기에 완성된 「그레고리오 성사 예식서」를 처음 집필하기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또 9세기경 로마 성가와 갈리아 성가를 집대성해 만든 단성무반주 성가도 그가 표준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해서, 이를 그의 이름을 붙여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명명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적 관심사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최초의 교황으로 잘 알려졌으며, 물질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던 이탈리아 교회를 개혁하고자 애썼으며, 대외적으로 아리우스주의(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일체임을 부인하는 이단)를 내세우던 롬바르드족에게 가톨릭 신앙을 보급했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욥기 주해서인 [윤리서], 사목자의 자질을 다룬 [사목 규범], 미사 강론을 모은 [에제키엘서 강론집]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 성인들의 행적을 기록한 [대화록]이 있습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제1-3권은 이탈리아의 여러 성인들을 다루며, 제4권에서는 앞의 성인들을 다시 등장시켜 종말론적인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제2권은 베네딕도의 생애만 다루고 있는데, 그를 1-3권 가운데 중심으로 우뚝 세우고 그 주변에 다른 이탈리아 성인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이는 제4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권에서 그는 베네딕도의 전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을 46개의 기적들을 토대로 엮어 놓았습니다. 그는 베네딕도의 성인전을 통해, 에집트에는 성 안토니오가 있고 갈리아에는 마르티노가 있듯이 이탈리아에는 베네딕도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으며, 그를 수도승들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네딕도와 그의 규칙서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고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베네딕도회에서는 이날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읽은 그분의 소감을 새겨봅니다.
“하느님의 사람 베네딕도는 뛰어난 분별력과 명쾌한 표현으로 규칙서를 저술하였다. 그분의 성품과 생활을 더 자세히 알려는 사람은 그분이 행동으로 가르친 모든 내용을 이 규칙서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신이 직접 생활하셨던 것과는 다른 그 어떤 것도 가르칠 수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38)
주님!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의 새 부대이오니, 당신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취해, 기뻐 흥겨오리이다. 온통 젖어 당신 향기 품으오리이다.
제 삶이 당신의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를 담아 건네오리이다.
남녘땅에서도 북녘 땅에서도,
곳곳을 적시는 아리랑의 노래 소리 가득 채운 사랑의 술잔을 쳐들게 하소서!
온 겨레가 화들짝 달구어지고, 신랑을 맞이한 혼인잔치가 되게 하소서!
사랑과 진리와 생명이 피어오르고, 정의와 평화가 넘실거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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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예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들린 이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소박한 잔치를 열어서 축하해 주곤 했는데 그분도 기꺼이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엄숙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온 자신들의 전통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오던 당시 조선에서는 조상의 기일이나 명절 때에 나무패에 조상의 이름을 적은 신주(神主)를 제사상에 세워놓고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는 중국에서의 조상제사를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금지한 교황 칙서(클레멘스의 Ex illa die, 1715)에 따라서 조상제사금지령을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진산의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한 1791년에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하여, 제사를 드리는 대신에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 방식으로 모친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모친상을 치루었습니다. 그러자 반대 여론이 들끓는 바람에 두 사람은 사형당했고, 특히 윤지충은 이종사촌인 정약용의 권유로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바 있었으므로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선비들은 이 사건을 그들의 정적이었던 남인 선비들을 제거하는 빌미로 삼아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이에 따라 덩달아서 반국가집단으로 낙인찍힌 천주교 신자들은 전국적으로 한 세기 동안이나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상제사 금지령과 진산 사건 이후 천여 명에 이르렀던 양반 출신 신자들은 배교하고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의 제사 풍습은 양반층의 특권이었으므로, 중인 이하 신분의 백성 가운데에서는 신자들이 더욱 늘었습니다. 즉, 조선조 양반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상 제사는 주자의 성리학에 의한 규범이었지만, 공자 이전 시대에 우리 겨레가 지켜온 본래의 전통은 신분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이 모여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고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 즉 천손임을 상기하며 그에 따른 도리를 지키기로 다짐하는 제천의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교우촌에서 가족들이 모여서 바친 매일의 기도는 민족 본연의 전통에 따라 천손의식(天孫意識)과 제천의식(祭天儀式)을 회복시키는 종교활동이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일이야말로 본연의 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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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분을 만났습니다. 문제는 이제 하늘나라에 가셔서 못다 한 효도를 더는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후회하지 않는 효도를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지만, 만약 되돌아가도 똑같이 불효의 삶을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불효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원하는 최고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자녀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자녀가 과거를 후회하며 지금을 힘들게 살고 있다면 이는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불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자신의 불효를 탓하며 힘들게 사는 삶 자체가 불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다면 스스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원하는 모습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철학자 미키 기요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해줄 수 있겠는가?”
지금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후회하는 과거의 삶이 아닌, 행복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들고 오셨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옛 계약을 집어 던져버리고 새 계약을 취해야 옳습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지금 당장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옛 계약에 여전히 매여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냐면서 꾸짖음의 말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만큼 구원에 가까워졌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기뻐 즐기는 혼인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먹고 마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과거의 율법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혼인 잔치에 왔지만 비통한 표정을 짓고 단식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옛 계약을 고집하는 자들은 새로운 창조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금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지금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효도가 없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행복한 삶을 위한 노력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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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자녀들이 없이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다(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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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기.
예전에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신부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힘들지 않으세요? 정말로 대단하세요.”
요즘에는 이런 말을 전혀 들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매님이 자기 딸 걱정을 하며 말씀해주신 것이 기억납니다.
의대에 들어간 딸은 정말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전문의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전문의가 되고 나서는 ‘결혼은 꼭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바뀐 것입니다. ‘조건이 맞고 때가 되면 하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혼자 살지.’라는 마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누구는 손주 보느라 시간이 없다는데, 자신은 손주 한번 보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시대가 생각 자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독신이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함께의 소중함은 혼자의 삶보다 분명히 큽니다.
실제로 혼자 사시는 분은 자주 공허함과 고독감을 많이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혼자 살더라도 함께 하겠다는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주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그 ‘함께’를 절대 버려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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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입니다. 590년에 교황으로 뽑힌 그레고리오 성인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한 최초의 교황입니다.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봉사하는 특전’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레고리오 성가’도 교황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듯이, 그레고리오 교황은 전례 음악뿐 아니라 신앙과 윤리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습니다. 교회에 그레고리오 교황이 있다면 우리 역사에는 ‘세종대왕’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지금 우리가 쉽게 쓰고 있는 ‘한글’을 창제하였습니다. 한글은 목에서 내는 소리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입술, 이, 혀, 목구멍의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소리글자인 한글은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까지 모두 적을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른데 중국의 문자를 쓰면서 생기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한문을 배울 수 없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당시 집현전의 학자들과 대신들의 반대로 반포되지 못할 뻔했습니다. 반대를 했던 대신 중에 최만리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습니다. 대국인 중국의 문자인 한문을 대신해서 우리의 문자를 만들면 대국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대국의 비위를 건들면 국가적인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간악한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적을 수 있게 되면 국가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법을 알면 법을 이용해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가진 나라는 모두 오랑캐인데 우리도 우리의 문자를 가지면 오랑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은 글을 모르기 때문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백성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백성이 글을 알면 억울함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본적으로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신뢰하였고, 사랑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모두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면 나라의 품격이 높아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글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문자입니다. 그 만들어진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문자입니다.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문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대왕의 마음이 담긴 문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 역시 시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치와 의미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면,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산다면 그런 사람은 늘 새 포도주이고, 새 부대입니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면, 말은 많지만 행동하지 않는다면, 타성에 젖어 변화를 두려워한다면 그런 사람은 언제나 낡은 포도주이며, 낡은 부대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억누르고,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신앙은 우리 안에 맺힌 것들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냈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았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가지고 제자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에게는 신앙은 삶을 구속하고,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경우도 미리 판단하고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절친했던 친구가 갈라지는 경우도 충분히 듣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남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참된 신앙은 이해와 용서, 인내와 관용이라는 그릇에 담아야만 더욱 빛을 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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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파스카의 꽃’같은 삶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참 매력적이고 멋진 삶입니다.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놀라운 삶입니다.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아니라 늘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참으로 온전히 하느님 주신 당신 모상대로의 참 나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그레고리오 제64대 교황 학자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 4대 교부들중 한분이요, 성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 대 그레고리오입니다. 과연 큰 분이자 불가사의의 인물로 그분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떻게 한 인물안에 이런 놀라운 능력이 담겨있는 지 참 놀랍기만 합니다. 사후 즉시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즉시 성인으로 시성된 교황입니다.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그 각별한 인연으로 오늘 기념일이 아닌 축일로 지냅니다. 이 교황이 지은 ‘베네딕도 전기’가 유명합니다. 교황이 얼마나 베네딕도 성인을 흠모하고 닮으려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지 않았다면 평생 그토록 사랑했던 수도생활에 몰입했을 교황입니다. 너무나 배울 것이 많은 대 교황이기에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분에 대한 일화들을 소개합니다.
‘그레고리오’는 그리스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라는 뜻으로 중세 작가들은 ‘그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매우 부지런했다.’라고 평합니다. 교황이 탄생되던 때나 활동시기는 로마는 물론 유럽 전체가 대변동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로마는 내우외환으로 시달렸습니다. 교황은 로마와 게르만계, 동방과 서방, 고대와 중세의 경계선에 위치한 참으로 하느님이 보내 주신 인물이었습니다. 성인의 모친은 실비아 성녀입니다.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풍부한 실무로 지식을 쌓아 놨던 분이며 수도생활을 매우 깊이 사랑한 교황은 첼리안 언덕의 자기 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축하여 안드레아 수도원이라 명명하며 그 안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 너무 엄격한 고행 극기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 건강문제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황은 공식 문서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함으로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섬기는 특전’으로 이해했으며 후임 교황들 역시 즐겨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중세의 교황제도를 확립한 교황은 그대로 팔방미인이라 칭할 정도로 다방면에 능한 대천재였습니다. 정치, 외교, 선교, 영성, 외치와 내치 어느 쪽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병약했지만 강한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를 원활이 수행했습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선교도 교황의 업적입니다.
교황의 업적중 전례 개혁이 손꼽힙니다. 미사시 빵 나눔 전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교황의 창안입니다. 동방교회와는 달리 축일이나 전례력의 변경이 많아져 수많은 기도문이 만들어 집니다. 교황의 전례 분야 업적중 ‘그레고리오 성가’가 유명합니다. 이 바쁜 업무중에도 교황이 집필한 수많은 저술도 정말 불가사의입니다. 욥기 주해, 사목 규범, 대화록, 강론집, 열왕기 상권주해, 4대 복음서 강론집, 아가 강론, 854편의 서간들, 얼마나 부지런한 교황이었는지 이런 교황을 보면 시간없어 못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먼 캔터는 “그는 수수께끼 같은 분으로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행정가이자 능숙하고 지혜로운 외교관이면서 놀라울 정도의 세련됨과 꿈을 지닌 지도자다.”평합니다.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도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대리자로 삼으시어 힘겨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보살피는 관리인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교황 서간에 나옵니다.
빈민들에게의 구호품 배부는 매월 이루어졌습니다. 교황은 식사할 때, 12명의 빈민들을 손님으로 초대해 같이 식사하였으며 그때 사용한 대형식탁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교황은 어느 뒷방에서 가난한 사람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살인자라고 자책하며 수일 동안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604년 선종 수년 전 일기도 얼마나 큰 병고를 겪었는지 충격적입니다.
“열한 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으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 근 2년 동안 나는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틍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604년 3월 12일은 마침내 64세로 파란만장한 참 치열한 하느님의 종으로 살았던 교황의 선종일입니다. 이날은 언제나 사순시기이기에 교황이 주교로 서품 받은 날인 오늘 9월3일을 축일로 지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교황의 생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닮은 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는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삶이 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의 영적 삶입니다. 이래야 꼰대라는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카페 메뉴판에 라떼의 수난 시대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로 변형되어 ‘라떼’가 비웃음을 당하는 요즈음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이는 꼰대가 된다. ‘꼰대’는 나이와 권위를 앞세워 아랫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연장자, 기성세대. 어른, 선생님 등을 풍자한 은어다.
기성세대는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며 젊은이들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했던 노력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알아서 갈 것이다. 대신 통찰력, 포용력, 예견력, 측은지심, 공감, 배려 같은 능력을 배양하는 데 기성세대 스스로 먼저 집중하면 어떤가
언제든지 젊은이들이 아쉬운 게 있어 손을 내밀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꼰대하는 말 대신 어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같다.”(장명숙;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단식 문제로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대로 꼰대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의 처신은 얼마나 신선한 감동의 충격인지요! 이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것을 충고합니다. 말 그대로 발상의 전환입니다. 늘 새롭게 변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헌 가죽 부대 같은 내 사고방식을 새 부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평생 공부입니다.
바로 고루한 내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어른이 되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누구나 깨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보수화되어 가는 경향과 더불어 꼰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말씀이 꼰대가 되어 가는 경향에 대한 예리한 지적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니 꼰대는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누구나의 숙명처럼 생각됩니다. 꼰대에서의 유일한 처방이자 탈출은 늘 깨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배우고 공부해도 예수님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야 말로 예수님 공부의 대가임을 오늘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가가 입증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로부터 지금의 우리에게 이르기 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성무일도시 부르는 끝없는 깊이의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들이요 그 원형이 오늘 콜로새서 찬가의 주인공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사람의 신비, 우주의 신비, 삶의 신비가 함축된 놀라운 깊이의 영성을 표현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어느 한 구절 생략 할 수 없는 마르지 않는 샘같은 깊이의 찬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맞이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대략 적어 봤습니다.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답이자 모두임을, 또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을 닮아 새롭게 시작할 때 비로소 꼰대로부터 탈출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끝으로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시로 강론을 끝냅니다.
-“우리는
꽃이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늘 새롭게 폈다지는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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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을 어떻게 완성하시는지 들려 주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이번에는 단식 논쟁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관습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교해서 허점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제도적 전통적 실천 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예수님 일행이 먹고 마시기만 했을 리는 없겠지요. 이런 과장과 왜곡 안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심저에 피어나는 분노와 조바심이 읽힙니다. 그들은 지켜 오던 것이 그저 안전하게 계속 지켜지고 또 잘 수호되어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 역할에 자처하고 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루카 5,34)
예수님은 지금 당신께서 피조물 한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이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언젠가 세상 구원의 날이 오면, 모든 인류가 하느님 나라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하고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될 그 기쁨을 인류는 지금 앞당겨 맛보고 있는 것이지요. 다만 아직 아무도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8-39)
예수님은 헌 옷과 새 옷,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의 비유로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실 결정적 구원 계획을 계시하시지만, 이 역시 모두가 다 알아듣는 건 아닌 듯합니다.
이 말씀에 묻어나는 예수님 목소리 톤에 가만히 머물러 봅니다. 분노나 질책, 실망의 세기가 아니라 어떤 미세한 아쉬움의 진동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묵은 포도주(옛 계약)에 깊이깊이 심취한 이들이 새 포도주(새 계약)에 맛을 들이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선택은 강제할 수 없습니다. 강요한다면 선택이 아니니까요. 또 새로움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 옛 것을 빼앗아서도 안 됩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함께 이루어내는 합작품이니까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볼멘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 찬가가 울려퍼집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6)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6)
모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에 본성적으로 그분을 향합니다. 비록 옛 포도주의 향기와 맛이 더 익숙하더라도, 예수님이 옛 계약의 주체이신 하느님과 같으신 분,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고 또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순리에 마음을 열면 자연스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분은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예수님께서 계약을 완성하신 방법은 "화해"입니다. 그것도 "기꺼이" 그렇게 하셨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희생 제사로 하늘과 땅, 유다인과 이방인, 구약과 신약, 율법과 성령이 하나를 이루어 완전한 구원으로 나아갑니다.
어쩌면 신랑과 함께 있는 혼인 잔치의 때는 옛 것과 새 것을 구분하고 따지고 공격하고 등질 때가 아니라, 열렬히 다가가고 뜨겁게 일치하고 새로운 통합을 잉태하여 낳는 화해의 때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묵은 것이 좋다."는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인지도 모릅니다.
내면에 낡고 굳어버린 부분이 게으름이나 두려움 때문에 행여 멈추어 있다면, 성령의 열기로 녹여 새로운 포도주로 빚어 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요.
흘러간 것이든, 현재 마주한 것이든, 앞으로 다가올 것이든 우리는 그 무엇을 통해서도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어 있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이 모두가 화해를 이루는 날, 우리는 정말로 진하게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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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8)
'단식의 참의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들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5,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5,34)
혼인 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주신 일인데, 예수님께서 이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잔치와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행해지는 일은 먹고 마시는 일입니다. 단식은 신랑을 빼앗길 날,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에 할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단식의 때입니다.
'단식은 먹고 마시는 일을 멈추는 것'인데,
오늘 복음은 이를 뛰어넘는 '단식의 참의미'에 대한 말씀이라고 묵상했습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의 말씀인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5,38) 라는 말씀 안에 단식의 참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매일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나의 모습이 늘 '새 부대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이 '회개의 단식'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단식의 참 의미라고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최초로 표현하신, 그래서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에서 '봉사하는 특전'으로 돌려놓으신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도 회개의 단식을 통해 내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고, 나도 너의 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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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찬가’로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요한 복음의 서문과도 비슷한 이 찬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또한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창조물 사이를 화해시키시는 구원자이심을 알려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알아 갑니다. 또한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갑니다(콜로 2,6 참조).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통한 희망은, 세상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강한 믿음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는 비유와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옛 생활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언제나 그렇게 해 왔다며 행동하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기”(2016년 1월 18일 성녀 마르타의 집 미사 강론)를 우리에게 부탁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 난 신자들은 ‘성령의 새로움’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은총으로 진리를 찾아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는 신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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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단식의 정신
자기들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삶을 볼 때,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재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살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겠느냐고 비난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그들이 단식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어떠했는가? 유대인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또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에 대해 속죄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34절)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 18)라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나라고 하는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을 수가 없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변화하여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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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루카 5, 38)
신앙은
새 포도주와의
만남이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만남이다.
포도주는
포도주다워야
한다.
좋은
포도주를
왜곡시키거나
좋은 포도주를
가짜로
만들었어는
안된다.
언제나
새로워지는
변화의 시작은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이다.
회개의 마음이
새 포도주를
담는 참된
새 부대의
삶이다.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아내는
삶의 기쁨이다.
담아내는
책임감있는
삶이다.
새 포도주
새 부대도
모두
새 삶을
지향한다.
삶이 변화되는
노력이 참된
노력이고
참된 부대이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길
기도드린다.
복음은
온통
새로워지는
마음의
잔치이다.
새로워지는
기쁨이
찬미이고
기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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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단식 논쟁 - 새것과 헌 것>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3-3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이미 메시아께서 오셨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회개하는 단식은 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메시아와 함께 기뻐할 때이다. 그러나 메시아를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회개의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입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의 한 방식이었고,
회개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슬픔의 단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께서 이미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하는 것과 같은 단식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하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에 대해서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의 단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아니면 그 증언을 거부했을까?
당시에 요한이 적극적으로 제자들을 모아서 가르친 것 같지는 않고,
요한을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이
마치 요한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를 따라다녔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그랬다면 ‘제자들’이 아니라 ‘추종자들’입니다.)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라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요한 1,40),
그 수는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추종자들, 또는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이 전부터 했던 방식대로(바리사이들의 방식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바로 먹을 것을 드린 것을 생각하면(루카 24,41-42),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단식을 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그때는 제자들이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너무 놀라고 두려워서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또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신랑을 빼앗길 일은 없는데,
우리 스스로 신랑을 떠나는 일은 많습니다.
한 눈 팔다가, 딴 생각 하다가, 또는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되는데,
그럴 때에 신랑이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기 위한 ‘회개의 단식’을 합니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루카 5,36-39).”
1) 이 말씀을 앞의 ‘단식에 관한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고,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메시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슬픔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지 말고, ‘이미 오신’ 메시아와 함께 기뻐하는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마리아의 노래’의 첫 구절,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47)”에
나오는 그 ‘기쁨’이 그리스도교의 기본 정신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메시아의 구원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혹시라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삶’의 무엇인가가 고장 난 상태라는 뜻입니다.
고장 난 것을 고치려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상담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2) ‘단식에 관한 말씀’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옳지 않은 버리고 옳은 것만 지켜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무조건 오래 된 것을 새것으로 바꾸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대단히 오래된 것이지만,
결코 ‘낡은 것’도 아니고, ‘헌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계명들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18).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이단 사상들이나 세속의 풍조들은 언제나
새롭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우리에게 접근하고 우리를 현혹시킵니다.
그 ‘새롭다는 점’에 홀려서 신앙을 잃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공산주의 사상도 그랬었고, 뉴에이지 사상도 그렇습니다.
요즘에는 이상한 사이비 심리학 이론을 동원해서
마치 대단한 영성 프로그램인 것처럼 가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인간의 시간으로는 이천 여 년 전의 것이지만,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언제나 우리를 ‘새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에페 4,24) ‘새 포도주’입니다.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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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내 삶의 뿌리와 찾아가야 할 방향
주님께 삶을 봉헌하고 축성을 받은 복된 삶을 살면서도 일에 파묻혀 내 삶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망각할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끔찍한 일이다.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허공에 대고 헛손질하는 무의미한 삶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제1독서를 통해 자신을 다시 추슬러 본다.
오늘 제1독서(콜로 1,15-20)는 ‘그리스도 찬가’로 불린다. 이 대목에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창조와 구원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시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찬가는 창조세계가 그리스도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다.”(콜로 1,15) 곧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앙인의 원형으로서 믿는 이들에게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계시해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시다.”(1,15) 다시말해 그분은 창조세계의 중개자요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시다.
모든 것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1,16).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의 존재이유요, 창조세계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의 근원적인 힘이요 목표이시며 창조의 핵심이시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화해의 중심이시기도 하다(1,20).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며’(1,13), 인류에게 “죄의 용서”(1,14)를 베푸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과 용서의 길이자 창조의 구심점이시다. 이 찬가는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으며’(1,16) 만물이 존재하는 근거는 그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노래한다(1,17).
하느님으로부터 온 우리가 세상에 뿌리를 두고 살면서 수시로 변하는 현상과 있다가도 없어지는 물질에 휘둘리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그릇된 종교나 사상을 중시하면 그에 따라 세상을 보고 그 틀 안에 갇히기 십상이다. 따라서 내 삶의 뿌리와 존재이유와 방향과 목적을 뚜렷이 인식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다.
방향상실의 시대에 오늘 제1독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내 삶의 존재이유요 원천이며 가장 강력하고 항구한 힘이신 그리스도께로 되돌아가야겠다.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모든 것을 그분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분을 통하여 그분 때문에 용서와 화해를 이루도록 힘써야 하리라.
내 삶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나의 전부이신 주님, 저를 차지하시어 제 안에 생기있고 활활 타오르는 당신 사랑의 불꽃, 생명의 호흡을 되살려주소서! 주님이 아닌 다른 데에 시선을 빼앗기고 세상 것들에 삶의 중심이 쏠리곤 하는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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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2019년 9월 6일
이방인의 세계에서 사도 바오로는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권에 있는 콜로새 공동체 사람들에게 사도의 제자 에파프라스에게 이미 배웠겠지만 창세기의 가르침은 공동체에 새로운 생소할 수 있겠지만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만물은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고 만물에 으뜸이심을 사도는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화해시키셨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루카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바리사인들은 자주 단식을 하며 기도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자주 단식하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단식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예수님과 일행을 향해 질문합니다. 사실은 비아냥거리는 것이지요.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루카 5,33)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제자들까지도 이해 못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루카 5,34-35)
예수님께서 관습과 형식에 묶여 있는 단식의 정신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단식은 단지 음식을 안 먹고 굶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내 놓으라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알아 듣지 못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바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신 연 후에야 사도들도 교회도 단식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단식은 보여주고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빈 광정과 같은 형식에 많이 치우치는 모습이 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 뜻과 역사도 모르면서 ‘전통’만을 내세우며 세상의 모습에서 예수님 시절의 형식적인 단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형식적이고 답습적인 요소가 있지 않는지 살펴 보는 것도 오늘 복음이 주는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묵은 부대에 묵은 포도주를 담는 구약 율법에서 새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묵은 관습, 형식, 틀에서 헤어나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매일 새롭고 율법의 정신을 회복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묵은 것이 좋다고 머무르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새로움으로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흐르지 못하고 묵은 포도주가 되는 것은 발전하지 못하고 매일 안일함의 제 자리에서 맴돌기 때문이지요.
미래를 향해 도전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오늘의 수고스러움을 휘둘러 편한 삶과 게으름을 피울 때 우리는 보통 가던 길도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는 것입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 편안함과 안이함이 우리 안에 머물러 묵은 우리가 되게하지 말고 늘 미래를 향해 손짓하며 도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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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신앙의 본질, 핵심, 알맹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밥 먹듯이 질타당하는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보여준 어리석은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가장 중요한 종교의 본질, 핵심, 알맹이가 무엇인지 찾아나가는데 1차적인 관심을 두었어야 했는데, 그들은 외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 하느님을 만나는 일,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는 일,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 하느님의 모상은 인간을 사랑하는 일...사실 이런 것들이 신앙의 핵심이요 본질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외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그랬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뒷전이고 자신들이 규정해놓은 수많은 틀에 따라
정확하게 기도가 이루어지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기도를 바치는데 있어 정성이나 마음,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그저 입으로만, 그저 기도의 의무를 채우기 위해서만, 남에게 내가 이렇게 기도를 잘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형식적인 기도를 기계적으로 되풀이 해왔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단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단식이라는 것 좋은 것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인 식욕을 스스로 통제하여 보다 명료한 정신 상태로
하느님께 나아가겠다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단식이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필수 교과목은 절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단식이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어 도움을 주는 방편 내지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마치도 단식이 최고인양, 단식이 최종 목표인양 여기며 떠들썩하게
자신들이 행하는 단식을 자랑했고 목숨을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뭐가 뭔지 개념파악이 잘 안 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던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 당신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짧은 공생활 기간이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한 은총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은총의 역사는 앞으로도 지속되겠지만,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했던 꿈같은 ‘허니문’의 순간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단식은 그때 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머무시는 은총의 시간 동안은 더 이상 울며 애통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그토록 염원해왔던 지복직관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식도 그 기간 동안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기도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분 가까이 다가서는 일,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이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기도와 단식, 하기는 참 많이 했습니다. 틈만 나면 기도하고 틈만 나면 단식했습니다.
서로 많이 하기 위해, 더 강도를 높이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거룩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의 기도와 단식에는 자신들만 있었지 하느님이 사라져버렸기에 전혀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거룩한 사람들은 절대로 거룩한 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단식을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바치고 있는지 떠벌이지도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보다 깊이 하느님을 만날까, 어떻게 하면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안에 오래 오래 머무를까, 어떻게 하면 또 다른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사랑을 듬뿍듬뿍 안겨드릴까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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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네 생각과 행동이 옳을 수는 있다. 그러나 너는 옳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을 비난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먹고 마시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실례를 범하는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이 헌 옷을 꿰매기 위해 새 옷을 찢거나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 하며 옛것만 좋다고 고집하는 이들이라고 비판하십니다.
단식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40일 동안이나 단식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먹고 마시는 제자들을 두둔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매년 한 번씩 사탄은 자신의 졸개들에게 상을 주어 더 완벽한 방법으로 인간이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모델을 제시하려 했습니다.
마귀들은 서로 미움과 사기, 방탕과 무절제, 그리고 무기력과 열등감 등을 일으켜 사람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의 대상을 탄 마귀는 이런 말을 한 늙은 마귀였습니다.
“나는 내가 맡은 사람들에게 항상 바른 생각만 심어주었다오.”
다른 마귀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무릎을 ‘탁’ 치며 이것이 현대에 꼭 필요한 방법이라고 앞으로 모두 그 마귀를 따라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가 한 영혼에 했던 일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8남매 중 맞이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대학 대신 자신을 도와 농사를 지을 것을 권했습니다. 학비를 내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귀는 그의 마음에 속삭였습니다.
“너의 인생은 너의 것이야. 네가 열심히 노력만 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대학을 나올 수 있어. 그러면 동생들에게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는 불가능은 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이며 주경야독하여 서울 소재 일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하며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계 회사에 들어가 빠른 승진을 거듭한 끝에 젊은 나이에 임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와 가족에게 신경 써 줄 시간은 갖지 못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괜찮아. 아버지의 의무는 가족이 돈 걱정 안 하게 하는 데 있어. 그럴려면 넌 열심히 일해야지. 언젠가는 아내와 자녀들이 다 알아줄 날이 있을 거야.”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열심히 일했고, 그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은 아랫사람이건 아내건 자녀들이건 더 잘할 수 있다고 다그쳤습니다. 자신이 했으니 그들도 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자녀들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이 되었지만 50대 중반에 신장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의사는 3년간 노력한 끝에 더는 손을 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마귀의 속삭임에 따라 그는 눈을 부릅뜨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뉴스에서는 좋은 약이 많이 나오고 있다던데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 나보고 그냥 이렇게 죽으란 말입니까? 그게 의사라는 사람이 할 소리입니까? 돈은 상관없으니 예전에 썼던 항암제를 다시 써 주세요.”
의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도 막무가내여서 몇 달 동안 그 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러나 고통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이 3년 동안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넌 할 수 있어. 지금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야. 넌 이겨낼 수 있어.”
이렇게 항암 치료를 받는 중에 야근도 하고 외국 출장도 다니며 건강한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미 뼈까지 전이된 암세포로 고생하지 말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 통증을 좀 줄이며 죽음을 준비하는 편이 낫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또 속삭였습니다.
“넌 이대로 죽을 수 없어. 아직 할 일이 많아. 빨리 주식 시세를 한 번 봐봐. 네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어.”
그는 그렇게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도 30여 년 그와 함께 살면서 너무 힘들었고, 아내로서 의무를 다한다는 마음으로 마지막 임종을 지켰지만 실제로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서울대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나온 사례를 마귀를 개입시켜 조금 각색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외롭게 죽어간 그 사람은 틀린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수 있습니다. 다 자기 인생은 자기의 것이고 열심히 살아서 가족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엔 그의 주위에 아무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사람이 현대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입니다. 그들이 지킨 율법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틀렸습니다. 옳은 법을 지키면 다 옳을까요?
만약 개가 밥상에서 인간과 함께 식사하려 한다면 옳은 일일까요? 본인이 개인데 사람처럼 행동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개에게 어떤 일을 시킬 때, 그것이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것일지라도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옳고 그름은 내가 하는 행위에 달리지 않고 내가 누구의 명령을 따르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율법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내가 옳다고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은 옳아 보여도 틀렸습니다. 주인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주인과 개가 있다면 개는 주인의 뜻을 따를 때만 옳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아를 주님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마귀의 속삭임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이 옳았더라도 하느님의 의도와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진리’이고 나는 ‘악’이며 ‘거짓’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길도 모르고 진리도 없으며 죽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안에 옳은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진리라고 하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집니다. 나도 진리인데 뭐하러 오셨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삶의 옳고 그름은 어떤 옳은 일을 했느냐가 아닌,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묻고 실천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으면서까지 “난 죄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마귀의 가장 악랄한 계책입니다.
내 행동이 옳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옳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옳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옳은 것은 하느님 뜻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과 행위가 하느님 뜻 안에 있을 때만 내가 옳게 됩니다. 어차피 주님만이 빛이시고 진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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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할 것이다.
누구나 발전을 원합니다.
그러나 발전이 가져오는 결실만 볼뿐
결실을 맺기 위한 희생을 보지 못하곤 합니다.
무언가 발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용가치가 없어진 무언가가 생겼다는 뜻이고
이는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 체제, 기술은 소외된다는 의미입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에
모든 성장은 아픔을 동반하며
동시에 변화와 선택을 요구합니다.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 것.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 것.
이는 새로움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의미하며
머물기보다 늘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며
그 안에서 본연의 의미,
곧 옷과 포도주가 가진 본질을 드러내야 함을 말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선택입니다.
그리고 오늘 기억하는 그레고리오 교황을 통해
무엇이 하느님을 향한 것이며
무엇이 교회를 위한 선택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로마 시장이 될 정도로 뛰어났던 성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수도 생활을 시작합니다.
교황이 세상을 떠나자 교황을 돕던 그레고리오 성인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는 교회를 위한 선택을 시작합니다.
교회 법령을 정비하며 신앙생활을 인도했고
무능한 성직자를 해임하여 공동체를 쇄신할 힘을 길렀고
막대한 경비를 들여 자선활동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기근의 희생자들을 구호하는 등의 활동은
교회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도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상실의 아픔보다 성장의 고통을 바라볼 수 있기를
지금 머물기보다 하느님을 향해 꾸준히 나아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도 본질을 살아가며
우리의 믿음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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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걱정과 준비는 성질을 달리 합니다. 준비와 대비도 약간 의미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준비라는 말을 성경에서 간혹 보게 됩니다. 이 ‘준비’라는 단어는 깨어 있어야 하는 내용의 복음에 나옵니다. 제가 원어에 나오는 단어는 모르지만 영어 성경만 놓고 보더라도 한글로는 준비라고 번역을 했지만 영어는 다른 의미로 준비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봤습니다. 두 단어의 의미는 사실 원어민도 구분하여 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한국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어를 잘 아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단식의 의미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예전에 외국인과 함께한 선생은 캐나다에서 부전공으로 한국어를 공부했는데 한국어 구사 능력이 아주 탁월했습니다. 정말 언어 실력은 웬만한 한국인의 실력을 능가할 정도입니다. 인간은 생각을 언어로써 합니다. 유명한 논리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입니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와 같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어로써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생각을 하기 위한 도구와 재료입니다. 음식도 재료가 풍부해야 맛나는 음식을 요리할 수가 있듯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땐 단식을 할 수 없지 않느냐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원래는 단식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따져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인 것입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거나 절제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은 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을 하는 분위기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상가 집에 가서는 슬퍼하고 위로를 해 주는 게 예의입니다. 결혼식장에 가서는 기뻐해 주고 축하해 주는 게 예의입니다. 정반대로 한다면 그건 예의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측만 한번 해 볼 따름입니다.
사람도 언젠가는 만나면 헤어지게 되는 날이 옵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모님이 세상을 먼저 뜨시게 돼 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건 슬픈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직 살아계시는데 그걸 미리부터 걱정을 하거나 준비를 한다면 그것도 적절하지 않은 행동입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준비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하면 됩니다. 살아계실 동안엔 최대한 잘 모시려고 하는 것에만 집중을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식은 단지 음식만을 의미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단식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영적인 의미로서의 단식일 겁니다. 욕심을 절제를 하는 것도 단식이 해당될 것입니다. 자선을 하는 것도 단식이 될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경우가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뻐해야 할 때가 있고 슬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2000년 전 그 당시는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복음이 기록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한번 고민을 해봤습니다. 그 의미도 액면 그대로 해석할 게 아니고 지금의 입장에서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역으로 우리가 떠나는 현실을 생각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떠난다는 게 사실은 헤어짐과 같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렇습니다. 이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이 됩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다 신부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비 신랑을 만나는 데 신부는 화장을 하곤 합니다. 다음에 만날 때도 화장을 합니다. 그때 그전에 화장한 얼굴로 만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매번 만날 때마다 화장을 하게 됩니다. 귀찮아도 합니다. 이쁘게 보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는 이와 같은 화장이 바로 영의 단식에 해당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우리가 새 부대가 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항상 새 술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새 부대가 되지 않으면 새 술이 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새 부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부대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얼굴에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화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단식이고 그런 단식이 예수님과 늘 함께 있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과 늘 함께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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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3.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제1독서(콜로1,15~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 시키셨습니다."(2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시어 만물로 하여금 당신 자신과 화해하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평화를 이룩하시어'로 번역된 '에이레노포이에사스'(eirenopoiesas)의 원형 '에이레노포이에오'(eirenopoieo)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와 '행하다',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였다.
그 의미는 '평화를 만들다'(make peace)이며,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과 만물 및 만물안의 모든 생명체 상호간에 평화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 5장 10절과 에페소서 2장 15절과 16절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인류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무죄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죄는 인간들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어 흠없으신 당신 몸을 자원으로 희생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본문의 전치사 '디아'(dia)는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십자가의 피가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독생 성자의 피를 흘리게 하셔야만 했는가?
이것은 이 땅에 첫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겨 죄가 들어오고, 모든 인류가 첫 사람안에서 죄를 지어 죽음으로 치닫게 된 이후로 그 죽음을 막는 유일한 원리가 바로 '피흘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 마음이 아프듯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어겨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며, 그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려 일어나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의노는 당신과 위격과 레벨이 같은 하느님만이 풀어 드릴 수 있고, 죄는 인간이 지었기 때문에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속죄를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 원리는 하느님 아버지 당신 자신이 세우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레위17,11; 히브9,22)고 선언하셨다.
구약 시대에 수없이 흘려지고 뿌려졌던 양과 송아지의 피는 해당 제사 그 한가지 죄에 대해서만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사였지만(히브7,27), 저주의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단 한번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여 죄사함 및 화해를 위한 더 이상의 피흘리는 제사가 필요없도록 만드신 것이다(히브10,10.11).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원문은 새 성경의 번역과 조금 다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의 구속 공로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죄를 범한 인류와 화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희망이요, 기쁨이었다.
여기서 '화해시키셨습니다'로 번역된 '아포카탈락사이'(apokatallaksai)의 원형 '아포카탈랏소'(apokatallasso)는 끝마침과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 (apo)라는 전치사와 그 자체로 이미 '화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탈랏소' (katallasso)의 합성어이다.
사도 바오로는 '화목하게 하다', '화해시키다'라는 의미를 전달할 때 주로 '카탈랏소'(katallass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로마5,10; 2코린5,18.20).
그러나 여기 콜로새서 1장 20절과 22절, 에페소서 2장 16절에서는 '아포카탈랏소'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완전한('아포'; apo) 화해('카탈랏소'; katallasso)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카탈랏소'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여기서는 죄를 범하기 이전에 가졌던 평화의 관계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같은 강조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과의 완전한 화해를 기뻐하시며 간절히 희망하셨던 것이다.
한편 '유도케센'(eudokesen)이라는 단어는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신다'는 뜻인데, 원문에는 콜로새서 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새성경에는 '기꺼이'로 번역했다.
이 단어의 원형 '유도케오'(eudekeo)는 '잘하다', '좋다'라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하다'(마태3,9), '여기다'(2코린11,6)란 뜻의 동사 '도케오'(dokeo)의 합성어로서 '좋게 생각하다', '기쁘게 여기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것은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에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마태3,17; 갈라1,15.16).
이 단어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과 다시 화해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의 이러한 바람이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십자가상 대속적 죽음을 가능케했다.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 할 것이다
(루카 5,31-39)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예수님은 제사와 율법의 규정을 지킨 의인이 아니라 그 길의 죄인을 회개로 구원하시러 오셨다.
죄(하마트리아- 과녁을 벗어나다), 잘못,허물(파라토마- 가야할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는 것),
회개(메타노이아- 가던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곧 그 법으로 죄인의 판정을 받은 그들을 진리의 길로 돌아서게 하시어 구원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그 대속의 죽음(피)으로 거저 얻는 의로움, 그것이 구원의 새 계약이며 진리인 것이다.
그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서야(회개해야) 그분의 십자가로 용서와 하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33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
= 율법의 규정에 의한 단식과 기도, 그것은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이다.
참조~(히브13,8-9) 8 예수 그리스도(진리)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9 갖가지 이상한 가르침에 끌려가지 마십시오. 음식에 관한 규정이 아니라 은총으로 마음을 굳세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규정에 따라 살아간 이들은 아무런 이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 단식의 행위가 아닌 그 단식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35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제자들이 손님으로 있다. 손님은 단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기면(제거되면, 죽으면) 자연스럽게, 당연히 단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곧 죄인들을 위한 대속, 십자가의 죽음인 것이다.
(갈라3,11-13) 11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제자, 자신들의 죄로 대신 죽으신 그 예수님을 진리로 믿어 그분과 한몸이 되는 혼인 잔치의 신부가 되면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율법의 모든 규정을 끊고(단식) 하늘의 진리인 십자가의 복음을 먹게 되는(믿는) 것이다. 그 단식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1코린 4,3-5) 3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4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5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시어 칭찬을 하신다? 사도 처럼 나의 속 마음으로 자신있게 하느님께 칭찬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도 사도 처럼 자신이 있어야 한다. 나 역시 자신이 있다.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왜?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 더러운 생각 때문에 죽으셔서 내 마음속 그 자리에 나에 대한 신랑의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히브10,22참조)
그 주님의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 칭찬 받을 것이고 그 사랑이 율법과 상관없는 하늘의 진리, 의로움 , 구원의 새 계약임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새 옷, 새 포도주인 것이다.
36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또 비유를 말씀하셨다. “아무도 새 옷(새 계약)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율법)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 새 계약의 새 옷과 율법의 헌 옷, 곧 하느님의 규정과 사람의 규정은 섞일 수 없다는 것이다.
37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새 계약)를 헌 가죽(율법)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38 새 포도주(새 계약)는 새 부대(헌 옷을 버린 새 사람)에 담아야 한다.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 많은 사람들이 묵은 옛 계약 , 곧 율법의 규정 그 사람의 규정이 참이라고 우기고 있다.
(마르7,7)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 예수님께서 헛된 신앙이라 하신 사람의 규정이 ‘좋다’고 ‘옳다’고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람의 규정으로 지킨 그 자기 의로움의 길이 구원의 권위가 없음을 깨닫고 버리는, 그 길을 끊고(단식) 돌아와(회개) 구원의 참 권위인 하늘의 의로움 곧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먹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용서를 이웃과 나누는 것, 그것이 참 단식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사58,6)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아멘~!!!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5,33-39)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만 아니라,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이 헌 옷에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36~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땅에 오신 새 시대에는 옛 전통을 따라 단식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더욱 명확히 하신다.
두 비유에서 새 옷에서 찢은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오신 새 시대, 즉 복음의 시대를 상징하며,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일중일에 두번(월요일과 목요일) 정기적으로 단식하는 것과 같은 유다인들의 고루한 전통 및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여기서 '어울리지도'로 번역된 '쉼포네세이'(symphonesei; agree; match)의 원형 '쉼포네오'(symphoneo)는 '함께'(with)라는 뜻의 접두어 '쉰'(syn)과 '소리를 내다'는 뜻의 동사 '포네오'(phoneo)의 합성어로서 '함께 소리를 내다', '화음을 이루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교향곡'을 의미하는 영어 'symphony'의 어원이다. 여기 본문에서는 '일치하다', '조화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을 헌 옷을 기우는 데 사용하면, 세탁시 물을 흡수한 조각이 급격히 수축되어 기운 부분이 뜯어져 그 헌 옷이 망가지게 된다.
즉 새 옷에서 찢어 낸 조각과 헌 옷은 서로 불협화음만 이룰 뿐, 조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새 시대 새 복음과 유다인의 고루한 전통은 서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없고, 오히려 서로 피해를 줄 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당시 유다인의 생활상 가운데 친숙한 포도주와 가죽 부대를 예로 들어 가르침을 전개하신다.
포도주를 새로 만들면, 그때부터 며칠 혹은 수 개월 동안 숙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발효된다.
헌 가죽 부대는 새 부대와 달리 신축성이 없다. 따라서 유다인들은 새 포도주를 만들어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계속 발효되는 포도주에서 가스가 생겨나 신축성이 없는 헌 가죽 부대가 터져 버려, 결국 포도주와 헌 가죽 부대 둘 다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신축성이 뛰어난 새 가죽 부대에 담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루카 복음 5장 36절에서 설명한데로, 예수님의 복음은 유다인의 율법주의적 전통과 조화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왜곡해서 만든 과거의 고루한 전통과 규칙으로, 하느님의 율법의 정신을 참되게 제시하는 복음과 예수님의 행위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38)
'새 부대에'로 번역된 '에이스 아스쿠스 카이누스'(eis askus kainus; into new wineskins; into new bottles)에서 '새'로 번역된 단어 '카이누스'(kainus)는 '써 보지 않은', '처음 부르는' 노래로서 '새'노래(묵시14,3), '낯설고 놀라운',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마르1,27; 요한13,34; 사도17,19), 혹은 '낡지 않은', '새로운' 피조물, '새' 것(2코린5,17; 2베드3,13) 등등의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의미한다.
율법, 규칙, 전통이라는 것에 얽매여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유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가르침이나 행위는 전에는 본 적이 없어서 낯설기도 하고, 목격자들을 놀라게도 만드는 차원의 것이다.
따라서 헌 종교 형식을 보존하려는 어리석음과 헛된 노력을 그만두고,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를 준비해야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묵은 것이 좋다' (39)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의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9장 17절과 마르코 복음 2장 22절에는 없는 루카 복음서의 고유한 내용이다.
여기서 '좋다'로 번역된 '크레스토스'(chrestos; better)는 사용하기에 적합하여 유용하다는 (useful) 의미를 지닌 형용사이다.
항상 묵은 포도주만을 마시던 사람은 그것이 자기 입맛에 익숙하고 몸에 좋다면서, 그것만을 선호하고 고집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종교적 전통과 규칙과 가치관만을 귀하게 여기며 지켜오던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구태의연한 모습을 빗대어 지적한 말이다.
그들이 만약 계속해서 묵은 포도주만을 권하는 사람들처럼 옛 전통만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시한 복음의 진수를 결코 깨달을 수 없으니, 그들의 아집에서 하루 빨리 벗어날 것을 경고하며 촉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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