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향정에 들다
이은희
연잎에 뒹구는 물방울 속으로
발 딛는 소리 새기며
못가를 수 백 번 돌던 당신은
기어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숨 가쁘게 달려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여
하연지의 꽃잎을 놓친 나,
기다렸다는 듯 돌계단이 나무랍니다
팔작지붕 겹처마 그늘은
당신이 몰래 밀봉해둔
향기를 흔들며 반겨줍니다
그리움의 체취를 두르고 피향정에 올라
매일 밤 별들이 묵어가던 두리기둥에
당신이 남겨두었다는 숨을 들이마십니다
우리는 다른 곳을 흐르지만 같은 표정입니다
어느 곳이라도 멈추어 귀 기울이면
얇은 저녁, 고요히 부르던 당신의 노래 들려와
손바닥 온기로 두리기둥 데우며
한 몸이고 싶은 바람, 손금 찍어 놓습니다
----애지사화집 최병근 외 {굴뚝꽃}에서
피향정披香亭(보물 제289호)은 전북 정읍 태인면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이고, 신라 헌강왕대에 최치원이 세웠으며, 조선 시대에 두 차례 중수했다고 한다.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4칸으로 된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정자의 바닥은 막돌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석조로 된 28개의 짧은 두리기둥과 다시 그 위에 목조로 된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자 내부는 다시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획하여 고주를 세우고 둘레에 세워진 변주와 퇴량을 연결했다. 가구는 7량으로, 퇴보나 대들보 밑에는 초각된 보아지가 있고, 중앙 고주와 대들보 사이에는 아름답게 휘어진 충량이 걸쳐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지만 양 협칸은 귀틀로 짠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정자의 정면 중앙 창방 위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다음Daum 백과사전 참조)
만일 그렇다면 피향정이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눌 피披, 향기 향香, 정자 정亭, 즉, 이 세상의 사람들과 만나 향기(정)를 주고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천하의 명당에 터를 잡고 가장 아름다운 건축술로 정자를 짓고, 꽃 중의 꽃인 연꽃의 향기를 맡으며 시와 예술과 문화를 논하던 자리가 피향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은희 시인의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이은희 시인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연잎에 뒹구는 물방울 속으로/ 발 딛는 소리 새기며/ 못가를 수 백번 돌던 당신은/ 기어이 떠나가고 말았던”것이다.“숨 가쁘게 달려왔으나/ 너무 늦게 도착하여/ 하연지의 꽃잎을 놓친 나”를“돌계단이”기다렸다는 듯이 나무라지만, 그러나 이은희 시인은 그 나무람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피향정 못가를 수 백번 돌던 당신은 최치원 선생, 또는 하연지의 연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신라시대의 명문장가 최치원 선생이고, 나의 연인이다. 또한, 당신은 하연지의 연꽃이며, 천 이백 년 전에 떠나갔어도 해마다 연꽃으로 되돌아오는 최치원 선생이다. 따라서“팔작지붕 겹처마 그늘은/ 당신이 몰래 밀봉해둔/ 향기를 흔들며”나를 반겨주고, “그리움의 체취를 두르고 피향정에 올라/ 매일 밤 별들이 묵어가던 두리기둥에서/ 당신이 남겨두었다는 숨을 들이”마시게 된다. 당신과 나는 천 이백 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곳으로 흐르지만, 그러나 당신과 나는 그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한마음- 한뜻’의‘하나’가 된다. 당신의 향기, 당신의 숨결, 당신의 노래, 당신의 온기, 그리고‘한몸이고 싶은’나의 바람(희망)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는 향기이며, 우리는 이 향기에 의해 살고, 이 향기에 의해 죽는다. 꽃의 향기, 사람의 향기, 맛의 향기, 바람의 향기, 희망의 향기, 사랑의 향기, 그리움의 향기, 말의 향기, 노래의 향기 등----.
향기는 만물의 꽃이며, 모든 사물의 존재의 법칙이다. 인간과 인간의 사랑, 인간과 동식물과의 사랑, 모든 사랑은 향기로 통한다. 향기는 정이고, 향기는 아름다움이고, 향기는 사랑이고, 향기의 미래의 희망이다.
이은희 시인의 [피향정에 들다]는 최치원 선생을 연꽃으로 사물화시키고, 연꽃의 향기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사랑을 나눈다. 혼연일체, 즉, 시간과 공간도 하나가 되고, 그리움은 밀봉해둔 향기처럼 현실화되고, 한 몸이고 싶은 바람은 이루어진다.
이은희 시인은 향기로 숨을 쉬며, 향기로 밥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