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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사랑 - 인(仁)”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갈라 5,22-23)
이번 달부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씩 다루어 볼까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어찌 이 아홉 가지밖에 없겠습니까. 하지만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신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중심으로 그 열매들이 어떤 덕성을 지니는지 알아보고, 동양의 성현들은 그 덕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가르쳐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둘째 묶음은 인내, 호의(친절), 선의(착함)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마지막 셋째 묶음은 성실(신용), 온유, 절제로서 나 자신과 관련되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을 성령께서 은총으로 열매 맺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니 사서(四書) 가운데 한 권인 『대학(大學)』의 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큰 배움의 도는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러 그치는 데 있다.”1)
유학의 전통에서 배움의 길에 들어서려는 이는 그 배움의 길(道)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내 안에 있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이 부여해 준 명(天命)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습니다. 하늘이 내려 준 명이기에 그 자체로 온전히 밝은 덕(明德)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것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내 안에 온전히 있는 것을 밝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학(大學)』의 첫째 강령입니다. 이렇게 내 안의 밝은 덕을 밝혔으면, 이제 이웃에게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나만 똑똑해지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 곧 이웃을 쇄신시켜 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학』의 둘째 강령입니다. 이런 배움의 길은 지극한 선(至善), 곧 하느님에 이르러 그칩니다. 인간의 배움은 지극한 선, 절대자 하느님에 이르러 그칩니다. 그러니 사람은 배움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하늘이 나에게 심어 준 명(命)이 무엇인지 깨달아 알아야 하고 그 밝은 덕이 밝게 빛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웃들에게 그 빛을 비추어 주고, 다른 이들에게도 있는 그 사람 고유의 빛이 밝게 빛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내게서 시작된 배움의 길은 이웃에게로 끊임없이 확장되어 가며 온 인류에게로 향한 다음, 하느님 앞에서 그칩니다. 바꾸어 생각해 보면, 사람은 최선을 다한 후에 조용히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쳐야할 바를 모르고 자신의 힘만 믿고 끝없이 나아가기만 한다면 오히려 어리석음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지극한 선에 이르러 우리의 나약함을 겸허히 인정하고, 우리가 하늘에서부터 온 존재임을 깨닫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는 열매, 그리고 나 자신과 연관된 열매로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매달 하나씩 다루어 보겠습니다.
첫째 열매 : “사랑”
가장 먼저 다루어 볼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전체를 아우르는 덕목입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합니다. 사실 사랑이 전부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유학(儒學)에서는 인(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仁)은 ‘어질다’라고 번역되지만 바로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仁)은 곧 사랑입니다. 공자가 가장 중시한 개념으로 유가(儒家)의 최고 덕목이기도 한 인(仁)의 뜻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봅시다.
첫째, “인(仁)”은 ‘어질다, 자애롭다, 인자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번지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仁)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2)
둘째, “인(仁)”이라는 글자에는 ‘씨앗’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살구씨를 행인(杏仁)이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그 의미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결국 인(仁)은 사람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진 마음은 씨앗과 같아서 아직 제대로 싹이 트지 않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가려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누구나 제대로 가꾸기만 한다면 내 안에서 잘 자라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인(仁)이란 사람의 마음이다. 의(義)란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3)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바깥으로부터
나에게 녹아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4)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어진 마음(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미 우리 안에 심어 두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은 바로 사랑이시기에(1요한 4,7-8,16) 우리에게도 사랑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셋째, “인(仁)”에는 ‘서로 통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것이 바로 인(仁)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상태를 불인(不仁)이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서 신경이 통하지 않고 마비된 상태를 불인(不仁)이라고 표현합니다. 다음 호에서 사랑과 인(仁)의 덕목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자비의 해에 되새겨 보는 사랑의 가치”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① 사랑
지난 호에 이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첫째 열매인 ‘사랑’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란 가장 중요한 가치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전체를 아우르는 덕목이라는 것과 이 사랑을 유학(儒學)에서는 인(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로 눈을 돌려 보면 사랑의 가치는 우습게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더 이상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제 최고의 가치는 돈, 권력, 성공, 발전, 건강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취급받곤 하지요. 세상이 이렇게 물질적인 가치를 최고로 여기고 욕망을 좇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지상 과제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우리를 위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의 정점이 성찬례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우리의 사랑을 보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성당을 찾아오지만 신앙인들에게 실망해 성당을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성직자, 수도자에게도 상처받고 냉담하는 이가 많습니다. 신자들의 모임도 바깥세상의 그것과 다를 바가 별로 없습니다. 카페나 식당에 모여 다른 이의 뒷담화, 험담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게 흔한 풍경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따돌리기도 합니다. 사랑이 가득해야 할 곳에서 오히려 사랑의 나눔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인도의 성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가정에서, 세상 속에서는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우린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공자(孔子)가 이야기한 사랑을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서(恕)’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서로 같이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 글자를 공자는 이렇게 풀었습니다.
“자공이 공자께 여쭈었다. ‘한마디 말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과연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서(恕), 그 한마디일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1)
진리는 단순합니다.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 쉽습니다. 삶으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맹자(孟子)의 이야기도 들어 볼까요?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을 사랑해도 친해지지 않거든 자신의 어짊(仁)을 돌이켜 보고, 사람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거든 자신의 지혜(智)를 돌이켜 보며, 사람에게 예를 다해도 답하지 않거든 자신의 정성스러움(敬)을 돌이켜 보아라.”2)
물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내가 호의를 베풀고 다가가는데도 나의 호의가 전달되지 않고 오해를 산다면, 사랑을 하고 관심을 갖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상대방을 탓하기에 앞서 나의 사랑이 진실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는데도 상대가 그 사랑을 잘 받아주지도 않고 관계도 계속 소원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 방식대로 사랑을 베풀고 내가 생각한 대로 호응하지 않는다고 실망한다면 그건 자기만족이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단체의 리더로서, 모임의 대표로서 사람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이끄는데도 사람들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내 권위에 도전한다고 기분 나빠하기 전에 내가 정말 지혜롭게 그들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예(禮)를 갖춰 대하는데도 그 예에 맞게 답하지 않거나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뜩찮다면 그 사람을 탓하기 전에 겉으로 드러난 예의 바른 행동 안에 내적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상대의 그런 행동이 당연할 것이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추어 예를 행했는데도 답하지 않았다면 그건 상대의 잘못이니 개의치 않아도 될 것입니다. 맹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 행위에 진실한 마음이 깃들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을 드러내는 행위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랑은 나에게 차고 넘치는 것을 베푸는 자선 행위가 아닙니다.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눠 주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나눌수록 채워지는, 기적 같은 일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작년 12월 8일부터 ‘자비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은 불교에서 쓰기 전에 중국에서 고대부터 사용하던 말입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 가진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가련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어진(仁)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자비의 근원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처럼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자비의 해를 보내면서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 21)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기쁨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② 기쁨
“예수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기쁨으로 가득 찬 부활 시기를 맞았습니다. 이제 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물러가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는 계절을 맞았습니다. 전례력으로도 부활 시기가 시작되어 우리 삶이 기쁨으로 가득한 때입니다. 이번 달에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기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가톨릭 대사전』은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느끼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기뻐할 일이 없어도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샘솟는 기쁨이며,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의 태도이기에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기뻐할 일이 없어도 샘솟고 고통 중에서도 흘러나오는 기쁨이라니, 인간적인 것에서 나오는 기쁨이라면 이런 경지까지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기쁨은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기쁨’은 전적으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기쁨’을 표현하는 한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쁠 희(喜), 즐거워할 락(樂), 기쁠 열(悅)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가운데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쾌락이나 기쁨이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되는 좀 더 차원 높은 수준의 기쁨을 표현하는 한자는 락(樂)입니다. 유가(儒家)철학에서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말은 “공안낙처(孔顔樂處)”일 것입니다. 공자와 안연(顔淵)의 즐거움이라는 뜻입니다. 공자의 제자인 안연은 비록 가난했지만 항상 인(仁)을 실천하는 것을 마음의 즐거움이요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공자는 안연의 이런 태도를 늘 칭찬했지요.
“어질구나, 안회(안연)여! 한 그릇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서 누추한 거리에 사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1)
여기서 나온 말이 “단표누항(簞瓢陋巷)”입니다. ‘밥 한 대그릇, 물 한 표주박, 그리고 누추한 골목’이라는 뜻으로 안연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안연은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였습니다. 무척 가난했지요. 간신히 끼니를 연명할 정도였고 달동네 같은 곳에 있는 허름한 집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안연은 공자의 제자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안연은 하나를 배우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러가서 직접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앎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인 태도를 결코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칭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스승인 공자가 추구한 기쁨과 즐거움은 어떠했을까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를 삼을지라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도다. 의롭지 않으면서 부유하고 귀한 것은 나에게 뜬구름과 같으니라.”2)
아무리 부유하고 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부귀가 의롭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라면 자신에게는 뜬구름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비록 거친 밥을 먹고 물 한 잔밖에 마실 수 없는 형편이라 하더라도, 훌륭한 이부자리는커녕 베개조차 없어 팔을 베고 누울지라도, 진리를 찾고 실행하는 나의 즐거움을 다른 이가 빼앗아 가거나 나의 의지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자와 안연이 가난하고 누추한 삶 그 자체를 즐기고 기뻐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지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과 타협해 불의한 부귀영화를 누리기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소신껏 세상을 살아가는 데 비록 가난과 일신의 누추함이 따라오더라도 기꺼이 감내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공자와 제자 안연이 추구했던 이런 기쁨과 즐거움의 경지를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周敦 )는 “공안낙처(孔顔樂處)”라는 말로 표현하고 그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했습니다. 후대의 유학자들도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 같은 것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공자와 안연이 추구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즐거움을 추구하려고 힘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기쁨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습니까? 돈입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의 가치가 최고입니다. 돈이 하느님의 위치에까지 올라와 버렸습니다. 돈이 된다면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불의한 일도 서슴지 않고 저지릅니다. 멋진 자동차, 편리한 가전제품, 최신 전자기기 같은 과학의 발전과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풍요로움에서 기쁨을 찾습니까? 하지만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은 덧없이 지나가 버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우리는 지상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천상의 것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콜로 3,1-2 참조) 진리 추구, 사랑의 실천, 용서와 화해, 이런 것들이 천상의 것이겠지요. 진리를 찾아 공부하면서 알게 되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누리는 가슴 벅찬 기쁨도 말할 수 없이 크겠지요. 나에게 잘못한 이가 용서를 청해 와 화해를 한다든지 가난한 이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 줄 때의 기쁨도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오는 기쁨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선물입니다. 무엇보다 기쁨의 가장 완전한 형태는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상태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은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허망한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함께하며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평화가 너희와 함께!”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③ 평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일 먼저 하신 인사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 가운데서도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신약성경에 ‘평화’라는 단어가 88번이나 나오는 것만 봐도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참평화는 세상의 숱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유지되는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걱정과 근심, 집착과 상처 등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실 내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금 내 마음이 평화롭다면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무례하게 굴고, 나에게 잘못을 해도 쉽게 받아 주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화가 잔뜩 나 있다면 누가 나에게 잘해 주고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도 짜증이 나고 고맙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는 우리 삶에 참으로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란 어떤 상태일까요? 선불교(禪佛敎)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보리 달마(菩提達磨) 대사가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 토굴에서 거처할 때, 혜가(慧可)라는 제자와 나눈 대화는 마음의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합니다.
“혜가가 달마에게 물었다. ‘제 마음이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 마음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이에 달마가 말했다. ‘어디 자네 마음이라는 것을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안정시켜 주겠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혜가는 스승에게 오랫동안 마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러자 달마는 대답하였다. ‘자, 내가 이미 자네 마음에 평화를 주었네.’”1)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늘 심란하고 고뇌에 가득 찬 마음이 잠시라도 평화로울 수 있도록 명상을 하기도 하고 요가나 단전호흡을 배우기도 합니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기도 하지요.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내 밖에서부터 찾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정작 내 안에 있는데 우리는 그 마음의 평화를 밖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음은 원래 평화롭습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오히려 숱한 생각들이 원래 평화로운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 나와 내 가족만 챙기고 싶은 이기심, 원하고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로 인해 깨끗한 마음이 흐려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이 뜻대로 잘 되지 않아 속상해하다가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래 평화로운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고요히 주님 앞에 머물러 내 마음을 흐리게 만드는 숱한 상념들을 가라앉히면 맑고 평화로운 마음이 보일 것입니다. 물이 바람에 일렁여 혼탁해지듯이 많은 생각들은 오히려 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립니다. 바람이 멈추면 물이 잔잔해지고 맑아져 푸른 하늘이 그대로 비치듯, 내 마음도 온갖 상념들의 바람을 고요히 잠재우면 원래의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으며 평화를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는 모든 성현들이 추구하는 경지였습니다. 공손추와 맹자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의 경상 지위에 오르시어 도를 행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업을 이루거나 왕업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마음이 동요되시겠습니까? 동요되지 않으시겠습니까?’ 맹자가 말하였다. ‘아니다. 나는 마흔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2)
제나라는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자 선진국이었습니다. ‘그 제나라의 제상이 되어 평소 소신 있게 생각해 오던 이상, 즉 도(道)를 이룰 수 있게 된다면, 아무리 스승님이시지만 마음이 동요되시겠지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실 공자도 그렇고 맹자도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 도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아무도 등용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평생의 꿈을 이루게 되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요동칠까요? 하지만 맹자는 담담합니다. 그는 마흔에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공자도 마흔의 나이에 “불혹(不惑)”했다고 했지요. 그래서 예전에 저는 마흔쯤 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크게 미혹되지 않는 경지에 이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지요. 오히려 중년의 나이가 되면 유혹거리도 더 많고, 마음이 교만해지거나 소심해지는 등 흔들리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고 노력해야만 “불혹(不惑)”이나 “부동심(不動心)”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맹자는 항상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대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마음의 수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유혹과 고통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대장부(大丈夫)”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부유한 재산과 존귀한 자리가 그의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가난과 비천함이 그의 절개를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협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런 이를 일컬어 대장부라 하는 것이다.”3)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바뀌는지 모릅니다. 조그마한 고통이나 상처에도 아파하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흔들리며, 기쁨이나 분노, 슬픔이나 즐거움에 요동을 칩니다. 성령의 열매인 평화를 구합시다. 주님의 참된 평화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평화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느껴 봅시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빨리 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인내를 배우자.”
- 동양의 덕목으로 풀어 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 ④ 인내
‘빨리 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묵묵히 내가 할 일을 하며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사실 이는 이제 한국인의 문화만은 아니겠지요. 오늘날 무한 경쟁 사회에서는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이 미덕입니다. 빨리 사태를 파악해야 하고, 빨리 연구 성과를 내야 하며, 빨리 좋은 결과를 내서 빨리 성장할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인터넷 속도도 빨라야 합니다. 외국 여행을 가면 선진국인데도 인터넷 속도가 느린 것에 놀라고 답답해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은 기다림을 더 못 참는 것 같습니다. 문자를 보냈는데 바로 답이 오지 않으면 답답해합니다. 차가 많아 교통이 혼잡할 때 조금이라도 빨리 가기 위해서 난폭 운전을 하고 끼어들려는 차가 있으면 화가 치솟습니다. 온 세상이 속도를 내며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쳐댑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성령께 ‘인내(忍耐)’의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인내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때를 참고 기다리며, 마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충실한 종처럼(마태 24,45-51 참조)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성실히 살아가는 힘입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고, 나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효과를 내기 위해 무리하는 것을 “조장(助長)한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맹자』에서 유래했습니다.
“송나라 사람 중에 벼 싹이 자라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뽑아 올린 자가 있었다. 그가 어리석게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피곤하구나. 내가 벼 싹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했다. 아들이 놀라 달려가서 살펴보니 벼 싹은 이미 말라 있었다. 천하에 벼 싹이 자라는 것을 돕지 않는 자가 적다. 이익이 없다고 하여 버려두는 자는 김을 매지 않는 자요, 그것이 자라는 것을 돕는 자는 벼 싹을 뽑는 자다. 무익할 뿐 아니라 또한 해치는 것이다.”1)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벼농사를 처음 지었는지,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은 모내기를 하고는 매일같이 논에 가서 벼가 얼마나 자랐는지 지켜봤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안에 눈에 띌 만큼 빨리 자랄 리가 없지요. 벼가 빨리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 사람은 벼를 조금씩 뽑아 올렸어요. 눈으로 보기엔 벼가 많이 자란 것처럼 보이겠지요. 하지만 무리하게 뽑아 올린 벼 싹이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었겠지요. 그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 자랑하듯이 이야기하니 놀란 아들이 달려갔지만 이미 벼 싹이 말라죽은 후였습니다. 맹자는 덕을 쌓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유혹이 “조장(助長)”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꾸준히 공부하고 덕을 쌓으며 선을 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게 결과를 바라다 보면 조장하게 되고 결국 다 망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시련이 닥치겠지만 실망하지 않고 인내를 갖고 꾸준히 일을 해 나간다면 목표한 바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하거나 악기를 배우는 것에도 인내가 필요하듯이 신앙인의 삶에도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로이 주님의 말씀을 키우는 사람만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조금 해 보고 안 되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찾아 나서지요. 빨리, 바로, 즉석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즉석(卽席)’이란 말이 ‘그 자리에서 바로’라는 의미입니다. 바쁜 세상에서는 식사도 즉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인스턴트식품이 유행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고 바로바로 해결되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기도했는데 당장 들어주지 않으시면 하느님께 실망한 채 떠나가 버립니다. 이러니 꾸준히 인내하며 충실히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은 오히려 미련한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고보 서간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야고 1,3-4)
동양의 성현들은 이렇게 쉬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를 자연의 운행에서 본받았습니다. 특히 하늘은 한결같이 우리 위에서 쉬지 않고 자신의 본분을 다합니다. 태양이 뜨고 지고, 사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옵니다. 『주역』에서는 이런 하늘의 도를 보고 본받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합니다.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니, 군자는 이것을 보고 본받아, 스스로 굳건한 마음으로 쉬지 않고 노력한다.”2)
여기서 나온 말이 “자강불식(自强不息)”입니다. 대자연의 변화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한결같습니다. 그처럼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굳건한 마음으로 지치거나 게을러지지 않도록 노력하며 덕을 쌓아 나가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인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인내로이 기다려 주시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다른 이들의 잘못을 참아 주고 용서해 주는 마음입니다. 또한 나 자신도 인내로이 시련을 이겨 내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내가 얼마나 소중한 열매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열매 맺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인내를 뜻하는 한자 “인(忍)”은 칼날 인(刃)자와 마음 심(心)자가 합해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인내란 칼로 마음을 도려내듯이 힘든 작업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칼로 새기듯이 강한 의지로 참고 이겨 나가야 하는 것이 또한 인내입니다. 세상은 빠른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것은 회피하려고 합니다. 이런 세상 안에서 우리 신앙인은 더욱 자신의 믿음을 굳게 하며 인내로이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비록 그 길이 힘든 십자가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꿋꿋하게 사랑을 실천합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