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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73) 마음을 깨끗이 하려면?
Q. 마음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비우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고민입니다. 제 마음은 늘 우울하거나 불안하거나 아니면 잡스러운 생각으로 가득해 전문가들 처방처럼 마음을 비우려고 애를 쓰고 쓸데없는 생각들을 없애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더 흉한 생각들이 떠올라 괴롭습니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A. 마음 안에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떠오르면 참 괴롭습니다. 특히 기도할 때 그런 것들이 올라오면 내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닐까 혹은 나는 왜 마귀의 유혹을 심하게 받나 하는 자괴감에 시달리지요.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하고 싶은 욕구에 더 시달리게 됩니다.
많은 분이 그런 괴로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 구조에 대한 무지함 때문입니다. 프로이드를 비롯한 수많은 심리학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 마음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란 어마어마한 창고가 있습니다.
무의식 안에는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경험한 것뿐 아니라 인류가 공통으로 갖는 기억까지 다 저장돼 있습니다. 예컨대 산에서 뱀을 보면 사람들은 다 까무러치듯 놀랍니다. 왜 그럴까요? 조상이 뱀에 물린 기억이 심리적으로 유전돼 무의식 안에 저장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뱀에 대한 부정적 표현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것들로 가득한 무의식은 낮에는 심리적 제어장치 때문에 잘 모르지만 밤이 되면 무의식 창고의 문이 활짝 열려 온갖 것이 꿈에서 활개를 칩니다. 그래서 길몽이나 흉몽 혹은 악몽을 꾸는 것입니다.
문제는 낮에도 밤과 같은 현상이 일어날 때입니다. 바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는 일상생활을 할 때에 외부로 향했던 마음의 눈이 자기 안으로 향하는 시간입니다. 즉 우리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이때 무의식은 자기를 바라보는 이의 눈앞에 온갖 것을 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기도하려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흉하고 천한 허상을 보면서 놀라거나 스스로 자기 혐오감을 갖고 마귀의 짓이라면서 거부하거나 없애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마음을 정화하기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시도는 공기 중의 먼지를 다 없애고 싶다는 생각과 같은 것이어서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답을 루카복음 2장 1-7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갔는데 여관에 방이 없어서 구유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 여기서 여관은 우리 마음을 상징합니다. 우리 무의식은 여관방 같아서 온갖 것들이 다 들어차 있습니다. 마음 안에는 수많은 생각이 들어오고 나갑니다. 그 생각들은 어떤 것은 짧은 시간 동안 어떤 것은 아주 긴 시간 머물거나 혹은 마치 자기 집인 양 아예 자리를 잡고 사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관에 묵는 손님들 질이 좋지 않으면 여관 자체의 질이 낮아지듯 마음 안에 머무는 생각도 수준이 낮아집니다. 질이 좋지 않으면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내 마음 안에 성가정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성가정을 초대하면 당연히 나를 찾아오는 생각도 그에 합당한 것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베네딕토 성인은 당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기도하고 노동하는 수도자의 삶을 살되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일도 소홀히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이 수도원 방을 여관방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묵는 사람들은 당연히 수사들과 함께 기도하고 묵상해야 했기에 영성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성인이 뜻한 바는 방문객들이 수도자들의 게으름을 막는 역할을 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갈파한 베네딕토 성인의 탁월한 수도원 운영방식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람 마음에는 늘 손님들로 북적입니다. 문제는 어떤 손님을 초대하느냐는 것이지요. 다 쫓아내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시간을 자주 갖고 성가정을 우리 마음에 머물게 하는 것이 마음을 비교적 깨끗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우리는 성탄 때 구유를 만들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래를 부르며 목가적 풍경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마구간은 동물 냄새로 가득하고 옆의 여관방에는 가득 찬 손님들이 밤새도록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72) 나는 왜 이 모양인가요?
Q. 신부님, 저는 자주 우울한 생각이 들곤 해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인가?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리도 지지리 못났고 하는 일마다 안 되는가? 매일같이 반복되는 나의 인생에서 무슨 보람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런 나의 인생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줄줄이 올라오면 마음이 공허해지고 심한 심리적 갈증을 느낍니다. 주위 사람들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살면 된다고 조언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요.
A. 우울한 생각이 떠올라오면 참 힘들지요. 쉽게 없어지지도 않고 마치 다리에 붙은 질긴 거머리처럼 잘 떨어지지 않고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내 마음의 눈이 나의 좋지 않은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해 있을 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밥을 먹다 보면 가끔 이물질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그냥 건져내고 나머지 밥을 먹는데, 어떤 사람은 짜증을 내면서 수저를 내려놓고 ‘왜 내 밥에만 이런 것이 들어갔을까’ 하고 우울해합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울함이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실제 상담사례를 살펴보면 우울함을 스스로 불러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울한 생각은 선택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지 않음에도 왜 그런 우울한 생각을 선택하는 것일까요?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 만물이 연결돼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즉, 만물은 서로 아무런 연결고리 없이 흩어져 존재하는 것이라는 분열적 사고방식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고립을 자처하고, 스스로 자신이 만든 마음의 감옥 안에 갇히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인지 우울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미간이 좁습니다. 눈을 들어 넓게 보지 못하고 오로지 좋지 않은 아주 작은 점 하나만 보려고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많아서입니다. 그래서 심리치료사들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우울한 생각이 들면 자기 미간을 손으로 문지르라고 하기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눈을 들어 다른 좋은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만사 중에 순도 100%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예쁜 여인도 얼굴에 잡티는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고 나면 배설의 불편함과 음식물 쓰레기라는 현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삶은 불편함이 그 본질이란 것입니다. 그런 불편함을 당연하게 여기면 살만한 것이고 작은 불편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면 살 맛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에 대해 지나치게 우울한 심리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문제가 우울함이 아니라 비현실적인 유아적 사고방식에 있음을 인식하고, 좀 더 마음을 넓히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가 불편함을 경험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위로가 아니라 반대로 쓴 약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가치감’을 갖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 57절을 보면 요한 세례자 탄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기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아기가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하면서 아기에게 희망을 품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며 하느님 섭리는 요한 같은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범인들은 그냥저냥 서럽게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뜻밖에 많습니다. 자기 가치감이 지나치게 낮은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 하는 가장 기본적 생각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 중 일부이며, 시간과 공간의 한계 속 일부”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이 다른 것들과 분리돼 있고 소외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일종의 착각이란 것입니다.
켄 윌버는 “우주에는 자기 진화의 힘이 있다. 사람은 우주의 자기 진화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끝없는 대우주 안에서 각자 해야 할 일, 실현해야 할 의미를 가지고 지금 여기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나 윌버의 말은 특정 인물들을 편애하는 것이 하느님 뜻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자기 가치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요? 나를 초월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즉,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그림을 그리거나 사물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눈에 하찮게 보이는 것들에서도 생명력을 느끼게 되고,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한 인식도 깊어지게 됩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71) 정서적 발작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나요?
Q. 저는 가끔 정서적 발작이 일어나곤 합니다. 무언가 제 뜻대로 일이 안 되거나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면 꼭 혼이 나간 사람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혼자 중얼거리고, 방구석에 콕 틀어박혀 머리를 쥐어박거나 머리털을 뜯는 등 이상행동을 해서 부모님에게서 “너 미친 거 아니니?” 하는 소리를 듣곤 합니다. 물론 제가 정말 미친 것은 아니고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도 일시적으로 정신 나간 듯한 발작 행동을 하곤 하는데, 이런 것은 어떻게 고칠 수 있나요? 제 말을 들은 어떤 분은 성모신심을 가지라고 하던데, 제가 성모님의 어떤 면을 본받아야 하나요?
A. 우리는 대개 정서적 발작 증세를 갖고 살아갑니다. 마음이 건강할 때는 자기 자신의 파괴적 속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필요에 따라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또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을 익히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지를 보일 수 있습니다. 인생을 보는 시각을 바꿈으로써 과거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인생을 나쁜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고 건설적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마음이 병들면 불행한 일이 생기자마자 초조해하고 자포자기하려고 합니다. 술과 한탄을 방어막 삼아 자신의 무기력을 감추려는 본의 아닌 비겁한 행동을 합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일시적 안도감을 느낄 뿐이고 감사하는 대신 비관적 심리상태에 빠지기 쉽고, 평화로울 때도 다음에 올 위기를 생각하면서 전전긍긍한 채로 살아갑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상태가 마음 안에서 들락날락 거리기에 일반적으로 사람은 정서적 발작 증세를 갖고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서적 발작 증세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우선 문제와 불행감의 대부분은 어떤 일에 깊이 빠져들 때 생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소한 일에 너무 깊이 생각하고 몰입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분석적 사고방식은 자칫하면 편협하고 부정적 결론에 이르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바로 편집증적 성격장애자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게다가 이러한 삶은 마음에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그 안에서 미로처럼 길을 잃고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합니다.
두 번째는 생각을 관리하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를 교정하는 정서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기분에 따라 인생을 보는 눈이 180도 바뀌는데, 기분과 시각을 바꾸는 이런 정서체계를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열악한 상황일지라도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 어떤 충격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회복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 생각의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인생에 대한 긍정적 느낌을 키워나갈 때 인생을 보는 안목도 한 단계씩 올라가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1905~1997)이라는 심리학자는 이런 조언을 해줍니다.
“사람은 인생으로부터 의미와 사명의 물음을 받는 존재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다 할지라도 그렇게 된 데는 무언가 의미가 있기에 그 의미에 대해 깨닫고 배우도록 재촉한다. 인생이란 그와 같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며, 정신적 성숙과 영적 성장의 기회이자 시련의 장이다. 인간의 자유는 조건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조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의 자유이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사람을 성숙하게 하려는 신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영성가들 의견과 일치하는 주장입니다.
만약 빅터 프랭클이 편안한 삶을 살면서 이런 말을 했다면 주위 사람들에게서 '배불러서 하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서, 허덕이는 삶의 자리에서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기에 그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루카복음 1장 39-56절을 보면 성모님께서 사촌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마니피캇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대목이 나옵니다. 마니피캇은 성모님이 행복감으로 가득한 상태에서 당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치 득도한 승려가 시 한 수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평범한 처녀가 아니라 이미 정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임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마리아를 부러워만 할 일이 아니라 빅터 프랭클의 조언처럼 내 인생의 의미, 나의 사명에 대해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성모님처럼 마니피캇을 부를 은총의 기회를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70) 성모님을 본받고 싶어요
Q. 성경을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처녀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서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고 하자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그 인사말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대목을 보면서 처녀 마리아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사람도 아닌 천사가 나타나서 말을 거는데 한치 놀람도 없이 대답하는 마리아의 뱃심이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누가 제게 말을 걸라 치면 제풀에 놀라 도망갈 정도로 뱃심이 약해서 부모님은 저를 보고 놀란 토끼 같다고 놀리시곤 했습니다. 또 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살아 힘이 많이 듭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성모님처럼 강건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A. 마리아의 강건함을 알려면 마음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격의 여러 구조가 활동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요.
외부 자극에 의해 정신 에너지가 형성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만약 외부에서 아무런 자극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정신은 고인 물처럼 썩게 됩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외부에서 자극이 주어지면 늘 새롭게 변화하고 완성될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융은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합니다. 정신은 상대적 안정성에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새로운 것들이 정신 안으로 들어오면 교란효과가 나타납니다. 아무리 작은 자극일지라도 정신적 안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현상은 정신체계 내의 에너지 재분배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정신이 완전히 열려있으면 혼돈이 오고, 완전히 닫혀있으면 침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늘 외부에 대해 마음을 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기적으로 일상사에서 초연해지는 즉, 자기 안으로 침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와 일상이란 두 가지 시간을 조화롭게 가져야 건강하고 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렇게 사셨고 또 수도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삶의 패턴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자매님은 심리치료적 관점에서 좀 더 설명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자아존중감이 낮아서입니다. 자아존중감이 약한 사람들은 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가치한 인간이야’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뭐라 할까’ 등 부정적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하하고 살기에 매사 자신감이 없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거절 표현을 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피해입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로 자기주장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장 안 좋은 것은 자신의 능력보다 낮은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를 들면 결혼할 때 자신과 걸맞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수준이 맞지 않는 낮은 수준의 사람을 선택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자처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할까 봐, 혹은 결혼생활이 실패할까 봐 고3 수험생이 자신의 실력보다 낮은 대학을 선택하듯 배우자를 고른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는 별 관심 없이 활력 없고 지루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매님은 정말 성모님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께서 순종의 삶, 침묵의 삶을 사셨다고 믿지만 실제 성모님은 그렇게 동양적 현모양처형 성격을 가진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여장부다운 기개를 가진 분이고, 아주 당찬 분이셨습니다.
예를 들어 “주님의 뜻이오니 내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지만, 그 이전에 천사에게 자신이 처녀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할 정도로 담이 큰 분이었습니다. 또 고집도 만만치 않은 분이셨음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신 주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음에도 밀어붙이셔서 결국 기적을 얻어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공생활을 하실 때는 뒷전에 계신 것이 아니라 여인들을 동원해 제자들을 수발했고, 아드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초기 교회공동체의 정신적 어머니로서 큰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은 대범한 분이셨는데, 이것은 그만큼 당신의 자존감이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매님도 성모님의 이런 면모를 본받아 자존감을 키우길 바랍니다.
[홍성남 신부의 아! 어쩌나] (169) 의심이 너무 많아요
Q. 제 남편이 너무 의심이 많아 상담을 청합니다. 결혼 전에 만난 남편은 아주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깊이 있게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 결혼했지요. 막상 부부생활을 하다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할 때가 자주 보여 괴롭습니다.
처음에는 직장생활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더군요. 그냥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 내 모든 사람을 지나치게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사람들이 늘 자신을 멀리하고 따돌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특정 한 사람을 아주 심하게 욕하고 미워해 듣기 민망할 정도입니다. 직장상사인데 자기를 이유 없이 무시하고 부당한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다 못해 제가 남편 직장에 찾아가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남편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장에서 남편은 아주 별종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직원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남편 잘못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해주면 고마운 마음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왜 자기를 미워하느냐고 입에 거품을 물고 대들고, 심지어 자신이 잘못한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덮어씌우곤 해서 직장 안에서 인심을 잃을 대로 다 잃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늘 냉소적이고 논쟁적인 데다 늘 화가 난 얼굴이어서 놀러 갈 때도 남편을 일부러 데려가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저까지 의심해서 더 어처구니 없는 심정입니다. 제가 자기에게 불성실하다, 사랑이 식었다고 하더니 심지어 다른 남자와 사귀지 않느냐고 의심합니다. 어떤 때는 제 사물함을 뒤져서 속을 뒤집어놓기도 합니다.
이런 남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했더니 차라리 이혼하라고 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이고, 제가 사랑해서 한 결혼을 그런 식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남편은 편집증적 사고를 가진 분인 듯합니다. 이런 분들은 근거 없는 의심과 불신감에 지나치게 집착을 해서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같은 편집증적 사고를 가진 분들에게는 몇 가지 심리치료 방법을 알려 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형제님이 믿을 만한 어떤 사람 즉, 대부님이라든가 본당 신부님 또는 수녀님처럼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대개 이런 분들은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서 의심받고 불신당한 상처가 깊은 분들이기에 마음 안에 어린 시절 그 대상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 대한 불신감이 깊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처를 아물게 하려면 자신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그분들에게 전폭적 지지와 이해, 돌봄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 아픈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고 마음 안에 기본적 신뢰심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전문상담가 상담도 필요하지만, 지속적 신뢰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본당 단체활동을 통해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치료적 관점에서 아주 유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레지오 마리애라는 단체에 가입하실 것을 권합니다. 매주 기도와 회합을 하는 단체라서 심리적 유대감이 가족적이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흑은 남편의 취미활동 여부를 고려해 다른 단체활동을 하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가장 안 좋은 것은 혼자 있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대개 혼자 있으면 매우 부정적이고 편집증적 생각에 깊이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좋은 상담가를 만나 장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상담을 하는 것입니다. 상담가 역할은 내담자가 가진 의심이나 왜곡된 사고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 현실감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일반인들이 내담자 상태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자기 기분에 휘둘려 내담자에게 윤리적 관점에서 “무엇을 하라”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충고하기도 하는데, 선무당이 사람 잡듯 자칫하면 내담자 마음을 더 닫게 하고, 불신감을 더 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문 훈련을 받은 상담가에게 남편을 맡기는 것이 좋을듯합니다.
집에서는 가능하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대개 편집증적 사고를 하는 분들은 마음이 늘 편치 않고, 늘 혼란스럽고 불안한지라 외부 환경만이라도 편하게 해준다면 내적 상태가 그런대로 안정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성경구절을 하나 추천합니다. 마태오복음 10장 31절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종이에 적어 늘 품에 지니고 다니다가 마음이 편치 않을 때 꺼내서 묵상하라고 하십시오.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