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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언어생활
출 23: 1-9
어떤 공동체나 집단이든지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스라엘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은 혈통이라고 생각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혈통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아니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하나님과 서로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신앙의 힘이었다.
우리 한국문화는 정의 문화이기 때문에 정이 진실보다 더 중요시 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인정의 끄나풀이 대단히 중요하다. 인정의 끈으로 서로 얽혀있고 유지되는 것이 한국인의 삶이다. 여러 가지 인맥이 있다. 교회도 인정에 끌려서 교회 다니고 교회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정만 통하면 무엇이든지 다 된다.
그러나 교회를 하나로 묶어주고 우리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진정한 힘은 정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서로에 대해 참된 진실을 말하고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삶에 있는 것이다.
제 9계명에 보면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위대한 국가를 세워 나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서로에 대해 진실해야 하며 진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해지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보다 진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교회가 성장하고 성숙해진다는 것도 결국 하나님 앞에 보다 진실된 공동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 integrity란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격의 통합성 즉 진실성과 성숙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을 진실하다고 말하는가? 많은 경우에 이것을 솔직한 것과 혼돈할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감추어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 사람을 '참 솔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은 그런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여과 없이 그대로 털어놓는 일은 속에 더러운 것을 배설하는 행동일 뿐이지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자기도 책임질 수 없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놓는 행동을 정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한참 잘못된 생각이다. 히브리인들에게 '말'이란 단순히 말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었다. 히브리어로 '말'을 '따발'이라 하는데 그 뜻은 '사건'이란 뜻도 담고 있다. 말이란 실제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다. 말이란 하나의 사건을 창출해 간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은 진실하고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1. 허망한 풍설(루머)을 삼가야 한다.
하나님은 거짓 증거를 가장 미워하신다. 거짓증거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허망한 풍설'이다. 하나님은 확인되지 않은 말을 퍼뜨리거나 헛소문을 내어서 다른 사람의 인격을 헐거나 공동체를 해치는 것을 가장 미워하신다.
1절 말씀에 보면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했다. 여기서 '허망한'이란 말은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전파하지 말라'는 말은 전하고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고의적으로 남을 해치는 악평이나 험담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민족은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퍼뜨리지 않도록 교육받고 훈련받았다. 어떤 공동체에서는 작은 소문이 몇 사람의 입을 거치면서 마치 눈덩어이가 불어나듯이 커지고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는 살인무가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공동체에서는 몇 사람이 헛소문을 아무리 떠들고 다녀도 그것을 믿어주지 않아서 얼마 후에는 스스로 시들해 버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의 진실성과 성숙성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진실하고 성숙한 사람들은 확인되지 않은 루머의 악독성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사탄의 역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진압하는 일을 하며, 그 말에 동요되거나 그 말을 퍼뜨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그 때 그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제 정신을 차리고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여러분! 누가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에 잘 넘어 가는가? 항상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사람들이다. 자기자신에 대해 열등의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 또한 사탄은 많은 거짓정보를 제공하고 들려준다. 귀에 솔깃한 이상한 풍문을 들려준다.
혀를 잘 다스리는 것이 참된 신앙이고 경건이다. 야고보서 1장 26절에 보면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실수가 많지만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라고 했다. 우리가 말을 잘 다스리고 혀를 통제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혀는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든지 아니면 마귀를 위해 사용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둘 중의 한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의 혀는 누구를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 환자가 병원에 가면 의사가 건강을 진단할 때 입과 혀를 보아 건강상태를 대강 짐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언어와 혀를 보아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악인과 연합하여 모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신다. 여러분! 거짓풍문만이 아니라 거짓 증거나 거짓 진리를 따라가는 것도 큰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치공박이나 검찰조사를 보면 하도 거짓증거가 많아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짓인지 도무지 구별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한 마디로 혼돈을 불러일으킨다. 너무 거짓말이 심하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된 탁류 속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 전서 3장10절에는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비방하는 허망한 말을 들을 때 상대방이 미워지고 따라서 나도 질세라 상대방을 비방하기 쉽다. 그러면 말로써 말이 많아져서 결국 감정을 부채질하고 비방의 속도를 가속화하게 된다. 그 때 문제는 더욱 꼬이게 된다. 그런 중에 가장 기뻐하는 것은 사탄이요 공동체와 성도들은 많은 상처를 입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은 가려지게 된다. 여러분! 허망한 이야기를 대항하는 가장 좋은 비결은 침묵을 지키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잠잠케 하시고 해결해 주신다.
피터 황제는 자기 앞에서 남을 비방하는 신하가 있으면 그의 말을 가로막고 '그건 그렇고 그 사람에게 좋은 점은 없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탁월한 점을 말해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단순히 행위로 나타난 결과만을 보고 죄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 이전에 언어와 언어 이전에 마음의 생각을 보고 판단한다. 마음의 동기가 얼마나 거짓이 없고 순수하며 진실된가를 하나님은 보신다.
여러분! 우리의 말 한 마디가 남의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옛말에도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스펄존 목사님은 '농담이라도 거짓말을 하지말자'고 했다. 허망한 이야기를 할 바에는 차라리 내 혀를 깨물겠다는 청교도들의 신앙을 따라서 살아야 하겠다.
사실 거짓말을 하려면 머리가 복잡하다. 거짓말 한 것까지 다 기억해야 하니까 머리가 나쁘면 거짓말도 못한다. 금방 탄로가 나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말하면 마음이 편하다. 머리가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하루를 행복하게 살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말(자동차)을 사라' 했고 '일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일생을 행복하려면 진실하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왜 진실하게 못사는가? 요새처럼 혼탁하고 타락한 세상에서는 정직한자가 손해보고 고통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다수의 생각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2-3절에 보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 하지 말지니라" 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수라고 해서 힘으로 밀어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주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진실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소수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다. 힘이 있을 때 더욱 조심하고 더욱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내게 힘이 있고 다수가 내 편에 있을 때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할 때가 많다.
교회가 민주주의제도를 발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특별히 장로교회의 제도는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도움과 공헌을 했다. 그러나 언제인가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민주주의는 아니다. 신본주의이다. 제가 카나다 있을 때 오타와라는 도시에 갔더니 한인교회가 그 때 하나 있었는데 주일예배를 두 주일에 한 번 드린다고 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얼마 안 되는 교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는데 모두 바쁘고 해서 매주 모이는 것은 부담이 되니까 격주로 두 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다수 가결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성경에 성수주일을 하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매주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물론 그 후부터는 매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제가 말씀드려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이해가 가시는 줄 안다. 진리를 투표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상식이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 중에 종종 상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자기가 믿는 것을 너무 절대시하고 밀어붙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도 상식이 필요하다. 신앙이 깊으면서도 상식적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대단히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신앙과 상식이 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대개 신앙이 좋은 분들이 독선적이고 주관적으로 생각하고 밀어붙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신앙이 약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상식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회가 민주적 방법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독선과 주관적인 생각이나 일시적인 충동에 치우치지 않고 보편 타당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좋은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러한 다수의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다수의 횡포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빌라도는 규례를 따라 유월절에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려고 민중들에게 물었다. "예수를 놓아주랴,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런데 민중은 예수를 선택하기보다는 바라바를 선택하였다.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받으라"고 소리쳤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민심을 의식해서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역사의 큰 오판을 내리고 말았다.
3. 집단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지 아니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다.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은 항상 어떤 그룹에 속하게 되어있다. 여기에서 집단이기주의가 생겨난다. 이 집단이기주의가 진리를 가로막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행동을 하기 쉽다. 오늘 날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집단이기주의가 너무 심한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자기를 돌봐주고 자기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준 자기가 속한 집단이 어느 날 진실하지 못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기가 속한 집단이 손해를 보게 된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그것을 지적하면 자기가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며 배신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이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 것인가? 기생 라합은 자기 집단을 배신하므로 그녀의 믿음이 인정을 받았다. 여리고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과감히 집단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 편에 서고 진실 편에 서며, 진리 편에 섰다.
여러분! 왜 우리가 바른 선택이나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인가? 집단이기주의 때문이다. 깽단에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마음대로 빠져 나오지 못한다. 그 집단에서 빠져 나오려면 배신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도 어떤 의미에서는 유대집단에서 나오기 위해 배신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위협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다.
오늘 본문 4-5절에 보면 무엇이라 했는가?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려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리니라."
여기에 기록된 표현은 간단한 표현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못 본 체하지 말고 도로 찾아주며, 나귀가 짐에 눌려 고생할 때도 도와주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감정과 사건을 혼돈하지 말고 처리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감정과 사람을 혼돈해서 사람이나 짐승까지 미워하게 되는 경우를 보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종종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일하는 경우를 본다. 우리는 공과 사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사람은 정만 통하면 무엇이든지 다 동의하고 통과시킨다. 그러나 정이 통하지 않고 감정이 상하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한다.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자세이다.
4. 정직과 의를 회복하자.
6-8절까지 읽어보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옳은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불공평하게 처리하거나 뇌물을 받고 악인을 의롭다고 말하거나 편을 들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뇌물은 우리의 판단의 눈을 어둡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에 국무총리를 지내셨던 이영덕 장로님이 오셔서 간증하는 말씀 중에 늘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있다. 어려서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을 인도해서 교회에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길 골목에 엿을 파는 집이 있었다. 겨울에 추우니까 엿 망태기를 밖에 두고 주인은 방안에 들어 가서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엿을 마구 손으로 쥐고 도망을 친다. 그래서 교회 나갔던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도 듣지 않고 들고 도망간다. 뿐만 아니라 자기 포켓에다가 엿을 집어넣어 준다. 자기 포켓에 엿이 들어오니까 마음이 좀 달라 지더라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이해관계에 얽히면 생각이 달라지기 쉽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흐려진다.
에베소서 4장 25절에 보면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했다. 우리 한국 크리스천의 약점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신앙이 좋다는 분들 중에 보면 거짓말을 잘 하고 사기를 치며, 정직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을 많이 볼 때가 있다. 어떤 분이 미국에 여행하면서 공항에서 질문을 던지는데 가방을 항상 당신이 간수했느냐? 위험한 물건이 있느냐? 질문하는데 답하는대로 다 믿어주는 것이 참 이상하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요새는 좀 달라졌지만 서로 믿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참 귀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하도 속아서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물건을 살 때 각국 사람마다 질문 던지는 말이 다른데 미국사람은 '얼마요?' 값에 예민하고 독일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튼튼하냐?' 물으며, 프랑스 사람들은 '이것이 최신 유행이냐?'를 묻는데 한국사람은 '진짜냐?'를 묻지 않는가? 그만큼 속고 속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국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하는데 한국사람을 잘 안 믿는다고 한다. 특별히 목사를 잘 안 믿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방문비자 받을 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각서 써 놓고도 안 돌아오는 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번 약속하면 그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부도수표를 난발하듯이 거짓말을 떡 먹듯이 하면 곤란하다.
특별히 말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향을 주는 능력이 담겨있다. 전에 어떤 가수는 항상 '가을의 낙엽처럼 사라지리라' 노래하더니 그렇게 사라져 갔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권세와 힘이 있으셨던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무기의 힘보다 펜의 힘이 더 강하고 총이나 주먹에 의한 폭력보다 보다 말에 의한 폭력이 더 무서운 것이다. 언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고 축복이지만 이 언어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을 때가 참 많다. 특별히 가까운 사이에 그런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선물로 항상 의롭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사용하며,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축복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여야 하겠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겠다.
지난 7월호 월간목회에 보니까 제가 잘 아는 1.5세 되는 목회자 한 분이 그런 글을 썼다. 보스톤 어느 교회에서 4년간 부교역자로서 목회훈련을 받았는데 교회가 어려울 때 몇 사람이 제직회에서 하도 부당하게 굴어서 젊은 나이에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혈기를 부렸더니 담임목사님이 '김목사, 그들이 모두 성자라면 자네나 나를 왜 이 교회가 필요로 하겠는가?' 하면서 충고해 주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아 나는 그들 때문에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솔직히 그들을 사랑하기가 어렵지만 자네마저도 그들을 미워하면 그들은 어느 목사에게 사랑을 받으라는 건가. 정말 나를 위한다면 자네는 그들을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사랑해 주게나.' 이 말이 늘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말은 어떠한가? 혹 나의 말속에 늘 가시가 돋쳐 있지 않은가? 나의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 받은 심령은 없는가? 여러분! 사랑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한 마디가 남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며 변화를 갖다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통해 항상 남을 세워주고 상처 입은 심령과 마음을 치유하며,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세워가며, 죽어가는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내는데 사용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