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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해 선조님께서 태어 나셔서 자라신 마을 입구에 그 유명한 오수 마을이 있었다. 오수 마을의 내용을 참고 삼아 남긴다,
1985년 4월 1일, 전북 임실군 삼계면 죽계리 先塋(선영)과 둔남년 둔덕 방축리 先塋(선영)과 8대조부님의 誕生地(탄생지)를 임실군 종친 梁 漢鐸(양한탁) 梁仲基(양중기) 두 분이 南原梁氏(남원양씨) 丙部郎中派中(병부낭중파중)에 郡守公派譜(군수공파보)를 일가들이 힘을 합하여 편찬하자는 의견을 제시해서 선영의 사진과 그곳 양씨 문중의 기록을 도와 달라는 취지로 방문하였다.
그래서 1986년 병인년 3월 20일에 들어간 인쇄가 1986년 병인년 3월 25일에 丙寅譜(병인보) 발행을 하게되어 기쁜 마음으로 서울에서 종친회의를 열고 회의를 진행 하던중에 보첩을 살펴보니, 양한탁 아재라는 사람과 양중기라는 할배라는 두 사람이 지어준 ①序文(서문)과 ②發刊辭(발간사)에는 處海(처해) 先祖任(선조님)의 親筆(친필)로 된 月谷書院鳩財通文(월곡서원구재통문)의 考證(고증)등은 우리 門中(문중)의 자랑이다. 구재통문 원본을 소장하고있는 梁芳秀(양방수) 族姪(족질)은 이번 譜事時(보사시) 考證(고증) 열람에 있어 많은 助力(조력)을 하였으며 行狀(행장) 跋文等(발문등)에 協助(협조)와 勞苦(노고)가 至大(지대)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梁芳秀(양방수)가 지은 ①序文(서문) ②發刊辭(발간사) ③郡守公諱峻行狀(군수공휘중행장) ④石磎公行狀(석계공행장) ⑤僉正公行狀(첨정공행장), ⑥嘉義公行狀(가의공행장) ⑦月谷書院鳩財通文(월곡서원구재통문)의 번역, ⑧跋文(발문)을 내용을 약간 바꾸어 고치고 아예 두분이 번갈아 가면서 지었다고 僞證(위증)을 해 놓았다.
아니 이런 할배, 아재라는 종친이 자기가 쓴것도 아닌데 공동으로 이름을 올려 일가간에 화합을 하자고 하면서 우리 문중에는 이런 고증을 하고 글을 지을 후손이 없으니 족질인 양방수가 해야 된다며 부탁을 해서 글을 써서 大田市 東區 元洞 92번지에 있는 農經 出版社(농경출판사)까지 가서 주고 올때 잘하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는 두분이 모의해서 양한탁씨와 양중기라는 아재 할배라는 두 爲人(위인) 이 자기들이 이 모든 글을 지었다고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거짓으로 글을 남겨 놓는것은 참으로 수치 스러운 일들이라고 나무라고 차리를 박차고 나왔다. 많은 종친들이 어안이 벙벙해 하길래 글 도독질이나 하는 종친들과는 더 이상 상의할 일이 없으니 나는 가겠다고 나왔다. 어찌 일가간에 거짓으로 허세를 부리는 못난 사람들과는 더 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 않다고 나오니 맨발로 나와 두분이 개망신이라며 오늘만 입을 다물고 함구 해 달라며 통사정을 했지만 필자는 두번 다시 그런 종친을 만나 주지 않았다. 1984년 갑자대동보가 발행되었을때는 전화로 거제양씨들은 자기들 승낙없이 대동보를 했다며 야단~치면서 두분이 집으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렸다.
傲氣(오기)가 나서 남원에 내려가서 월곡서원구재통문을 들고 많은 일가들에게 보라고 했지만 소 귀에 經(경) 읽기라서,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자가 없어서 사본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고 본인은 보지도 않고 구재통문의 내용을 줄줄 외우며 번역해 주었고,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자 그제야 탕근 갓쓴 노인들도 자네야 말로 우리 양씨 문중에 산역사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도 돈을 요구해서 무엇 때문에 돈이 필요합니까 하니, 족보를 하자면 돈이 있어야 서문, 발문도 쓰고 선조님들의 행장도 고증을 해서 써야 된다고 하길래 ~ 아니 ! 자손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 왜 하필 남에게 부탁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다 글을 지어 주고 고증해 주겠다고 해서 쓰게된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데 글 도독을 하다니 이것은 말도 안되는 행위며 후대 자손들은 일가간에 이런 못된짓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이글을 남기고 闡明(천명)한다.
후손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자세한 가계도를 제시한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절대주의, 권위주의 때문에 선대 아버님 대에서도 족보를 마무리 하지 못해서 어디를 가나 돌파리 양가라는 불명예스러운 대명사가 항상 따라 다녔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였고, 부끄러운 일을 달고 다녔다. 후손들이여 ~ 등산가는 시간은 있고, 낚시가는 시간은 있어도 조상님들의 이름 석자 아는 시간은 아깝다면 자손 낳아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 묻고 싶다.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始祖) 량을나(良乙那) 族譜(족보).
1世祖(세조) 양 능양(梁 能讓) - 개성왕씨(開城王氏).
2世祖(세조) 양 득겸(梁 得謙) - 配位(배위)는 어느 문헌에도 찿을수가 없다.
3世祖(세조) 양 득황(梁 得璜) - 경주설씨(慶州薛氏).
4世祖(세조) 양 탁영(梁 卓英) - 하음봉씨(河陰奉氏).
5世祖(세조) 양 견(梁 堅) - 이천서씨(利川徐氏).
6世祖(세조) 양 이승(梁 利升) - 수원공씨(水原貢氏).
7世祖(세조) 양 충립(梁 忠立) - 장사유씨(長沙兪氏).
8世祖(세조) 양 당취(梁 唐就) - 안동권씨(安東權氏) - 정 씨(鄭 氏).
9世祖(세조) 양 준(梁 俊) - 남원윤씨(南原尹氏).
10世祖(세조) 양 우(梁 祐) - 朔寧郡夫人(삭녕군부인) 양 씨(梁 氏) - 청주이씨(淸州李氏).
11世祖(세조) 양 우룡(梁 友龍) - 嘉德 李氏(가덕 이씨)
12世祖(세조) 양 사귀(梁 思貴) - 진양강씨(晋陽姜氏).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상산김씨(商山金氏).
14世祖(세조) 양 보(梁 普) - 용성양씨(龍城梁氏).
15世祖 차남 梁 鳳壽(양 봉수) - 錦山余氏(금산여씨).
16世(세) 梁 弘澤(양 홍택) - 瑞山柳氏(서산유씨).
17세조 삼남 - 양 호(梁 浩) - 長水黃氏(장수황씨).
18세조 장남 - 양 사준(梁 士俊) - 驪陽陳氏(여양진씨)翼臣(익신)의 따님.
- 驪陽陳氏(여양진씨)重恢(중회)의 따님.
- 義昌丁氏(의창정씨).
19世祖(세조) 차남 - 양 적(梁 勣) - 興德張氏(흥덕장씨). - 우번파(雨番派)
20世孫(세손) 삼남 - 양 세장(梁 世章) - 전주최씨(全州崔氏).
21世祖(세조) 외동 - 양 응규(梁 應奎) - 興德張氏(흥덕장씨).
22世祖(세조) 장남 - 양 처해(梁 處海) - 順興安氏(순흥안씨) - 金海金氏(김해김씨).
23世祖(세조) 장남 - 양 성구(梁 聖龜) - 慶州鄭氏(경주정씨).
24世祖(세조) 외동 - 양 인손(梁 仁遜) - 晋州河氏(진주하씨) 하 분순(河 粉順).
25世祖(세조) 장남 - 양 수경(梁 守京) - 칠원윤씨(漆源尹氏) 尹 興順(윤 흥순).
26世祖(세조) 차남 - 양 재관(梁 再寬) - 김해배씨(金海裵氏) 배 묘아( 裵妙兒).
27世祖(세조) 외동 - 양 만필(梁 萬弼) - 오 순이(吳 順伊).
28世祖(세조) 삼남 - 梁 鳳化(양 봉화) - 윤 유분(尹 有粉).
29세손(世孫) 장남 - 양 두조(梁 斗祚) - 김 귀선(金 貴善) - 김 수선(金 守善)
30세손(世孫) 차남 - 양 방수(梁 芳秀) - 黃 貞禮(황 정예).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始祖) 량을나(良乙那) 族譜(족보).
1世祖(세조) 양 능양(梁 能讓) - 개성왕씨(開城王氏).
2世祖(세조) 양 득겸(梁 得謙) - 配位(배위)는 어느 문헌에도 찿을수가 없다.
3世祖(세조) 양 득황(梁 得璜) - 경주설씨(慶州薛氏).
4世祖(세조) 양 탁영(梁 卓英) - 하음봉씨(河陰奉氏).
5世祖(세조) 양 견(梁 堅) - 이천서씨(利川徐氏).
6世祖(세조) 양 이승(梁 利升) - 수원공씨(水原貢氏).
7世祖(세조) 양 충립(梁 忠立) - 장사유씨(長沙兪氏).
8世祖(세조) 양 당취(梁 唐就) - 안동권씨(安東權氏) - 정 씨(鄭 氏).
9世祖(세조) 양 준(梁 俊) - 남원윤씨(南原尹氏).
10世祖(세조) 양 우(梁 祐) - 朔寧郡夫人(삭녕군부인) 양 씨(梁 氏) - 청주이씨(淸州李氏).
11世祖(세조) 양 우룡(梁 友龍) - 嘉德 李氏(가덕 이씨)
12世祖(세조) 양 사귀(梁 思貴) - 진양강씨(晋陽姜氏).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상산김씨(商山金氏).
14世祖(세조) 양 보(梁 普) - 용성양씨(龍城梁氏).
15世(세)차남 양 봉수(梁 鳳壽) - 錦山余氏(금산여씨).
16世(세) 양 홍택(梁 弘澤) - 瑞山柳氏(서산유씨).
17세조 삼남 양 호(梁 浩) - 長水黃氏(장수황씨).
18세조 장남 양 사준(梁 士俊) - 驪陽陳氏(여양진씨)翼臣(익신)의 따님.
- 驪陽陳氏(여양진씨)重恢(중회)의 따님.
- 義昌丁氏(의창정씨).
19世祖(세조) 장남 - 양 훈(梁 勛) - 全州崔氏(전주최씨). - 花村派(화촌파)
20世祖(세조) 삼남 - 양 세징(梁世徵) -
21世祖(세조) 외남 - 양 응함(梁應涵) -
22世祖(세조) 외남 - 양 성흡(梁成潝) -
23世祖(세조) 외남 - 양 천구(梁天龜) -
24世祖(세조) 차남 - 양 건(梁 楗) -
25世祖(세조) 장남 - 양 덕용(梁德龍) -
26世祖(세조) 차남 - 양 만표(梁萬杓) -
27世祖(세조) 장남 - 양 병희(梁炳曦) -
28世祖(세조) 장남 - 양 중기(梁仲基) - 연안김씨(延安金氏) - 김해김씨(金海金氏)
남원양씨(南原梁氏) 시조(始祖) 량을나(良乙那) 族譜(족보).
1世祖(세조) 양 능양(梁 能讓) - 개성왕씨(開城王氏).
2世祖(세조) 양 득겸(梁 得謙) - 配位(배위)는 어느 문헌에도 찿을수가 없다.
3世祖(세조) 양 득황(梁 得璜) - 경주설씨(慶州薛氏).
4世祖(세조) 양 탁영(梁 卓英) - 하음봉씨(河陰奉氏).
5世祖(세조) 양 견(梁 堅) - 이천서씨(利川徐氏).
6世祖(세조) 양 이승(梁 利升) - 수원공씨(水原貢氏).
7世祖(세조) 양 충립(梁 忠立) - 장사유씨(長沙兪氏).
8世祖(세조) 양 당취(梁 唐就) - 안동권씨(安東權氏) - 정 씨(鄭 氏).
9世祖(세조) 양 준(梁 俊) - 남원윤씨(南原尹氏).
10世祖(세조) 양 우(梁 祐) - 朔寧郡夫人(삭녕군부인) 양 씨(梁 氏) - 청주이씨(淸州李氏).
11世祖(세조) 양 우룡(梁 友龍) - 嘉德 李氏(가덕 이씨)
12世祖(세조) 양 사귀(梁 思貴) - 진양강씨(晋陽姜氏).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상산김씨(商山金氏).
14世祖(세조) 양 보(梁 普) - 용성양씨(龍城梁氏).
15世(세)차남 梁 鳳壽(양 봉수) - 錦山余氏(금산여씨).
16世(세) 梁 弘澤(양 홍택) - 瑞山柳氏(서산유씨).
17세조 삼남 - 양 호(梁 浩) - 長水黃氏(장수황씨).
18세조 장남 - 양 사준(梁 士俊) - 驪陽陳氏(여양진씨)翼臣(익신)의 따님.
- 驪陽陳氏(여양진씨)重恢(중회)의 따님.
- 義昌丁氏(의창정씨).
19世祖(세조) 장남 - 양 훈(梁 勛) - 全州崔氏(전주최씨). - 花村派(화촌파)
20世祖(세조) 삼남 - 양 세징(梁世徵) -
21世祖(세조) 외남 - 양 응함(梁應涵) -
22世祖(세조) 외남 - 양 성흡(梁成潝) -
23世祖(세조) 외남 - 양 천구(梁天龜) -
24世祖(세조) 차남 - 양 건(梁 楗) -
25世祖(세조) 삼남 - 양 기용(梁記龍) -
26世祖(세조) 외남 - 양 운표(梁運杓) -
27世祖(세조) 장남 - 양 병두(梁炳斗) -
28世祖(세조) 외남 - 양 영기(梁英基) -
29世祖(세조) 차남 - 양 한탁(梁漢鐸) - 연일정씨(延日鄭氏)
13世祖(세조) 양 준(梁 峻) - 상산김씨(商山金氏). 에는
18세조(世祖)이신 장남 - 양 사준(梁 士俊) - 驪陽陳氏(여양진씨)翼臣(익신)의 따님.
- 驪陽陳氏(여양진씨)重恢(중회)의 따님.
- 義昌丁氏(의창정씨)의 자손에서 세 아드님을 두시어
아래와 같이 각 파조를 모시고 있다.
19世祖(세조)-양훈(梁勛) - 全州崔氏(전주최씨). 梁士俊(양사준) 장남 - 화촌파(花村派) - 양한탁(梁漢鐸)
19世祖(세조)-양적(梁勣) - 興德張氏(흥덕장씨). 梁士俊(양사준) 차남 - 우번파(雨番派) - 양방수(梁芳秀)
19世祖(세조)-양발(梁勃) - 함안조씨(咸安趙氏). 양사준(양사준) 삼남 - 능곡파(綾谷派) - 양중기(梁仲基)
29세손 양한탁(梁漢鐸)=梁英基(양영기),-梁炳斗(양병두),-梁運杓(양운표),-梁記龍(양기용),-梁健(양건),-梁天龜(양천구),-梁成潝(양성흡),-梁應涵(양응함),-梁世徵(세장),-梁勛(훈) - 화촌파(花村派)
30세손 양방수(梁芳秀),-梁斗祚(양두조),-梁鳳化(양봉화),-梁萬弼(양만필),-梁再寬(양재관),-梁守京(수경),-梁仁遜(양인손),-梁聖龜(양성구),-梁處海(양처해),-梁應奎(양응규),-梁世章(양세장),-梁勣(양적),-우번파(雨番派)
28세손 양중기(梁仲基)=梁炳求(양병구),- 梁振杓(양진표),- 梁致河(양치하),- 梁聖敎(양성교),- 梁碩華(양석화,-梁寶仁(양보인),-梁應潭(양응담), 梁世顯(양세현),- 梁勃(양발),- 능곡파(綾谷派)
1986년 병인보는 18세조 梁士俊(양사준) 선조님과 동생 梁士儀(양사의) 선조님의 7형제 후손들이 만든 보첩이다.
梁士俊(양사준) 선조님의
첫째 梁勛(양훈)-화촌파(花村派)
둘째 梁勣(양적)-우번파(雨番派)
셋재 梁勃(양발)-능곡파(綾谷派)와
동생 집안
梁士儀(양사의)
첫째 梁勉(양면)-梁勉(운교파)
둘째 勖(욱)
셋째 經(경)
넷째 할(吉변에 力자) 鎭安派(진안파) 자손들이 뜻을 합했다.
귀후제(歸厚齊)에서 소재지(所在地):전북(全北)임실군(任實郡)삼계면(三溪面 죽계리(竹溪里)대판(大板) 서당동(書堂洞)
좌(左)로 부터 梁漢鐸(양한탁), 梁仲基(양중기). 필자(筆者 梁 芳秀(양방수). 1985년 4월 1일. 촬영 - 필자(筆者) 양방수(梁芳秀)
獒樹碑(오수비) 또는 義犬碑(의견비)는 지방 민속 자료 1호로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이 이다.
지금으로부터 천여년전 이웃 只沙面(지사면)에 金蓋仁(김개인)이라는 사람이 만취되어 들에서 잠들어 있을 때 불이 일어나 위험하게 되자 주인을 따르던 개가 몸에 물을 적셔 불을 끄다가 지쳐 죽었다.
뒤 늦게 잠이 깬 주인은 개의 지극한 마음을 못잊어 개를 묻어 두고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가 되었다고 전하며 당시의 지명 居寧(거령)을 獒樹(오수)로 부르게 된 연유였다고 전한다. 후세에 주민들이 개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義犬碑(의견비)는 오랜 유서를 지닌채 이 지방의 상징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 혹자는 사람이 의리를 저버리면 개보다 못한 놈이라고 욕하는 이야기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183. 獒樹碑(오수비) = 義犬碑(의견비) 史記(사기)
여기 園東山(원동산)에 자리한 獒樹碑(오수비) 즉 義犬碑(의견비)는 百濟(백제) 鄕曲(향곡)과 더불어 우리 나라 古代(고대) 重要(중요) 古典(고전)의 하나인 高麗樂府(고려낙부)에 나오는 犬墳曲(견분곡) 發祥地(발상지)로서 한 人間(인간)과 한 忠誠(충성)스러운 犬公(견공)과의 義(의)로운 事緣(사연)을 담은 歷史的(역사적) 遺物(유물)이다. 距今(거금) 一千餘年前(일천여년전) 지금의 任實郡(임실군) 只沙面(지사면) 寧川里(영천리:당시 居寧縣(거령현)에 개를 몹시 사랑하는 金蓋仁(김개인)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가을날 獒樹場(오수장)에 개와 함께 나왔다가 술에 滿醉(만취)됐던 그는 歸嫁(귀가)길에 그만 意識(의식)을 잃고 현 園東山(원동산) 부근 草原(초원)에서 곯아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에 난데없는 野火(야화:wild fire : 들불)가 일면서 불길이 번져 오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犬公(견공)이 主人(주인)의 生命(생명)이 위태로움을 느끼자 근처에 있던 냇물에 뛰어 들어 온몸에 물을 적셔 주인곁으로 타 들어오는 불길을 막았다, 그 動作(동작)이 얼마나 계속 되었을까??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主人(주인)은 그 자신을 구해놓고 기진맥진 지쳐서 죽은 犬公(견공)을 발견했다. 이 義(의)로운 犬公(견공)의 죽음에 感動(감동)한 주인은 바로 그곳 陽地(양지)가 바른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는 한편 그가 그날 꺽어서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위에 꽂고 깊이 애도 했다.
그 후 그 지팡이에서 잎이 돋아나 큰 樹木(수목)으로 成長(성장)하니 이때부터 이 고을 일때를 [개나무 마을]이라 하여 개 獒(오) 字(자)와 나무 樹(수) 字(자)를 빼내어 獒樹(오수)라는 고을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 園東山(원동산)안의 千年老巨樹(천년노거수:느티나무)는 이러한 歷史的(역사적) 由緖(유서)를 간직한 하나의 지팡이에서 돋아난 나무이며 義犬碑(의견비)도 천년을 헤아리는 먼 옛날 이 犬公(견공)의 義(의)로운 죽음을 永遠(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그 後代(후대)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속담에 개새끼도 주인을 보면 꼬리를 친다.는 말은 배은망덕한 사람을 두고 비꼬는 말로 의리(義理)없는 사람을 개 보다 못한 놈이라고도 하는데 이곳 오수마을의 개와 비교한 말인듯 하다.
184. 園東山(원동산) 造景美化(조경미화)가 되기까지
一千餘年(일천여년)의 歷史的(역사적) 由緖(유서)를 간직한 이 고장의 象徵(상징)인 獒樹碑(오수비) 義犬碑(의견비)는 이제 우리 고장만의 文化遺産(문화유산)이 되기에는 그 歷史性(역사성)과 文化性(문화성)이 너무 벅차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歷史的(역사적)인 故地(고지)로서의 그 重要性(중요성)을 살피고, 이 史料(사료)의 價値保存(가치보존)을 위해 黃寅性(황인성) 全北知事(전북지사)의 특별한 關心(관심)과 配慮(배려). 그리고 前任(전임) 方炳起(방병기) 郡守(군수)의 行政(행정) 支援(지원)으로 淨化(정화)되었으며 아울러 義犬碑(의견비)를 保存守護(보존수호)하는데, 勞苦(노고)가 컷던 獒樹(오수) 商工會員(상공회원)및 獒樹(오수) 義勇消防隊員(의용소방대원)과 市場(시장) 正心會員(정심회원)들의 功(공)을 永遠(영원)히 남기지 않을수 없다.
1975년 9월 16일 獒樹(오수) 繁榮會(번영회) 白(백)이라고 기록 하고 있었다.
남원양씨 거제문중 병부공 30세손 梁 芳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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