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롱나무는 바람에 홑이불과 같이 마르게 두길*
권현형
꿈에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 다친 새를 만났다
손을 내밀자 너무 차갑다고 말했다
방금 손을 씻어서 그래, 구차한 변명으로
참회 없이 반성 없이 계절이 지나간다
새의 아픔을 내가 모를지라도
내 아픔을 새가 모를지라도
구름이 예쁠 때는 믿음이 남아 있을 때
커다란 은회색 나무에서 떨어지는
마른 떡갈나무잎이 잿빛 깃털을 가진
작은 새로 보인다
구름과 새와 나무와 사람은 애초에 혈육
한통속의 씨앗
화분에 물 주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것
화분에 물 주는 소리만 들어도 뇌가 맑아지는 것
자기 연민이라기보다 생애주기가 식물에 가까이 있을 때
다시 밥 냄새가 살아 있는 골목으로 돌아갈 때
플라스틱으로 만든 월경대 생애의 비밀은 나의 비밀
구름과 새와 나무의 태반이 오래전 병들었다고 한다
아침마다 천변을 달리는 얼굴을 감싸주었던
바람의 감미로운 손
만들지 않은 손을 은인처럼 기억한다
귀롱나무를 바람에 홑이불과 같이 마르도록 두는 길은
깊이 물든 몰락을 지우는 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문학과생명》 202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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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 1966년 강원 주문진 태생. 1995년 《시와시학》 시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
『아마도 빛은 위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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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름과 새와 나무와 사람은 애초에 혈육/ 한통속의 씨앗"
이런 언어 조합과 이런 사유와 이런 시적 내지름!
시인이 우리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이유이다.
"생애주기가 식물에 가까이 있을 때"
"깊이 물든 몰락을 지우는 길"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