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므 마을 1」 / 고진하
푸른 이정표 선명한
즈므 마을*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궜음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 지고
저물녘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모은다
즈므 마을,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聖所)를 세우고 싶은 곳, 나는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더딘 내 발걸음을 가로막아도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든 별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 송이버섯 같은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보자,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
- 고진하의 「즈므 마을 1」 전문. 『우주배꼽』
<감상문>
화자는 즈므 마을로 가는 푸른 이정표를 본다. 즈므 마을이란 시인이 밝혔듯이 ‘저무는 마을’에서 유래된 말이다. 강릉에 있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즈므 마을은 이미 사라진 곳으로 “그곳으로 가는 산자락은 가파르다” 화전을 일궜음직한 산자락엔 하얀 찔레꽃 머위넝쿨 우거지고 저물녘이면, 어스름들이 모여들어 아늑한 풀섶둥지에 “맨발의 새”들을 불러모은다. 시인은 즈므 마을에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성소를 세우고 싶은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며 발에서 신발을 벗는다”
성소가 있는 곳은 신성한 곳이다. 일상적이고 속(俗)된 것을 벗어야 성(聖)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벌써 얄팍한 상혼(商魂)들이 스쳐간 팻말이” 있다. 신성을 더럽힌 흔적이 가로막는다. “울타리 없는 밤하늘에 든 별빛 몇 점 지팡이 삼아, 꼬불꼬불한 산모롱이를 돈다” 밤하늘엔 사람과 사람 사이 울타리가 없다. 별빛의 안내를 받으며 지팡이 삼아 길을 걷는다. 지인이라곤 없는 마을이지만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가물거리는 불빛만이 날 반겨준다 저 사소한 반김에도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 지나온 “산모롱이쪽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를 듣는다. 부엉이 소리는 내 지나온 산모롱이에서 들리는 존재의 심연에서 울리는 소리이다. “저 나직한 소리의 중심에, 말뚝 몇 개/ 박아보자” 열망의 소리의 중심에 성소에서 향을 피우며 순결한 숭배를 드릴 수 있는 성전 기둥을 세우고자 한다. 이러한 의식에는 잃어버린 인간의 근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이 서려 있다. 신성은 어디든 존재하고 있다.
고진하 시에 대해 유성호는 『한국시의 과잉과 결핍』에서 “고진하의 시는 사실적인 인과 관계를 추구하지 않고 사물들 사이의 전체적 연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초월의 상상력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존재값에 대하여 깊이 묻고 따지는 데서 생기는 인간 실존의 한 사건이다”고 언급한다.
초월적인 상상력은 우리 시대가 근원적인 것을 잃어버린 채 부동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적인 내용과 역사를 기초로 하면서 우주적 스케일과 신성한 타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 가출(家出)의 하룻밤”은 황홀하다. 화자가 즈므 마을의 여정을 통해 하룻밤 기획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 회복이며, 사라진 인간의 삶의 질서와 근원을 되찾고자 하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감상자 -이구한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