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돌로 떡덩이를 만들고 싶다!
나는 가끔 돌로 떡덩이를 만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예수께서 사십일 금식하신 후에 광야로 가서 시험을 당하였는데 그 첫 번째 시험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였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며 마귀의 유혹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청년의 시절에 예수님의 명쾌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선포에 감동하며 주님을 따라 살기로 다짐하였다. 물질보다 진리와 사랑, 말씀과 생명이 우선하는 삶, 예수님의 가치관을 나의 가치관으로 마음에 새기면서.
세상에 부대끼면서도 나 자신의 곤궁과 가난은 예수의 제자로서 참고 견딜만하였고 때로는 나 자신의 영적인 성숙을 보는 듯싶어 위로를 받기도 하였다. 가난에도 처할 줄 안고 부에도 처할 줄 아는 제자의 삶은 담론이 아니고 현실이므로 많은 연단과 훈련, 묵상과 기도 끝에 무엇이든 담담하게 감사함으로 받게 되엏다고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도 선교현장에서 만난 5계급에 속하는 달릿들의 운명적인 끔찍한 가난, 절대 가난은 나로 하여금 돌로 떡덩이를 만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절대 빈곤을 접할 때까지만 해도 가난은 불편하고 초라하기는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는데 도움이 필요한 달릿들의 현실을 눈앞에 두고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니 하나님께 “정말 가난해서 죄송합니다.”라는 기도 아닌 기도를 무수히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 생각을 해본 적이 없지만 절대빈민들의 밥을 위해서 나는 돌을 떡덩이로 바꾸고 싶었다.
선교 현장에서 병들고 헐벗고 굶주리는 날품팔이 달릿들, 돌봄을 받지 못하는 서러운 고아들, 죽지 못해 사는 장애우들, 삶을 전투적으로 살아야하는 여성 가장들을 만날 때 마다 돌로 떡덩이, 황금을 만들고 싶었다. 돌을 손에 들고 축사할 때마다 모세가 간구한 대로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고 메추라기가 쏟아졌듯이 떡이 쏟아지고 황금 비가 내리게 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마음껏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정에서, 마을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인정과 존중을 받으며 사랑받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며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낙원을 꿈꾸었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기적은 동화적 상상이나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이끌어 가는 굶주림을 목격하면서 돌을 떡으로 만들려는 강렬한 욕구에 시달렸다.시달리고 부대낀 끝에 간절한 마음으로 두 가지 기도를 바쳤다. 하나는 ‘제 몸을 팔아서 저들에게 먹여주십시오.’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현장의 필요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라’는 것이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일까?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나를 교만하거나 어리석다 꾸짖지 않으시고 미쳤다고 판단하지 않으시고 이십여 년 동안 현장의 필요와 간구하는 대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에이즈 고아들과 난달지역의 빈민들을 위한 프로젝트, 미얀마 친주에서 일어난 대기근, 안드라프라데시주 라열라씨마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 첸나이 대홍수, 네팔 고아들과 홈리스들을 위한 프로젝트, 네팔과 북인도와 남인도에서 일어난 코로나 참사와 기근뿐만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미얀마 내전, 동북인도 마니푸르의 폭동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며 간섭하시며 모든 것을 이끌며 공급하며 위로하며 주관하며 권면해주셨다.
특별히 미얀마 내전으로 비롯된 난민 구호는 나를 끊임없이 흔들며 시험하였다. 2021년 2월 1일에 시작된 내전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어서 언제까지 구호를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빠지면서 그만 둘 수도 없고 계속할 수도 없는 늪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난민구호펀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금으로 매달 두 번씩 사랑의 쌀 구호비를 보내는 것이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기 때문이요, 한국과 한국교회의 정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도중하차하면 3년 여 세월 동안의 구호가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준 고통당하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외면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계속하자니 힘이 부치고 그만두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므로 돌로 떡덩이를 만들고 싶은 망상에 사로잡혔다. 열망으로 상상의 나래를 폈다.
하나니의 은혜로 적극적으로 돕는 분들이 계시지만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서 그분들 외에도 몇 분들이 더 소명을 받았으면 염원과 특별히 교회가 난민 후원에 부름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무시로 아뢰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듯이 매달 일이천만원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였다.그러면 후원금 모금으로 힘들지 않을 것이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구차한 느낌도 없이 아주 나이스하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수억 또는 수십억의 기부금을 한꺼번에 보내주면 매번 구호비를 보낼 필요 없이 바로 소나 젖소를 사서 난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 새로운 교육훈련 과정을 열어서 난민캠프에서 공생의 꿈과 희망의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다. 내전이 난민들에게 절망과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깊은 성숙과 감사의 시간, 은혜의 시간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나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 능력이 없으니 모든 상상과 요망은 그냥 마음뿐이고 유혹이고 충동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난민들에게 제 때에 사랑의 쌀을 보내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 그 뭔가가 무시로 바치는 기도와 카톡으로 개개인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글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글을 써서 까페에 올리는 것뿐이다. 이것이 내가 난민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의 다다. 나의 노력과 수고라는 것이 참으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처럼 길가 밭과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이 훨씬 많지만 놀랍게도 옥토에 떨어져서 생각 이상으로 열매를 맺을 때가 가끔 있다. 그것은 나의 수고와는 전혀 무관한 성령님의 감동감화의 결과다. 나는 뿌릴 뿐이고 자라고 열매가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올 들어서 모금이 되지 않아 불안하고 절박한 마음에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거나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급함에 빠질 때 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지난 2월에 전혀 모르는 분들,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몇 분들을 통해서 2회분의 사랑의 쌀 후원금을 공급받았다.
며칠 전에 청소부로 일하는 어느 권사님께서 사랑의 쌀 2.5회분의 금액을 지원해주셨다. 이분들의 후원금은 내 뒤통수를 쳤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후원금을 보내주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가슴에 뜨거운 울림을 주었다고 하였다. 한 분은 하나님께서 난민들과 함께 빕을 먹으라고 하였다며 울먹거렸다.
이 두 후원금은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얼떨결에 순식간에 온 것이어서 지금도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다. 마치 하나님의 꿈에 들어간 느낌이다.
담 주에 86회 사랑의 쌀 난민구호비를 보낸다.
내전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난민들이 무사히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돌을 떡덩이로 만들기를 열망하며 꿈을 꿀 것이다.
우울한 한국과 한국교회의 상황에도 일하기를 쉬지 않으시는 놀라우신 하나님, 희망의 하나님께 오늘과 내일을 맡기며 하나님 나라 새일을 기대한다.
2025년 3월 18일 화요일 인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