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
창4:5을 보시면 가인이 몹시 “분노”했다는 말이 나온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하라(הרָחָ)”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불이 붙었다”는 뜻이다. 마음에 불이 붙었을 때 그것을 진화할 수 있는 사람은 절제력을 가진 사람밖에 없다. 만일 끄지 못하면 그 불은 그 사람의 삶을 불태우게 된다.
가인은 왜 마음속에 불이 붙었을까? 형으로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은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제사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런 성찰 없이 동생을 경쟁자로만 보았다. 만일 가인이 “나의 제사는 비록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동생만큼은 똑똑한 놈을 두었어. 다음부터는 동생처럼 제사를 드려야지”라고 성찰했더라면 동생을 죽이는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10절을 보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의 피와 예수님의 피는 겉보기에 비슷해 보인다.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다가 형의 질투로 죽임을 당했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다가 제사장들의 질투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아벨의 피는 내 恨을 풀어달라는 부르짖음이었던 반면 예수님의 피는 속죄의 피였다. 한국 천주교 정의사제단은 “아벨의 피”를 부르짖으며 맺힌 恨을 풀어야 한다고 외쳤다. 개신교 목사와 교인들 중에도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과 바울은 “한풀이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일이 없다. 그것은 무당의 가르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