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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 갇힌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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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아뜨리에,.. 애송시 스크랩 그리운 바다 성산포 외 / 이생진
동산 추천 0 조회 275 14.05.14 08: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리운 바다 성산포 1 / 이생진

 

 

아침 여섯시 어느 동쪽에도 그만한 태양은 솟는 법인데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다고 부산필거야 

 

아침 여섯시 태양은 수 만 개 유독 성산포에서만
해가 솟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와서 해를 보라~하나밖에 없다고 착각해 온 해를 보라 

 

산포에서는 푸른색 이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성산포에서는 설사 색맹일지라도 바다를 빨갛게 칠할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사투리로 말한다
그러다가도 해뜨는 아침이면 말보다 더 쉬운 감탄사를 쓴다
손을 대면 화끈 달아오르는 감탄사를 쓴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말만 하고 바다는 제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약하다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 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있는 것처럼 보일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거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2 / 이생진
  

 

 

일출봉에 올라 해를 본다  아무생각 없이 해를 본다
해도그렇게 나를 보다가 바다에 눕는다
일출봉에서 해를 보고나니 달이 오른다
달도 그렇게 날 보더니 바다에 눕는다
해도 달도 바다에 눕고나니 밤이된다
하는 수 없이 나도 바다에 누어서 밤이 되어 버린다  

 

날짐승도 혼자 살면 외로운 것
바다도 혼자 살기 싫어 퍽퍽 넘어지며 운다
큰산이 밤이 싫어 산짐승 불러오듯
넓은 바다도 밤이 싫어 이부자리를 차내버린다
사슴이 산 속으로 산 속으로 밤을 피해가듯
넓은 바다도 물속으로 물속으로 밤을 피해간다  

 

성산포에서는 그 풍요 속에서도 갈증이 인다
바다 한가운데에 풍덩 생명을 빠뜨릴 순 있어도
한 모금 물을 건질 순 없다
성산포에서는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바다가 사방에 흩어져 산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도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치 않아 서로 떨어질수 없다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의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워할 것도 없이 돌아선다
사슴이여 살아있는 사슴이여
지금 사슴으로 살아 있는 사슴이여
저기 저 파도는 사슴 같은데 산을 떠나 매 맞는 것
저기 저 파도는 꽃 같은데 꽃밭을 떠나 시드는 것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한 것들에 넋
파도는 살아서 피우지 못한 것들의 꽃
지금은 시새움도 없이 말하지 않지만
 

 

 

 

 

 

  

 

  

 


그리운 바다 성산포 3 / 이생진

 

 

어망에 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갈매기가 물었던 바다도 빠져 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 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이제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 자리
그대로 천년만년 길어서 싫다  

 

꽃이 사람 된다면 바다는 서슴지 않고 물을 버리겠지
물고기가 숲에 살고 산토끼도 물에 살고 싶다면
가죽을 훌훌 벗고 물에 뛰어들겠지
그런데 태어난대로 태어난 자리에서
산신에 빌다가 세월에 가고
수신께 빌다가 세월에 간다  

 

성산포에서는 설교는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가자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에 다시 오자 
 

 

 

 

 

 

  

 


그리운 바다 성산포 4 / 이생진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아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게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 두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 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평생 두고 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그리운 바다 성산포 5 / 이생진  

 

 

일어설 듯 일어설 듯 쓰러지는 너의 패배 발목이 시긴 하지만
평면을 깨뜨리지 않는 승리 그래서 네 속은 하늘이 들어앉아도 차지 않는다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아니면 일제히 패배하라
그러면 잔잔하리라  그 넓은 아우성으로 눈물을 닦는 기쁨 투항하라  그러면 승리하리라
성산포에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 일 그것으로 독이 닳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절망을 만들고 바다는 절망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절망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절망을 듣는다
오늘 아침 하늘은 기지갤 펴고 바다는 거울을 닦는다
오늘 낮 하늘은 낮잠을 자고 바다는 손뼉을 친다
오늘 저녁 하늘은 불을 켜고 바다는 이불을 편다
바다가 산허리에 몸을 굽힌다  산은 푸른 치마를 걷어올리며 발을 뻗는다
일체에 따듯한 햇살 사람들이 없어서 산은 산끼리 물은 물끼리
욕정에 젖어서 서로 몸을 부빈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칼이다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양이다
그릇 밖에서 출렁이는 서글픈 아우성
목마를 때 바다는 물이 아니라 갈증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짐승이 짐승보다 산이 산보다 바다가
더 높은 데서 더 깊은 데서 더 여유 있게 산다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하늘이여  바다 앞에서 너를 쳐다보지 않는 것을 용서하라
하늘이여  바다는 살았다고 하고 너는 죽었다고 하는 것을 용서하라
너의 패배한 얼굴은 바다 속에서 더 아름답게 건져내는 것을 용서하라
그 오만한 바다가 널 뜯어먹지 않고 그대로 살려준 것을 보면
너도 바다의 승리를 기뻐하리라..
하늘이여  내가 너를 바다 속에서 너를 보는 것을 용서하라.
 

 

 

 

 

 

   

 

 

꽃처럼 살려고 / 이생진 

 

 

꽃피기 어려운 계절에 쉽게 피는 동백꽃이
나보고 쉽게 살라 하네
내가 쉽게 사는 길은
쉽게 벌어서 쉽게 먹는 일
어찌하여 동백은 저런 절벽에 뿌리 박고도
쉽게 먹고 쉽게 웃는가
저 웃음에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닌지

 

'쉽게 살려고 시를 썼는데 시도 어렵고 살기도 어렵네
동백은 무슨 재미로 저런 절벽에서 웃고 사는가
시를 배우지 말고 동백을 배울 일인데’

 

이런 산조(散調)를 써놓고
이젠 죽음이나 쉬웠으면 한다

 

 

 

 

  

 

 

 

바다의 오후 / 이생진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벌레 먹은 나무잎 / 이생진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낚시꾼과 시인 / 이생진

 

 

그들은 만재도에 와서 재미를 못 보았다고 한다
낚싯대와 얼음통을 지고 배를 타기 직전까지도
그 말만 되풀이했다.
날보고 재미 봤냐고 묻기에
나는 낚시꾼이 아니고 시인이라고 ?더니
시는 어디에서 잘 잡히느냐고 물었다
등대 쪽이라고 했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리로 갔다  

 

 

 

 

 

 

 

설교하는 바다 / 이생진

 

 

성산포에서는
설교를 바다가 하고
목사는 바다를 듣는다
기도보다 더 잔잔한 바다
꽃보다 더 섬세한 바다
성산포에서는
사람보다 바다가 더
잘 산다  

 

 

 

 

 

 

 


개 조심하게 / 이생진 

 

 

개 조심하게
그 집 개 사나우네
몸 조심 하게
바깥 날씨 여간 아닐세
조심해 살게
여간 어려운 것 아닐세
조심해 죽게
여간 싱거운 것 아닐세 

 

 

 

 

 

 

 

 

지팡이와 할머니 / 이생진  

 

- 소모도에서 

 

 

소모도 언덕길을 올라가는 검은 지팡이와 하얀 할머니

 

지팡이는 할머니를 만난 지 3년 됐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80년을 지내다가
지팡이를 만난 후부터는
지팡이 없이 하루도 지내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를 보느라 지팡이를 세워놨는데
지팡이는 나를 보지 않는다
할머니는 나를 보겠다고 허리를 펴는데
지팡이만큼 펴지지 않는다
지팡이는 허리를 굽히지 못하고
할머니는 허리를 펴지 못하고
지팡이는 할머니 없이 걷지 못하고
할머니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하고
이렇게 못하는 것끼리 만나
못하는 일 없이 사는구나

  

  

 

 

 

 

 

 

낙엽 /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하는 것을
울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우정 / 이생진  

 

 

도시 한복판에서
혼자 사는 어부를 생각하는 것은
생각부터가 쓸쓸하다
홍어잡이 배에서 젊은 팔을 잃은 윤씨
이번엔 팔이 되어준 아내를 잃었으니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될지
그래도 나보고 만재도*에 오라한다
한 손으로 마늘을 깔 수 있으니 김치를 담글 수 있고
통발을 바다에 던졌으니 우럭은 들어있을 거고
당신이 좋아한느 별은 밤새 봐도 닳지 않으니
만재도에 오라 한다

 

인사동 커다란 유리에 비친 윤씨의 얼굴
내가 가면 그의 아내처럼 커피잔을 들고 나오겠지
통발을 끌어올려 우럭을 꺼내던 손
배에서 내리자 마자 그 손이 나를 끌어안는다

 

그의 손과 나의 손
손끼리 통하는 말
그건 언어가 아니라 끈끈한 점액이다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면적 0.6 ㎢. 인구 119명 

 

 

 

 

 

 

 

 

 

갈매기가 일제히 / 이생진 

 

 

갈매기가 모두
'모두'라는 말보다
'일제히'라는 말이 어울리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일제히 침묵을 입에 물고
일제히 날아갈 태세로
너무나 일제히

 

그것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가
나는 자유 때문에 쓸쓸한 놈
나는 혼자서 갈매기를 보고
갈매기는 일제히 나를 의심하네

 

 

 

 

  

 

 

우체국 아가씨 / 이생진

 

 

우체국 가면서 생각했다
꼭 연인네 가는 것 같다고
가다가 개울을 건너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꺼내 마시며 생각했다
꼭 연인네 집 앞에 온 것 같다고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난롯가에 앉았던 아가씨가 일어서서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냐고 묻지도 않고
일부인을 꽝꽝 내리친다
봉투가 으스러져 속살이 멍드는 줄도 모르고
꽉꽉 내리칠 때
내 손가락이 바르르 떨었다 

 

 

 

 

 

 

너도 울어라 / 이생진 

 

- 황진이

 

 

네 어미

 

현금玄琴이

거문고 뜯던 겨울 밤

달도 함께 울었으니

외롭거든 사립문 밀고 나와

눈 덮인 달을 안고 울어라

달이 기울면 설움도 기울더라

너도 서럽거든

거문고 때려가며 울어라

나의 귀천歸天 

 

 

 

 

 

 

인사동 / 이생진

 

 

나는

하늘에서 오지 않았으니

돌아갈 하늘이 없다만

천상병이 지상에 있을 때

시 쓴 공로로 하늘로 돌아갔으니

나도 하늘에 갈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시 쓰는 동안 하늘에 있었으니

더 이상 하늘에 있을 이유가 없다 

 

 

 

 

 

 

 

 

명동에서 독도까지 / 이생진

 

자네 어디 있나

명동

명동엔 왜

자넨

나?

나는 독도야

 

거긴 왜 갔지

명동엔 왜 갔어

나야 친구 만나러

독도엔 왜 갔지

대답을 못하네

독도엔 왜 왔지

다시 물어도

대답을 못하네

나는 지금

대답을 못하는 곳에 와 있네     

 

 

 

 

 

 

 

 

무명도 / 이생진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불쌍한 여자 / 이생진


- 빈센트 반 고흐



낡은 옷 속으로 스미는 바람이
시리게 배고프다
오늘 아침도 굶고 하숙집을 나와
급식소에서 수프를 마셨다
그림 그리는 동안 배고픔을 잊는다는 건
생 거짓말이다

저녁 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역전에서 불쌍한 여자를 만났다
시퍼렇게 얼어터진 동태 같은 여자
앙상한 손가락에 쑥 들어간 눈알
불쌍하다는 생각과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서로 마주치는 한숨이 크다
그러나 맨손으론 아무 소용이 없다

그날 밤
죄 진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고 돌아왔다
다음날도 역전에서 그녀를 만났다
집으로 가자고 할까 하다가 그냥 돌아왔다
그 다음날도 그렇게 돌아왔다
그녀는 손님을 찾고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손님을 맞는 일이다
배고프고 불쌍하다
불쌍한 것은 불결한 것이 아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실토를 했다
‘나는 가난한 화가인데 필요한 것은 모델이요
우리 집에 가겠소?’ 하고 묻자
그녀는 기침을 하면서도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고흐를 쳐다보고 일단 가보자며
딸린 식구가 있다고 했다
그 식구들도 따라왔다
와서 보니 그녀의 뱃속에도 식구가 있다
앉혀놓고 그림부터 그렸다
고흐도 그녀처럼 배고프지만
그림 그리는 배고픔이 더했다 

 

 

 

 

그림의 눈물 / 이생진


- 빈센트 반 고흐



눈물 나는 그림이 있다

그림에서 눈물을 비교하긴 처음이다
그만큼 눈물을 무시했다는 이야기다
아니다
그림을 보는데 돈으로 따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돈은 눈물이다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지
그림 앞에서 돈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행복한 눈물과
불행한 눈물

리히텐슈타인(1923-1997)*의 눈물은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고
고흐(1853-1890)의 눈물은 ‘슬픔(Sorrow)’에서 흐르는 눈물이다
그건 맞다
그러나 아무 쪽에도 손수건을 흔들지 말라
그들의 눈물은 씻어지지 않는 눈물이다

눈물의 맛은 같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다
행복한 눈물은 달큼하고
슬픈 눈물은 시큼하다
하지만 그림의 눈물은 찍어먹을 수 없는 눈물이다
리히텐슈타인도
고흐도 그림을 그리다 갔다
지금 눈물 맛이 문제가 아니라
죽은 화가들이 만져보지 못하는 뭉칫돈이 문제다
‘행복한 눈물’은 90억이고
‘슬픔’은 100억이 넘는 눈물이다
사두면 값이 오른다는 유혹에 눈이 뒤집힌다
뒤집힌 눈에선 눈물이 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지 않는 데선
눈물로 호소하기 어렵다
사람의 눈물에서 돈을 캐는 광인
눈물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흐르는 것인데
지금 시비가 붙은 눈물은 정서적 눈물이다
정서적 눈물은 놀람, 기쁨, 슬픔에서 온다
그 중 기쁨과 슬픔이 시비 거리다
아니다 그건 눈물 때문이 아니라 돈 때문이다
고흐의 말을 들어보자

“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느끼는, 그러나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느끼는 심각한 슬픔을 그리고 싶어…
삶은 슬픔의 연속이니까…”**

슬픔의 가치는 돈에 있지 않고
혼에 있다
돈에는 혼이 없으니
화가들의 눈물에서 혼을 빼가자 말라

 

*리히텐슈타인(1923-1997): 만화를 미술에 응용한 대표적인 팝아티스트.
  상업미술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간파한 화가. 대표작 ‘공을 든 소녀’
  ‘행복한 눈물’ 등.

**고흐, 37년의 고독 

   노무라 아쓰시 지음  김소운 옮김 / 2004 (149쪽)

 

 

 

 

  

 

 

 

이별 / 이생진


-30세 (1883) 



시엔과 헤어지는 것은
시엔을 두 번 버리는 것이다
고흐 자신도 버려진 처지에서
버려진 사람들끼리 살기란
또 버림 받는 일밖에 없다
가난해서 버리고 버림 받는 것들
아비도 모르고 태어난 빌렘은
출생부터 버림이다
고흐가 그림을 그리려고 사 둔
아마포로 빌렘의 옷을 꿰매는 시엔
시엔은 만날 때 이미 이별을 시작한 듯
태연하게 아마포를 자른다
고흐의 가슴에서 가위 소리가 난다

그러고 떠난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북부 드렌테로 가고
시엔은 가족과 기차역에 남는다
2년 전 시엔이 손님을 기다리던 역
빌렘의 내일을 위해
고흐는 어린 이별에 입을 맞춘다
시엔은 만날 때나 헤어질 때나 손님을 기다리는
복사판 표정이다
시엔을 안아준다
죽은 나무토막이다
빌렘의 유모차를 끄는 어린 누나에게 얼굴을 비빈다
좁은 얼굴에 눈물이 고이고
아빠 같은 아저씨가 떠난다
그 소녀의 이별이 이별 같다
한 여인과 살다 그만두고 떠나는 이별
22개 월 만에 헤어지는 장면이다
고흐는 화구를 짊어지고 기차에 오른다
차창 밖으로 내민 손
손으로 잡지 못하는 이별
이별은 서로를 버리는 것이다

 

 

 

 

 

  

 

 

꽃은 고독이다 / 이생진

 


화분을 안아들이고
꽃에 물을 준다
부겐빌레아
꽃은 간섭하지 않아서 좋다
나이 들면서 싫어지는 것이 간섭이다
그래서 더욱 고독해 진다
고독하다가 가는 것이 죽음인데
남들은 왜 ‘죽음 죽음’ 하느냐 한다
그 사람도 그때 가봐야 안다
죽음은 그 사람의 몫이다
‘나는 지금 죽으러 간다’
그걸 느낄 때
나를 느낀다

  

 

 

 

 

 

  

 

 

고흐의 여자 / 이생진



고흐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21세 때 하숙집 딸 유제니 로이어가 거절했고
28세 때 사촌 누이 케이가 도망쳤고
29세 때 창녀 시엔이 모델로 살다가 헤어졌다
고흐를 사랑하지 않은 여자들
사랑하지 않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고흐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그런데 마르호트는 죽자사자 덤빈다
고흐는 31세
마르호트는 41세
10년 연상의 여인 마르호트
담 너머로 마을 여자들이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흐의 여자
어머니가 기차에서 내리다 골절상을 입었을 때
집에 와서 간병을 해준 이웃집 노처녀
그림 그리는 노총각 고흐를 보고 늦바람이 났다
그녀는 어머니를 간병할 때 고흐 옆에 있었고
그림 그리러 나갈 때 따라 나섰다
남과 여
그것은 불장난이 아니다

고흐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고흐의 아버지는 고흐 앞에 여자가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마르호트는 죽자 사자했다
예상대로였다
어느 날 고흐하고 산책하다가 갑작스레 마르호트가 쓰러졌다
극약(스트리키니네) 먹고 자살을 기도한 것이다
이 소동으로 아버지의 심장은 박살이 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번엔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델인 처녀를 임신케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고흐는 또 한번 곤욕을 치른다
목사는 신도들에게 고흐 근처에 가지 말라 했고
고흐가 주는 선물은 받지 말라 했다
고흐에게 여자란 무엇인가

*고흐가 1885년에 그린 그림
 

 

 

 

 

 

 

  

 

 

아버지의 방 / 이생진


-빈센트 반 고흐



고흐가 지나간다
숲길로 지나간다
라일락 색 바탕에 노란 점박이 옷을 걸치고
너구리처럼 지나간다
제 손으로 만든 옷이다
테오도뤼스 목사는 그 옷이 보기 싫어
아들이 돌아오는 길을 피해 집으로 온다
아들은 아버지가 오는 길을 피해 집으로 온다
부자(父子)는 한 지붕 밑에서 피할 수 없는 피
아버지는 성경을 들고
아들은 졸라의 소설을 들고
아버지는 졸라의 소설을 싫어하고
아들은 성경을 싫어한다
구렁이 껍질 같은 옷에
졸라의 소설을 읽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울분을 참지 못해 쓰러졌다
(1885년 3월 26일 뇌졸중으로 사망)

아버지가 안 계신 방이 더 넓게 비어 있다
펴놓은 성경책에 졸라의 소설*
촛대엔 불이 꺼지고
성경에 촛대만으로도 엄숙한 그림이 되는데
왜 집어 던지 듯 졸라의 소설이 놓여 있을까
고흐에게 물어보고 싶은 그림이다
아버지가 가신 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농민이란 단정한 옷차림으로 교회에 가는 모습보다
작업복을 입고 밭에 있을 때의 모습이 훨씬 진실하다’
(1885년 4월 30일)

*고흐가 1885년에 그린 ‘성서가 있는 정물'

 

 

 

 

 

 

 

 

 

운명의 소리 / 이생진


-빈센트 반 고흐



태어나 보니 아버지는 목사였다
할아버지도 목사였다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속으로 말하셨다
‘너도 목사가 되렴’

내가 겨우 두 발로 걸어 다닐 때 아버지의 서재에
야코프 반 데르 마텐의 ‘보리밭 장례행렬’*이 걸려 있었다
그 행렬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
검은 케이프를 두른 조문객들도 까마귀처럼 따라왔다
폭풍우에 쓰러진 보리밭 길을 무거운 구름도
행렬에 합류해서 멀리 지평선 끝까지 따라왔다
날이 저물자 조문객들은 실루엣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행렬 속에 혼자 남았다
그러자 까마귀가 우수를 몰고 떼지어 왔다
나의 그림은 형의 출생처럼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이 났다
마텐의 ‘보리밭 장례행렬’과
나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내가 걷기 시작할 때 출발해서
밀밭에서 쓰러질 때까지
따라온 행렬이다
내 울음은 까마귀만이 아는 운명의 소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 화가 아름다운 영혼 빈센트 반 고흐 1』
    (데이비트 스위트먼 지음, 이종욱 옮김. 2004년판 61쪽)
**고흐의 마지막 작품 
 

 

 

 

 

 

 

 

 

  

긴 고독 / 이생진


-빈센트 반 고흐


어머니,
안나 코르넬리아 (1819-1907)
‘어머니’라는 말은 용서한다는 말
어머니는 나를 뱃속에서부터 용서한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내 아픔을 나보다 많이 기억한다
내가 불효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22년 뒤에 가셨고
아들보다 7년 뒤에 가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외로움이 길다

어머니는
6남매를 입히느라 쉴새 없이 뜨개질을 했다
하나를 뜨고 나면 다른 하나가 떨어졌다
쉴새 없이 움직이던 손
6남매가 다 자란 뒤에는 그 손으로 편지를 썼다
이 집 소식을 저 집에 알리고
저 집 소식을 이 집에 알렸다

아버지가 설교 준비를 할 때
어머니는 사진첩에 꽃을 그렸고
나도 옆에서 꽃을 그렸다
아버지의 성경책과 어머니의 꽃그림
나는 성경책을 들고 아버지를 따르다가
화필을 잡았다
결국 어머니를 따른 셈이다
성직자의 길로 가지 못한 것을
어머니는 그림으로 달랬다
죽을 때까지 화필을 놓치지 않은 것은
어머니를 놓치지 않겠다는 외로움
나의 화필은 나의 어머니다

 

 

 

 

 

  

 

 

고흐의 고독 / 이생진

 


고독은 돌고 돈다
풍차 없이도 돌고 돈다
바람이 없어 멈춘 풍차와는 달리
바람 없이도 돌아가는 고독
그게 고독의 정체다

시엔*을 생각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어데로 갔을까 하고 생각할 때
풍차가 돌기 시작한다
돌아가는 풍차 사이로
빌렘**의 손이 보인다
고사리 같은 주먹을 입으로 가져가며 옹알거린다
예쁜 고독이다

풍차가 돌아가면 바람이 보이듯
생각이 나면 보인다
보이는 대로 눈물이 쏟아지는 고흐의 눈
이게 고흐식(GOGH 式) 절망이다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파멸만 있어 넌더리 난다고
소리친다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   ‘슬픔’의 모델이며 고흐와 1년 10개 월 동거한 여인
**  시엔이 낳은 아이

 

 

 

 

 

 

 

고흐의 바다 / 이생진


함부로 뛰어들 수 없는 바다
어부는 배가 있어야 하고
화가는 흥분이 있어야 한다
이젤을 세우는 순간 멍해진 고흐
생트 마리 드 라 메르 해안에서
지중해의 시퍼런 압력에
으스러져라 튜브를 짜는 혼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
거침없이 터져 나오는 야성
바닷속으로 뛰어든
고등어와
고래와
상어의 눈에
뜨거운 아프리카가 보인다  

 

 

 

 

 

 

 

 

 

우체부 룰랭 / 이생진


- ‘우체부 조셉 룰랭’ 앞에서


비가 내린다
장대비 사이로 우수도 내린다
비를 맞으며 찾아오는 룰랭
룰랭을 만나면 고흐는 즐겁다
우편낭을 기차역(驛)으로 운반하는 키다리 아저씨
우체국보다 술집이 가까운 룰랭
취하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
‘나가자 조국의 아들딸들아’ 하고
라 마르셰에즈* 를 부르는 천진
수염을 긁으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할 때
그는 당당한 톨스토이가 되고
그러다가 금방 중학생으로 긴장된다
그림에 재미붙여 아내와 가족을 모델로 써달라던 날
둘이서 마신 술값이 모델 값보다 많다
통통한 아내 오귀스틴을 그리고
입대 직전인 큰아들 아르망을 그리고
모자 쓴 작은 아들 카미유를 그리고
갓난아기 마르셀린을 그렸다

만나면
정치 이야기에
그림 이야기
책 이야기를 하다가 술집으로 빠지는 룰랭
룰랭의 초상화에서는 지금도 술내가 난다

 

*프랑스의 국가
  고흐의 그림 ''우체부 조셉 룰랭''(1889)
  서울시립미술관 반 고흐展에서


 

  

 

 

 

  

 

 

고흐 곁을 떠나는 사람들 / 이생진



고흐에겐 떠나는 사람들 뿐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그 틈에 끼어 고흐도 돌아오지 않는다

고흐가 면도로 귀를 잘라
창녀 라셸에게 주고 난 뒤
고갱이 머리를 흔들며 고흐를 떠나고
테오가 눈물을 닦으며 형을 떠나고
시냐크가 우정 어린 손을 흔들며 떠나고
술친구 룰랭이 아내 오귀스틴과 떠나고
경찰이 노란집에 못을 박아
다시는 고흐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던 아를 마을
마지막으로 떠나지 말아야 할 압생트도 떠난다

고독이 고흐를 끌고 병원으로 들어왔을 때
고흐에게 남은 것은 빈 항아리
고독이 부들부들 떨다가
발작을 일으키고
발작 속에서 분열되는 환청과 환시에
뿌리치는 케가 보이고
흐느끼는 ‘슬픔’의 시엔이 보이고
옹알거리는 빌렘의 유모차가 보이다가
칼을 들고 대드는 괴물에 쫓겨
비명을 지르며 깨어보면
창문에 비친 커다란 정원수
화필을 들어 그리다 지친 눈에
아아 ‘별이 빛나는 밤’ *
떠난 것들은 아름답다

 

*고흐의 그림

 

 

 

 

 

 

  

 

 

 

너도 미쳐라 / 이생진 



병원에서 발작이 끝나면 붓을 들었고
붓을 들면 그림이다
고흐의 시신은 그렇게 산 채로 운구되었다
발작도 힘이 겨워 멈출 때
자꾸 멀어지는 창 밖의 흙을 붓으로 파냈다
흙 냄새와
풀 냄새와
생명의 냄새를
캔버스에 눌러 담았다
그렇게 그린 그림을
의사 레에게 주겠다고 하자
레는 사양했다
아마 그 그림도 고흐처럼 발작 할 것을 염려했나 보다
이번엔 약제사인 루소에게 주겠다고 하자
루소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까짓 미치광이 그림이 뭐 대단해서)
바쁘다는 핑계로 그림을 구경하려 하지도 않았다
때마침 회계를 담당한 뇌비에르가 지나가기에 선물했다
그는 마지못해 받았지만
고흐는 한없이 기뻤다
그리고 고흐가 죽은 뒤
그 그림이 뇌비에르에게서 팔려나갔을 때
의사 레와 약제사 루소가 미칠 판이다
고흐의 그림은 그렇게 주인을 잃은 뒤에 팔려나갔다
고흐의 그림을 보거든 너도 그림처럼 미쳐라 

 

 

 

 

 

 

 

  

  

 

 

노란 집 1 / 이생진


-고흐와 고갱


가난한 화가들끼리 가난을 나누며
그림을 그리자던 상사화
그런 열기로 가득 찬 ‘노란 집’*
결국 가난은 무산되고
그 때문에 빚에 눌린 고흐(1853-1890)
겉은 노랗고 안은 희게 칠하며
고갱(1848-1903)을 손꼽아 기다리던 집
고흐가 신접살이를 꾸미듯 몇 달을 두고 꾸민 방
화병에 ‘해바라기’를 꽂고
해바라기가 시들기 전에 다시 해바라기를 꽂아
온통 해바라기로 뒤덮인 생명의 위력으로
고갱을 맞아들이던 그때만 해도 행복했는데

아니 고갱이 식단을 짜고
요리를 하고
서로 마주앉아 초상화를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압생트를 마시고
브랜디를 마시고
열띤 토론 끝에??
마담 비르지니의 집에서 창녀를 간지럼 치다가
어질어질 카페 식탁에 머리 박고 코골던
그때만 해도 꿈은 꿈이 아니었는데
서로의 베일이 벗겨지며
고갱은 자존심이 들어나고
간섭이 심해지고
타산적이고
무시하고
폭언하고
속이 뒤집혀 참지 못하던 고흐
압생트 잔을 고갱에게 집어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그래도 화가 가시지 않아
면도칼을 들고 달려가던
다음날 아침 고갱이 질책하자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그는
이미 고흐를 떠난 사람

그 무렵 고갱은 젊은 화가들에게
인기가 고조되어 어깨에서 바람이 일던 시절
본래 뱃사람 기질에 주식 중개인
게다가 고흐가 귀를 잘라
창녀에게 주는 발작을 보고
고갱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고흐 곁을 떠났지
그것을 고흐는 후회했지만
무엇인가 하나 둘 잃어가고 있었다

*고흐가 그린 그림 ‘노란 집’ (1888.9)

 

 

 

 

 

 

  

 

 

 

노란 집  2 / 이생진 

 

-고흐의 목소리 



고흐에겐 깨지는 일이 많다
함께 그림을 그리자던 공동생활이 깨지고
그림으로 맺은 우정이 깨지고
인심은 금방 금이 가 감옥으로 가고
방에 걸린 캔버스는
십자가처럼 못이 박히고
아이들은 성한 사람보다 실성한 사람이 재미 있어
뒤따라오며 썩은 배추 밑동을 던지고
어른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미친 사람을 마을에 둘 수 없다며
아녀자들에게 위험하니 쫓아내라고
진정서를 내고
고흐는 감옥에서
‘내가 무슨 죄냐’고 소리치다가 또 한번 가무러진다

허약한 소리

갈증 난 소리
고통에 찢기는 소리
공포에 질린 소리가
‘노란 집’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귀에 들린다
그림은 눈물을 흘리고
그림 앞에 선 사람은 손수건을 꺼낸다

더 노랗게 칠해야 한다며
압생트 술병에서 떠나지 않던 고흐의 눈
그 눈에 황시증이 들어가 노란 벽을 두드린다

초록색 덧문에
아직은 한적한 카페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
구름다리를 지나가는 기차 소리
속도에 끌려가는 흰 연기
파란 하늘 아래 올리브나무
멍하니 서 있는 가로등 하나
듬성듬성 긁어 모은 모래 더미
아무 것도 소리 내지 않는다

그보다 생각이 다양한 관람객들은
시민 여러분!*
이 그림에서 고흐의 소리가 들립니까?
무슨 소리?
하고 되묻는 사람이 없어 그림은 더욱 조용하다

하지만
“화가로서 나는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하리라” 고 낙담하며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가던 발자국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고흐는 강한 소리를 한다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우정으로 찾아온 시냐크(1863-1935) 앞에서도 발작을 했다
시냐크는 고흐의 몰락은 고갱 때문이라며 파리로 돌아간다
그가 돌아간 뒤 고흐는 고갱이 뿌리치고 돌아갔을 때처럼 외롭다

화려한 ‘해바라기’의 꿈은 사라지고
떠나고 싶지 않은 ‘노란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가며 하던 소리
“나는 이제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할 거야”
그림 속에는 지금도 아홉 사람이 밖에 앉아 있거나 걸어가거나 하는데
‘노란 집’ 앞엔 100년 후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가셰 박사의 초상 / 이생진 

 


화가는 청진기를 귀에 꽂지 않고 눈에 꽂는다
첫인상으로 구도를 잡고
원근을 끌어다가
색을 칠한다
화가는 눈이 청진기다
내가 화실을 기웃거리는 것은
눈에 꽂은 화가들의 청진기 때문이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자기와 흡사한 진동에 머리를 갸울인다
고흐가 보기에도 자기 증세와 비슷한 가셰 박사
그는 60을 넘긴 정신과 의사다
해군 모자를 쓰고
눈에 낀 푸른 애수가
압생트 성분이 강한 디기탈리스 꽃에 안겨 있다
빈센트의 발작은 압생트 과음 때문이라는데
세상을 노랗게 적시는 독성
고흐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정신병의 기록을
가셰 박사의 얼굴에 담으며 편지를 쓴다
‘나는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유령으로 보이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가셰는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으나
가난에 시달리는 고흐의 그림을 사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그림을 거저 얻으려는 얌체
자기 초상화를 두 개 그려서 하나 달라는 얌체다
자기 초상화를 그리는 고흐에게 자기 딸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도 그리라는 선심을 썼지만
딸이 고흐를 사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100년 후 유령처럼 보이는 초상화
그 대상이 가셰다
가셰는 의술로 유명하기보다
고흐가 그린 초상화로 유명해진 의사다 

 


*가셰 박사의 초상:고흐가 자살하기 수주일 전에 그린 그림 

 

 

 

 

 

시인의 맹세 / 이생진

 

- 김삿갓  

 

 

시란

시인에게 굴레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씌워진 굴레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떠나는 괴로움과

떠도는 외로움

시인은 출발부터가 외로움이다


불행하게도

벼랑을 맴돌며 노래함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기꺼이 그 숙명에 동참하겠다고

맹세하마  

 

 

 

 

 

 

 

 

 

나만 남았다 / 이생진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너무 많은 행복 / 이생진 
 

 

 

행복이 너무 많아서 겁이 난다
사랑하는 동안
행복이 폭설처럼 쏟아져서 겁이 난다

 

강둑이 무너지고
물길이 하늘 끝 닿은 홍수 속에서도
우리만 햇빛을 얻어 겁이 난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무 것도 없는 너와 난데
사랑하는 동안에는
행복이 너무 많아 겁이 난다 

 

 

 

 

                   

 

 

*********************************************

 

이생진 시인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국제대 영문과 졸업 

윤동주 문학상 수상 (1996년)
상화(尙火)시인상 수상 (2002년)


1955 시집 <산토끼> 발간 
1969 현대문학에 시 고요한 전갈 외 2편이

추천되어 등단 

 

시집  

< 녹벽 綠壁 >  

< 동창화 洞窓畵 >   

< 나의 不在 >  

< 바다에 오는 이유 >   

< 자기 >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 산에 오는 이유 >   

< 섬에 오는 이유 >   

< 시인의 바랑 >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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