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서남부에 자리한 강진은 동쪽으로는 장흥, 서쪽으로는 해남, 북쪽으로는 영암 그리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완도와 이웃한 조용하고 아늑한 고을이다. 달리 말해 동·서·북쪽은 산으로 보호막을 치되 남쪽으로는 문을 열어 내륙 깊숙이 바다를 불러들이고 있으니 지명이 뜻한 바대로 천혜의 '안온한 나루터'인 셈이다.
우선 산세를 둘러보면, 백두대간의 한 지맥을 이은 기골이 장대한 월출산(809m)이 북쪽에 떡 버티고 앉아 동서로 길게 제 팔을 뻗어 강진땅 전체를 감싸고 있다. 오른팔에 해당하는 서쪽 산줄기는 서기산(511m), 석문산(272m), 덕룡산(433m), 주작산(475m) 그리고 해남의 두륜산, 달마산, 땅끝 갈두산까지 차례로 굽이치다 남해바다로 흘러든다. 또한 왼팔에 해당하는 동쪽 산줄기는 수인산(修仁山, 561m), 화방산(花芳山, 402m) 그리고 장흥의 사자산, 천관산을 거쳐 다시 부용산(芙蓉山, 609m), 천태산(天台山, 549m)까지 이어지다 남해바다로 잦아든다. 이 큰 두 산줄기 안에 별도로 강진의 중심지역을 품은 보은산(寶恩山, 439m)과 비파산(琵琶山, 400m), 만덕산(萬德山, 409m)이 놓여 있다. 이 양쪽 산줄기의 생김새를 비교한다면, 둘 다 빼어난 자태를 자랑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기묘한 바위가 많아 마치 병풍을 몇 십리까지 일렬로 펼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공룡의 등갈기 같기도 한 서쪽이 사납고 남성적이라면, 바위가 많지 않고 높은 산 못지 않게 야트막한 산들이 지그재그로 혼재한 동쪽은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따라서 산의 높낮이가 별로 없이 일렬로 빠르게 이어지는 서쪽 능선이 다소 직선적이라면, 산의 높낮이가 많고 능선이 유장한 동쪽은 곡선적이다(이러한 생김새는 강진읍 북산에 있는 고성사에 올라 바라보면 분명히 구별된다). 또한 서쪽이 귀족적인 절경을 자랑한다면 동쪽은 서민적이요, 서쪽 능선 아래로 떨어지는 일몰과 월몰이 장관이라면 동쪽은 천관산 자락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일출과 월출이 또한 장관이다. 그래서 강진사람들은 옛날 '탐진현감의 명판결문'에서 따온 '생거칠량 사거보암(生居七良 死去寶岩)'이라는 구절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바, 풀이하면 '칠량에서 살다가 죽으면 보암(도암의 옛 이름)에 묻힌다'는 뜻이다. 즉 생전에는 오곡과 어물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한 탐진만의 동쪽에 있는 칠량이 좋고, 죽어서는 산세가 좋고 명당이 많은 탐진만의 서쪽 도암으로 가 묻히라 하였으니 이 또한 양쪽의 산세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다음으로 수세를 살펴보면, 전남의 3대 강의 하나인 탐진강(耽津江)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장흥 유치의 가지산에서 발원한 물줄기와 월출산 남록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서로 만나 이루어진 이 강은 강진의 들녘을 적시며 유유히 흐르다가 탐진만과 만난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내륙 깊숙이 파고든 탐진만은 그 청정한 물빛 속에 양쪽 산자락들을 빠뜨리며 유유자적하는가하면 주변에 수많은 바닷가 마을을 기르며 자장가처럼 찰랑댄다. 또한 까막섬, 대섬 등 6개의 자그마한 섬들을 오리새끼들처럼 띄워 잠방거리게 한다. 그리고 썰물이 지면 드러나는 허리까지 빠지는 질펀한 개펄은 예로부터 그 유명한 강진의 바지락과 대합 등 해산물의 보고이다.
이렇듯 강진의 산하는 산(山)과 수(水)가 서로 조응하여 빼어난 풍광을 연출하고 여기에 물(物)이 풍부하여 걱정이 없어 편안하니 그야말로 강진(康津)이요, 편안하고 여유로워 풍류가 또한 있으니 가히 탐진(耽津)이라 할만하다.
그렇다면 앞에서 살핀 산과 수의 생김새를 토대로 강진의 풍수를 들여다보면 어떤 형국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사람의 하체(여자) 또는 '요니형국(女陰形局)'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강진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 보라). 풍수지리학에 관한 한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눈에는 특히 영락없는 요니형국(女陰形局)으로 보인다. '요니'란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말이니 풍수에 조예가 깊은 강진사람들은 몰아부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사람은 또 있다. 문학평론가 김훈은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에서 탐진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음을 본다.
강진만의 바다는 따스한 요니(女陰)처럼 육지를 파고들어 조붓하고 아늑하였다. 등 푸른 여름산맥들이 그 요니의 바다를 따라서 만의 하구로 치닫고 있었다.
요니는 생명 탄생을 위한 입구와 출구로서 자궁과 연결되어 있는 중요한 기관이다. 자궁은 주지하다시피 생명이 잉태하여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자라고 놀 수 있는 가장 편한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장소를 동경하게 되며 죽어서 자궁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본능을 지니고 있으니 이것이 다름 아닌 '자궁회귀본능설'이다. 이 자궁회귀본능은 인간의 낙원의식이나 고향의식과도 연결된다. 또한 자궁은 풍수학상으로 보면 명당(明堂)자리에 해당하지 않던가. 그런데 강진의 지형이 다름 아닌 요니형국이니 바로 천혜의 명당이요, 포근하고 아늑한 만인의 낙원이자 고향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다면 강진의 요니형국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다소 우스꽝스럽긴 해도 탐진만이 바로 그 요니의 질 부분, 탐진만의 양쪽 산줄기들이 대음순, 바다의 위 아래로 흩어져 있는 섬들이 소음순, 그 섬들 중 맨 위에 있는 대섬(竹島)이 음핵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음핵에 해당되는 대섬은 강진땅이 부자가 많은 요인이라 하여 일제시대엔 이를 시기한 일본인들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강진사람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는 일화까지 남아 있다. 그러면 자궁에 해당되는 부분은 어디일까가 궁금한데, 그곳이 다름 아닌 지금의 강진읍이다. 말하자면 현 강진읍은 최고의 명당자리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렇듯 밀물과 썰물이 하루에 두 번씩 요니의 물길을 따라 들락거리는 탐진바다는 언제나 잔잔한 평화를 강진 사람들에게 안겨 준다. 아무리 태풍이 불어도 동·서·북쪽으로는 건강한 팔뚝의 산들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올망졸망한 다도해의 섬들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진의 산하를 답사할 때마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고향에 온 것 같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서울에서 태어난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러한 소회를 부추기는 데는 다른 무엇보다도 탐진만이 그들을 매료시키는 힘이 크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탐진만이 항상 바닷물로 넘실대고 개펄이 넓고 깊어 조개 등 맛이 뛰어난 해산물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 걸 보면 강진땅이 아직껏 건강하고 풍요롭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해안을 막아 간척사업을 벌이고 그 위에 공장을 지어 오폐수를 흘려보낸다든지 하여 청정한 바닷물을 오염시킨다면 탐진 바다는 병들어 더 이상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선사할 수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한편, 강진의 지형은 예로부터 '와우형국(臥牛形局)'이라고들 널리 알려져 있다. 황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이는 강진땅 전체를 일컫는 것이라기보다 현 강진읍의 뒷산인 보은산(寶恩山, 지금의 北山) 일대를 중심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황소가 비스듬히 누워 한가롭게 되새김질하는 모습을 연상하면 틀림없다. 그런 황소의 품안에 강진읍이 자리하고 있다. 강진읍은 앞에서 요니형국으로 보아도 명당자리에 해당한다고 했듯이 풍수학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임에 틀림없다. 보은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탐진강과 탐진바다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강진읍 일대는 실제로 이 와우형국의 풍수설에 입각하여 그 이름이 지어진 곳이 허다하게 널려 있다.
먼저 보은산 정상 '자연보호' 철탑이 세워진 우두봉(牛頭峯)은 소의 머리를 뜻하고, 강진읍성터는 소의 얼굴 부위에 해당한다. 지금의 군청(옛 동헌) 앞에는 쌍샘이라 하여 두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이는 소의 좌우 콧구멍이고, 군의 청사는 황소의 콧등에 해당한다. 또한 읍의 동편(동성리)과 서편(서성리)에 큰 공동우물이 있는데, 서쪽은 소의 오른쪽 눈이요 동쪽은 왼쪽 눈에 해당한다. 참고로 소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동문안샘 부근은 다산선생이 처음 강진으로 유배와 머물렀던 곳으로 '사의재(四宜齋)'가 있던 주막거리다. 그리고 우이봉(牛耳峯)으로 부르는 산줄기와 고성사(高聲寺) 일대는 소의 귀에 해당하는데, 고성사의 범종은 소의 풍경을 뜻한다.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 선생의 [금릉팔경(金陵八景)] 중 '고암모종(高庵暮鍾)'은 이 고성사의 저녁 불공을 드리는 쇠북소리를 읊은 것인데, 강진사람들은 이를 소의 풍경소리로 이해한다. 이 고성사도 다산선생이 사의재에서 옮겨와 4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또한 저수지가 있는 고성사 아래쪽에는 소의 귀와 관련된 귀밑재가 있는데, 이는 소의 귀 바로 밑 고개라는 뜻이고, 이 고개를 넘으면 하이변(下耳邊, 귀미테 부락)이라는 마을까지 있다. 그리고 강진읍 입구(다산동상 부근) 보은산의 끝자락을 강진말로 씻끝이라 하는데, 이는 소의 혀끝이며, 지금의 강진농고가 있는 곳은 소의 젖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렇듯 소의 신체 기관에 해당하는 곳 이외에도 와우형과 관련된 이름이 또 있다. 강진읍 앞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목리(牧里)라는 마을의 옛 이름은 초지(草旨)로서 다산초당 가는 쪽에 있는 초동(草洞)마을과 함께 소가 뜯어먹을 넓은 풀밭에 해당한다. 옛날 바닷물이 밀고 올라와 배가 드나들던 포구에 선 장터라 하여 배들이장이라 불렀던 지금의 해태유업이 들어선 자리를 구싯골 즉 소의 여물통이라 하며, 해남방면으로 가다 다산초당 가는 샛길로 꺾기 전의 야트막한 고개를 소가 일하는 곳이라 하여 논치(勞牛峙), 여기에서 4km쯤 가면 소가 일하다 도망가 쉬는 곳이라 하여 시웃재(休牛峙) 또는 쉼바탕, 소의 멍에에 해당하는 탐진만 앞바다의 가우도(駕牛島) 그리고 소똥이 떨어진 자리에 해당하는 영포(옛 백금포)가 있다.
그런데 이 와우형국에 관련된 이름들은 실제로 강진의 역사적 변천사와 오늘의 인물사, 그리고 부의 흐름과도 일맥상통하는 특수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지역민들은 앞으로 강진의 흥망성쇠까지를 이에 관련지어 내다보고 있기까지 하다.
우선 강진의 중요 공공기관은 소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자리에 밀집되어 있다. 특히 씻 끝에 해당하는 부근은 소의 두뇌에 해당된다 하여 강진고를 비롯한 교육기관과 강진도립병원, 농촌지도소 등 주요 기관이 들어서 있다. 소의 콧등에 해당하는 자리엔 강진군청과 경찰서가, 콧구멍에 해당하는 자리엔 군립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소의 귀에 해당하는 부위에 있는 고성사는 다산선생이 사의재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4년간 머물며 그의 큰 아들과 함께 주역 등 학문을 닦았던 현장이고, 소의 얼굴 부위 안에 있는 영랑생가를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3대 판사가 날 자리라고 한다. 풍장득수(風障得水)라 하여 온갖 바람을 막아주되 동풍(東風)만이 들고, 생가에서 바라다보면 남포의 밀물만이 드는 것이 보이되 썰물은 안보이니 운과 재물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자리라는 것이다. 3대 판사는 아니지만 이 땅의 빼어난 서정시인을 배출했으니 이 또한 빈말이 아니라고 보겠다. 그리고 귀미테 부락은 명당의 기운을 받아 삼천리호 자전거로 부를 이룬 김향수(현 아남산업회장)씨가 태어난 곳이다. 또 소똥이 떨어진 자리인 영포(백금포)는 일제시대에 이 일대의 농산물을 운반하는 전진기지로 활용되었으며, 정미소를 경영하여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 소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우두봉에 '자연보호'라는 명분으로 철탑을 박았고, 도로확장공사를 한다며 가장 중요한 부위에 해당한다는 씻끝의 끄트머리를 잘라버렸으며, 버스터미널부터 영랑생가까지 일직선으로 도로를 뚫어 영랑로라 하여 강진읍을 반으로 훵하게 갈라놓고 있다. 소의 정수리에 철탑을 박았으니 도끼로 머리를 치는 격이며, 혀를 잘렸으니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먹을 것이 있다고 한들 먹지를 못하는 격이다. 또 운과 재물이 들어와 모여 쌓이는 영랑생가의 기운이 오히려 영랑로를 따라 빠져나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진에 번영을 가져온다는 속설을 지닌 가우도의 동쪽에 벌이고 있는 간척사업과 규석을 캔답시고 명산의 기운을 무시한 채 만덕산 옥녀봉과 덕룡산의 심장부를 헐어내는 일, 소가 마실 물에 해당하는 강진읍 자리의 여러 우물을 메워버린 일 등 안타깝게도 곳곳에서 무분별한 훼손이 자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우도의 서쪽은 간척사업 등으로 육지와 연결하더라도 동쪽으로는 물이 흐르는 바다가 남아 있어야 강진이 번영한다는데 이를 무시한 것이고, 천상의 옥녀가 배를 짜서 강진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입혀주니 그 덕이 크다는 만덕산 옥녀봉의 배틀 부위를 한국유리주식회사가 헐어 흉측한 자연 훼손과 공해만 야기할 뿐 규사의 원석을 인천시로 직송하여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강진사람들은 이래저래 손해만 보고 먼 산 쳐다보는 격이며, 옛 속설에 '소가 마실 물이 없어지면 외지인들이 기세를 부리게 된다'는데 이제 읍내의 우물이 대부분 메워져 마실 물이 없어졌으니 앞으로 외지인들에 의해 강진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렇듯 지역의 원로들은 풍수설에 따라 강진의 길흉을 풀이하고 있는 바, 이는 오랜 세월동안 믿고 지켜왔던 신앙과도 같은 것이므로 관계 기관에서는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만 무시할 일이 아니라 앞으로라도 이를 충분히 고려하여 개발을 펴나가야 바람직할 것 같다. 그리고 와우형국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흥미롭다. 이 전설은 강진사람들의 기질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 년 전 강진현에 부임한 현감들은 이 지역 이속(吏屬)들의 텃세가 워낙 깔깔하여 미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누구나 강진현감으로 부임하기를 꺼리는지라 자리가 비어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조선 효종 2년(1651) 신유(申劉, 1651-1653까지 3년간 재임)라는 사람이 자원하여 현감으로 내려 왔다. 풍수지리에 능한 그는 부임하자마자 강진읍의 산세와 지세를 살폈다. 그 결과 거대한 황소가 누워 있는 와우형국인지라, 이 때문에 이곳 이속들이 황소처럼 힘이 세고 억세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이이에 미치자 그는 황소의 기(氣)를 꺾어놓기 위해 급소에 해당하는 곳을 찾아 연못을 파버리기로 작정했는데, 그곳이 지금의 어린이공원과 군립도서관 자리에 있었다는 연지(蓮池)다. 이곳은 황소의 두 콧구멍에 해당하므로 아무리 힘센 황소라 할지라도 코뚜레를 하면 어린 목동에게조차 끌려다니지 않을 수 없는 이치를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주민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양뿔 사이의 급소에 해당하는 현재 양무정 뒤에 있는 비둘기바위 바로 위를 석자 세치쯤 깎아내리고, 강진읍의 건너편 금사봉이 우두봉에 맞서므로 상하 질서가 없다고 하여 또한 석자 세치를 깎아 내렸으며, 코뚜레 둘레에 해당하는 서성리 읍성의 한 부분을 잘라 고성사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연지로 끌어들였다. 또한 그것으로 만족치 않고 황소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동문안샘을 바깥으로 내몰기 위해 약 200m 가량 안쪽으로 읍성을 다시 쌓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지방 이속들 때문에 현감이 골치 앓는 일이 사라졌다고 하며, 동문안샘이 성 바깥으로 격리된 이후부터 이속들 중 왼쪽 눈을 못보는 애꾸눈도 나왔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와우형의 풍수설은 강진땅의 길흉화복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강진사람들의 삶과 기질에까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위의 이야기로 보면 마치 강진사람들이 말을 잘 듣지 않고 시시비비를 일삼으며 힘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개 전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강진사람들은 소의 성품을 닮아 온순하고 선량하며, 힘든 일도 잘 참고,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간섭을 받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묵묵히 자기의 일에 충실한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다. 또한 다소 텃세가 깔깔하되 불의를 보면 저돌적으로 일어설줄 아는 사람들이다. 이 이외에도 풍수설과 관련, 강진은 월출산을 제외한 주요 산의 명칭들이 숫자와 불교적인 색채를 띠는 특수한 것들이 많음을 보여준다. 군동면 일대에 있는 천불산(千佛山)은 불교의 상징적인 산이요, 도암면의 만덕산(萬德山)은 천불산을 누르기 위해 만(萬)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 장흥과 인접해 있는 억불산(億佛山)은 만덕산을 누르려고 억자를 붙였고, 이들 산들을 총괄하는 산이 없자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병영면의 조산(兆山)이 있다. 말하자면 강진의 산 전체를 천, 만, 억, 조로 체계화하는 지혜를 보였다는 것이다.
월남사터가 있는 경포대에서 무위사로 향하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강진쪽으로 3Km쯤 가다보면 무위사 안내 간판이 보이는데, 거기에서 다시 우회전하여 월출산 쪽으로 3Km쯤 평화롭고 한적한 길을 따라가면 무위사가 나온다. 그리고 경포대입구에서 서쪽으로 1Km쯤 가면 무위사가 나온다. 이 길은 월출산 기슭을 깎아 만든 길이지만 색다른 느낌에 흠뻑 빠져든다. 이 한적한 횡단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나 여유을 갖고 산보하기 좋은 황홀한 길이다.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馬天牧)장군이 성을 쌓을 자리를 잡기 위해 일망대라는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던 중 잠깐 조는 사이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활을 주면서 쏘아 보라 하여 시위를 당겼다. 이상하다 생각하여 잠에서 깬 뒤 화살이 날아간 곳을 찾아갔더니 그곳에 정말로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병영의 중심을 잡아야 겠구나 마음 먹고, 이번엔 성의 넓이를 궁리하였으나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새던 중 밤새 눈이 수북히 내려 쌓였으나 신기하게도 성터에 해당하는 곳만 눈이 쌓이진 않으므로 그곳에 성을 쌓고 이를 설성(雪城)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신지마을 동쪽 별락산 중턱에는 애기바우라는 5m가량의 바위가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수건을 쓴 부인이 아이를 업고 서 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옛날 병영에 살던 한 부인이 밤에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내일 무엇을 보더라도 못본 척 해야 한다. 만약 내 말을 어기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뿐더러 네 귀한 자식도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다음날 부인은 애기를 업고 산으로 산나물을 캐러 갔다. 마침 봄이 한창인지라 잠깐 앉아서 경치를 즐기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병영 일대의 산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엄청난 광경을 보고 있던 부인은 놀란 나머지 간밤에 백발노인이 당부했던 말을 잊은 채 일어나 "우화 산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해 버렸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들이 움직이는 일을 멈추었고 동시에 부인은 애기를 업은 채로 그 자리에 바위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다른 설화는 병영성이 들어서고 처음으로 군사가 주둔할 무렵 수비병으로 소집된 한 군인이 있었다. 그에게는 아이를 밴 아내가 있었는데, 남편이 입대한지 얼마 후에 아들을 낳았다.아내는 남편이 그립기도 하고 귀여운 아들을 보여주고 싶어 병영성을 찾아와 면회를 신청했으나 마병사는 군사들의 기강을 위해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내는 먼발치에서나마 남편을 보려고 아기를 업은 채 별락산에 올랐다. 그런데 마침 성 주위를 순시하던 마 병사가 이를 발견하고는 진노하여 "저 요망스러운 것을 잡아다가 어느 병사의 계집인지 확인하여 본보기를 보이라"며 불호령을 내렸다. 이에 군사들이 우루루 산으로 올라가자 아내는 그만 아기를 업고 산을 오르던 자세로 굳어 바위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후부터 이 '애기바우'는 병영성 군사들의 군 기강 확립이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황장군에게는 평소 둘도 없는 충복이요 수많은 전투장에 늘 자신과 함께 있었던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장군이 남원성 싸움에서 전사하자 이 애마는 눈물을 흘리며 주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에 김완장군이 황장군의 시체를 거두어 애마의 등에 태워주었더니, 적의 눈을 피해 두야로 300리 길을 달려 이곳 구상리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먹지 ㅇ낳고 마굿간에서 고개를 떨구고 서 있던 말은 황장군의 장례가 끝난 3일 후에야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애마의 눈물겨운 충정에 감복한 유족들과 마을 사람들이 말의 시체를 황장군의 무덤 근처에 묻어 주었는데 이 말무덤이 이른바 양건당애마지총(兩蹇堂愛馬之塚)이다.
옛날 낙산마을에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과부가 된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아버지가 소를 몰고 병영성 부근의 논에 쟁기질을 하러 갔다.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위해 새참으로 닭죽을 쑤어 갖다 드리고는 돌아왔다. 그런데 일을 마친 후 시아버지가 그 죽을 먹고 그만 즉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근방 사람들이 흉칙한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독살했다며 병사또에게 고발하자, 포졸들이 며느리를 병영성으로 잡아 들였다. 이때 병영성의 주인은 새로 부임한 오병사였는데, 그가 이 사건의 내력을 묻자 며느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에 오병사는 시아버지가 죽은 현장에 전과 같이 닭죽을 쑤어 갖다 놓고 군사들을 매복시켜 살피라고 명령했다. 그랬더니 성벽 밑에서 커다란 지네가 나와 닭죽을 훔쳐먹고는 다시 사라지는 광경이 목격됐다. 이사실을 보고 받은 병사는 이 사건의 내막이 지네의 독 때문이지 며느리의 독살음모가 아님을 밝히고 오히려 그 며느리에게 효부상까지 내렸다. 이 명판결로 인해 오병사는 이후부터 오똑똑병사로 불려졌다고 한다.
보물 제29호로 지정된 에는 석공과 그의 아내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하고 있다.
옛날 이 3층석탑을 만든 석공에게 젊고 아리따운 아내가 있었다. 석공은 아내에게 탑을 완성할 때까지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하고 월남사로 떠났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는 너무 오랫동안 집을 비운 남편이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 몰래 월남사를 찾아갔다. 아내는 먼발치에 숨어서 탑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편을 훔쳐보았다. 그리고는 아쉽지만 그냥 돌아서려고 하였으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남편을 부르고 말았다. 그러자 사랑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석공이 머리를 돌리는 순간 갑자기 벼락이 치더니 완성 직전에 있던 석탑은 산산조각이 나고 아내는 돌로 변해버렸다. 돌이 되어버린 아내를 어루만지며 슬퍼하던 석공은 처음부터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인근을 뒤져도 마땅한 석재가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아내의 화신인 돌을 쪼아 지금의 석탑을 완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선시대 어느 병마절도사가 부임하여 관내의 상황을 전부 보고 받은 뒤 흥분하여, 병영 남쪽 도암에는 만덕산이 있고, 군동에는 전불산이 있으며, 장흥에는 억불산이 있는데 어찌 병마절도사가 있는 병영에는 이들을 능가할 만한 산이 없느냐. 이는 전라병마절도사영이 있는 이곳의 위신과 체면에 관한 일로 묵과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병사는 곧바로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흙산을 만들고 풍수상 이 산을 천,만, 억을 누를 수 있는 조산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척동에는 효성이 지극한 광신과 명신 두 형제가 살았다. 그들은 참게를 좋아하는 부친을 위해 항상 이를 구해 봉양하였다. 그러던 중 부친이 세상을 뜨고 말아 묘 곁에 움막을 짓고 3년상을 치루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묘 아래쪽에 있는 작은 샘에서 물을 길을 때마다 참게가 나와 이를 잡아 제찬으로 올렸다. 이렇게 하여 3년상을 치루고 나니 더 이상 참게는 나오지 않았다. 그 후 모친이 세상을 뜨자 또다시 상중에 참게가 나오다가 탈복한 뒤로는 나오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형제의 지극한 효성으로 인해 생긴 기적이라 여겨 그때부터 이 샘을 참게샘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논 가운데에 있는 이샘에서는 시원한 물이 계속 솟고 있다.
애초에 한갑보는 지금과는 달리 조금만 비가 와도 터져버려서 제구실을 못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보 막기에 지친 농부들이 판수나 무당을 찾아가 점을 쳐본 결과 지신제를 정성껏 지낸 뒤 어린 아이 한 명을 구해 보의 둑에 생매장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론이 분분하여 탄식만 늘어갈 뿐 막지 못하고 안타까운 세월만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과부 한 사람이 나씨(羅氏)성을 지닌 남자와 함께 어린 아이를 업고 현장엘 찾아와 자기 아들을 희생물로 제공한 대신 그 대가로 얼마간의 돈을 요구했다. 그렇게 하여 드디어 보는 막아지게 되었는데 과부가 돈을 머리에 이고 남자와 함께 떠나려는 순간 난데없이 노성이 진동하고 폭우가 쏟아지더니 두 남녀는 벼락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 윗마을에 모여 살던 나씨 가문도 멸문지화를 당하고 말았는데 그때부터 이 마을을 나망골(羅亡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벼락이 칠때 갈라졌던 능선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어미가 돈에 눈이 어두워 자식을 팔아 자기만 잘 살겠다고 하다가 천벌을 받아 죽은 자리를 파면 엽전이 나온다고 한다. 지금도 비만 오려고 하면 괴기 서린 어린 아이의 원곡성에 주민들이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해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이 보에 빠져 죽는다는 무시무시한 속설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한갑보라는 명칭은 당시 수장된 어린 아이의 성이 한(韓)이요 이름이 갑(甲)인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토사로 깊이가 얕지만 과거엔 워낙 깊어서 명주실 세타래를 풀어야만 그 밑에 닿았다고 한다.
첫댓글 지나가는 길에 한번씩 읽어보시길 내고향 강진만을 자랑삼아서 몇자 적어보다 자료가 있어서 올립니다 내가 하고잡은말들을 모조리^^ 글좀 써볼라꼬 했는디 기회를 안주네... 참 거시기 해부러~
글자만봐도.. 머리아프네요~
참좋은글입니다..이글만읽어도 강진의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필이 가보고 싶습니다
나도 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