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에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소위 주기도문이 낯설지 않습니다. 상당수는 보지 않고 외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으로 외울 줄 아는 것과 그 의미를 알고 그에 걸맞게 생활을 하는 것은 별개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기도문 중에 나오는 “나라이 임하옵시며”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싶습니다. 우선 국어 표현 자체가 어색합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은 조사 ‘이’를 ‘가’로 바꾸어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재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헬라어와 영어 성경(‘thy kingdom come’)의 의미를 제대로 살린다면, “왕국이 임하옵시며”(‘오게 하시며’)가 좀 더 정확한 번역이긴 합니다.
“…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국 안에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습니다.
육 일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어,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니”(마 16:28-17:2).
솔직히 제가 위 본문을 이해하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오는 것을 주님의 재림 혹은 교회 시대가 끝난 후에 천년왕국이 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왕국이 올 것’이라는 말씀이 안 풀렸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주 예수님의 변형’이 곧 ‘왕국이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
1) 먼저 ‘나라’(nation)와 ‘왕국’(kingdom)은 다른 개념임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 검색해 보니, 마침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 문화사> 내용이 그 차이를 매우 흥미 있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래 설명에 따르면, 왕국은 왕이 있어야 성립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위 본문 안의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 932)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의 왕국은 ‘왕이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성한) 영역’입니다.
“사로국을 사로 왕국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로국의 특징과 성격이 왕국이라고 하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신라 왕국은 … 오랜 세월을 사로국으로 존재하다가 어느 단계에서인가 신라 왕국으로 질적 변화를 하였던 것이다. 신라 왕국으로 변하였다는 것은 왕이 등장하였다는 의미이다.”
2) 사탄의 반역과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하나님의 왕국이 사실상 없었습니다. 한 예로 주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거부했고(요 1:11), 하나님을 섬긴다는 대제사장들도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요 19:15). 따라서 이 땅에서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신 예수님 자신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왕국이셨습니다(눅 17:21). 그러므로 ‘왕국이 임하옵시며’라는 우리 기도의 1차적인 성취는, 하나님의 원수이자 죄인들이 회개하고, 그들 존재 안에 ‘하나님의 왕국이신 주 예수님’을 왕국의 씨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막 4:26).
3) 그럴 때 주님은 그분의 신성한 통치 영역인 왕국을 우리의 거듭난 영 안으로 이끌고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 후에는 자기 멋대로 살던 우리의 자아와 그것을 정복하여 통치 영역을 우리의 영에서 혼으로 넓히시려는 주님 사이에 사사건건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왕국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제부터는 고집 안 부리고 당신의 다스림에 굴복한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어야 합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에 대해 개혁주의 학술원 홈페이지에 개제된 아래 해설도 이와 거의 같은 맥락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나에게서부터 온전히 임하여야 한다. … 내 마음속에 주님이 오셔서 나를 다스리시고, … 내 영혼과 내 생각을 온전히 지배하실 때 나의 모든 삶 속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 뜻이 완전히 실현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4) 그렇다면 이런 전제 아래, 서두의 하나님의 왕국과 주 예수님의 변형은 어떤 연관성을 갖는 것일까요? 존 넬슨 다비는 관련 주석에서, 그 변화산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의 고백(벧후 1:16)을 근거로, 이러한 주님의 변형은 “그분께서 장차 영광 안에서 오실 표본이었다”(It was a sample of the glory in which He would hereafter come.)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광(변형)은 그분의 인성이 신성으로 적셔진 결과입니다. 이 표본처럼, 거듭난 우리 안에서도 우리의 인성이 신성으로 적셔져서 영광 안으로 이끌리는 동일한 과정이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골 1:27, 히 2:10).
이 글을 쓰면서 이런 자문을 해 보게 됩니다. 1) 나에게 그분은 왕이신가? 2) ‘왕국이 임하옵소서’가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던 생활을 접고 매사에 그분의 제한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임을 알고 이런 기도를 하는가? 3) 나의 존재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그분의 통치 영역이 되었는가?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의 통치자들과 달리, 왕이신 그분은 생명과 빛과 사랑에서 흘러나온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께 백기 투항하더라도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골 1:13) 안에서 사랑과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누릴지언정, 고통스러운 억압과 탄식과 눈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오 주님, 저를 더 깊이 다스려 주소서!
당신의 왕국이 제 안에서 날마다 확장되게 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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