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간별 특징>
구간하나:과거와 현대의 공존,인왕자락에서 숨 쉬다
숭례문 - 창의문 구간 | 총 길이 : 5.3km/소요 시간 : 3시간 30분
서울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서 출발하면 곧 걷게 되는 정동길에는대한제국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후 성곽은인왕산338m 능선을 타고 거친 곡선을 그리며 상승과 하강을 이루며
창의문에 이른다. 인왕산 능선 구간은 2012년 5월까지 복원공사로 출입이 제한된다. (관련 10쪽)
구간둘:백악마루 아래서울이 열리다
창의문 - 혜화문 구간 | 총 길이 : 4.7km/소요 시간 : 3시간
내사산 중 주산主山에 해당하는 북악산(백악산)342m의 급경사를 따라성곽이 놓였다. 정상 백악마루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아름다움은 이루말할 수 없이 뛰어나다. 창의문안내소와 말바위안내소 사이는 신분증이
있어야 통행이 가능하므로 집을 나서기 전 다시 확인하자.
(관련 16쪽)
구간셋: 역사와 패션·문화가 만나다
혜화문 - 광희문 구간 | 총 길이 : 3.2km/소요 시간 : 2시간
남녀노소 누구라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완경사 성곽 탐방로 구간이다.사대문 중 유일하게 옹성이 있는
흥인지문을 거쳐 수구문이라 불리기도했던 광희문까지 걷게 된다. 평지 구간의 성곽이 많이 훼손돼
아쉬움이남는다. (관련 20쪽)
구간넷: 600년 도읍지 한양을 마주하다
광희문 - 숭례문 구간 | 총 길이 : 5.4km/소요 시간 : 3시간
광희문을 출발해 장충동 성곽길에 이르면 잘 보존된 성곽과 탐방로를만난다. 남산262m 구간에는 계단이 많은 편이지만 숲이 우거져 공기가 상쾌하다. 남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 야경은 꼭 봐야 할 서울의 진풍경이므로 놓치지 말자. (관련 24쪽)
<구간별 상세>
구간 하나 : 숭례문 - 창의문 구간
과거와 현대의 공존,인왕자락에서 숨 쉬다.
● 서울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에서 시작해 소의문 터와 돈의문 터를 지나 우백호 인왕산338m을 넘어
창의문까지 이르는 구간이다. 숭례문, 소의문 터, 돈의문 터 구간은 장충동 구간과 더불어 서울 한양도성 성곽의 훼손이 가장 심한 곳이어서 온전하게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없다. 발걸음은 자연히 정동으로 우회하게
되는데 이곳은 대한제국 때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이 각축을 벌이던 곳이다. 김구 선생이 머물던
경교장, 홍난파 가옥, 딜쿠샤,권율 장군 집터의 은행나무 등을 지나면 내사산 중 인왕산 정상에 이른다.
정상에 오르면 서울 한양도성이 지나간 나머지 내사산의 산세와 함께 그 안에 담겨진 서울의 모습이 고스란히
한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을 넘어가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오고 그 아래 창의문이 있다.
코 스 | 숭례문 - 소의문 터 - 돈의문 터 - 인왕산 - 창의문
인왕산 구간은 2012년 5월까지 성곽복원 공사로 출입이 통제되므로
인왕스카이웨이 산책로인왕산로를 이용하여 창의문까지 가야 한다.
총 길이 | 5.3km
소요 시간 | 3시간 30분
난이도 | 숭례문 - 권율 장군 집터 : 하
권율 장군 집터 - 창의문 : 중
숭례문崇禮門
서울 한양도성의 정문으로 국보 제1호다. 남쪽에 위치해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조선시대 태조 5년1396에 창건한 뒤 태조 7년1398에 개건했고 세종 30년1448에 완전히 개축했다. 이 문은 돌로 쌓은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 옆면 2칸의 2층 누각을 얹은 형태다. 지붕은 앞,뒤에서 보면 사다리꼴 모양이고 양 측면에서 보면 삼각형 형태를 가진 우진각지붕이다. 지붕과 처마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장치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으면 주심포, 기둥 위는 물론이고 기둥 사이에도 있으면 다포양식이라고 하는데 숭례문은 다포양식이다. 2008년 2월 방화로 소실되기 전까지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불에 탄 숭례문은 2010년 2월 복원 착공식을 했는데 2012년 12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복원공사로 문루 외에 성문 좌우의 성벽 일부가 복원된다.
숭례문의 복원 —
숭례문 복원 공사는 기존의 자재를 최대한 활용하고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성문 좌우측의 성벽과 지면을
원래대로 복원한다. 또한 우리의 전통방식으로 돌을 다듬어서 사용하는 등의 복원 원칙을 갖고 진행한다.
숭례문 현판 —
현판의 글씨를 세로로 쓴 이유는 경복궁이 마주하는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적지>
구간 하나 유적지: 숭례문 - 창의문 구간
대한상공회의소 부근의 성벽숭례문과 소의문 터 사이에 있는 일부 복원된 성벽이다. 일제강점기 때 서울
한양도성은 숭례문 부근부터 훼손되기 시작했는데 이 구간이 그곳이다.
여장은 물론이고 체성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일부 수습한 옛 성돌 위에새로 몇 단을 쌓아 올려 간이 복원을 했다.
소의문昭義門
서울 한양도성의 사소문 중 하나로 도성의 서남쪽인 돈의문과 숭례문 사이에있어서 서소문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태조 때 처음 지어질 때는 소덕문이라고했는데 나중에 소의문으로 바꿨다. 조선시대에 도성에서 시신을
내가려면 광희문이나 소의문을 통해야 했기에 서쪽으로 나가는 시신은 모두 이 문을 통과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완전 철거됐다.
소의문 터—
소의문 터 표석은 중앙일보사 옆 주차타워
담장 위에 올려져 있어 쉽게 찾을 수없으므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돈의문敦義門
돈의문은 서울 한양도성의 서쪽 큰 문으로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의 다른 문들과 함께 준공됐는데 서대문·새문·신문이라고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인1915년에 일제가 도시계획에 따라 전차궤도를 복선화한다는 명목으로 철거
해 지금은 돈의문의 위치를 ‘정동사거리’로 추정할 뿐이다
돈의문 터—
옛 돈의문 자리임을 표시하기 위해 설치한 공공미술 작품 ‘보이지 않는 문’.서울시가 <도시갤러리 프로젝트>(2007)의 일환으로 사라진 돈의문의 옛 기억을 환기시키는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중명전
벽돌을 사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궁궐 건물로 1901년에 지어졌다.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경교장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하기
전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건물이다.
홍난파 가옥
홍난파 가옥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을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인수해 살았던 곳이다. 1930년대 서양식 주택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딜쿠샤와 권율 장군 집터
수령 45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은행나무 아래 이를 알리는 작은 표석이 있다. 그리고 왼쪽의 붉은 벽돌집은 3·1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던 미국인 특파원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라는 집인데 ‘Dilkusha딜쿠샤’란 힌두어로 ‘기쁨과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사직근린공원 구간 성벽
이 구간에서는 성벽 안쪽 길이나 바깥쪽 오솔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성벽 안쪽 길은 도심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넓은 길을 편하게 걸을 수 있고,바깥쪽 오솔길은 담쟁이 덩굴과
고풍스런 성벽이 어울린 모습이 그림처럼 고운곳이다. 밤에 이곳에 온다면 불 밝힌 성벽과 남산의 야경을 즐길 수 있다.
선禪바위
서울 한양도성 바깥쪽에 있는 한 쌍의바위인데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은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선바위라는 이름을 얻었다. 특이한 형상으로 신성화되기도 했다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
인왕산에 오르면 힘은 들지만 그만큼 보상도 크다. 인왕산 정상 부근은 서울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내사산 중 나머지 세 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이들을 연결하면 서울 한양도성의 윤곽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경복궁과 광화문의 모습도 확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일제강점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누상동에서 하숙했다. 그때 대표 작품인 <서시>와 <별 헤는 밤>이 탄생했는데, 가끔씩 이곳에 올라와 시상을 가다듬었다고 전해진다
-1구간 끝-
한양도성길 안내 정보책자에서 펴옴
첫댓글 언젠가는 가봐야지 하면서 선듯 나서지 못한길인데, 역사저널에 성곽공사에 관한 내용을 보게되면서 실행
에 옮길 당시에도 신분증제시 없이 통행이가능했지만 자유복 차림의 병사들이 북악산 주변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을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