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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예레 11,18-20
복 음 : 요한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코코 샤넬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쪽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도
샤넬 복장이 현대 여성복의 시초였다는 것,
그리고 샤넬 복장을 착용한 여성이 스타일과 분위기 등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뿌려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샤넬의 패션과 향수는 전 세계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창시자 코코 샤넬은 고령에도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력은 떨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힘들어했습니다.
1971년 1월의 어느 주일,
그녀는 리치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곱게 차려입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녀 곁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런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 당신이 날 죽이고 있어요.”
“당신은 날 죽이려 하시는군요!”
그리고 87세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살포시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
코코 샤넬의 말대로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는 늙어서는 안 되고,
자기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과정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연한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느끼는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바리사이들이 니코데모에게 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이며,
그 집안은 다윗 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 말씀대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그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그분 뜻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워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6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르면서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실, 지적 정보의 한 파편,
아니 한 파편의 한 부분도 제대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그저 1미크론(1/1000 mm), 아니 1나노(10억분의 1)만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리는 이 어리석음의 ‘선입견’이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자칫 ‘안다’고 믿어버린 ‘선입견’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 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리가 있겠는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초막절을 지내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과 행적을 본 군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이 기다리던,
모세가 약속한 예언자(참조 신명 18,15)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겠느냐며 논쟁을 한다.
그분이 자라나신 나자렛에 가려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동정녀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대부분 사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점으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전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예수님을 잡아서 끌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46절) 하였을 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49절)이라고 욕한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모르던 사람들이 율법을 내리신 분을 믿었고,
율법을 가르치던 사람들은 그분을 업신여겼다.
결과적으로 율법학자인 바리사이들은 눈먼 자들이 되었고,
율법을 모르면서도 율법을 만드신 분을 믿은 이들은 보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가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51절) 하였을 때,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52절)하고
니고데모에게 핀잔을 주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52-53절 참조).
이것이 비극이다. 믿음의 체험이 하나의 무미건조한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분은 우리가 올바로 알고 누려야 하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다.
우리는 또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권력이나 지식이나 교만으로 쌓은 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것을 다 헐어버릴 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이 사순절의 기간이 진정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지식은 지혜 안에서 활용되어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이고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하더라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보았고, 예언자로 메시아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이 보였습니다.
오늘도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식은 지혜 안에서 활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 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헛된 바람을 지니지 말고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 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뭘 좀 안다고 스승행세를 하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일 수 있길 희망합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침 산보 길에 ‘뉴스와 강의’를 듣는 것이 저의 일상입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늘 하던 대로 뉴스를 들으려고 하는데 핸드폰이 먹통이 되었습니다.
핸드폰을 껐다 켜면 되곤 했기에 그렇게 했는데도 여전히 먹통이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핸드폰에 있는 음악을 들으면서 산보를 마무리 했습니다.
다행히 사제관에 설치된 ‘와이파이’ 덕분에 문자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 핸드폰에 문제가 있어서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핸드폰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통신사 대리점엘 갔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대리점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핸드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신사의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정부는 그것이 사이버테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핸드폰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통신사에 있었는데 애꿎은 핸드폰만 탓했습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새벽에 자고 있는데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문자를 하거나, 전화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한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일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자신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열심히 살았는데 고난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잘못 판단하셔서 악인들에게 힘을 주고,
악인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닌지 살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탄원합니다.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한국에서라면 소비자들의 민원도 빗발치겠지만,
통신사도 오전 중에 문제를 해결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은 나라가 커서 그런지 소비자들의 민원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통신사도 아예 대리점 문을 닫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느님께서도 워낙 바쁘시기에
자신의 고난과 아픔을 미처 모르는 것은 아닌지 하느님께 민원을 넣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사람’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권력으로, 재물로, 업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행복은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경비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니코데모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요, 메시아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예언자요, 메시아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만이 율법과 계명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듣지도 보지 못했던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박해하려 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잘못이 있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리의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일의 종류나 일의 가치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는 장소와 일을 하는 때도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입니다.
아무리 누추한 곳이라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그곳은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좋아 보여도 그곳에 탐욕과 분노가 있다면
그곳은 악취가 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어두운 땅속에서 파란 새싹이 나올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더욱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혹시라도 진지한 성찰과 회심이 생략된 신앙,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값싼 신앙이 아닌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인류 역사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숱한 사이비 교주들이나 거짓 목자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아직도 그 사악한 무리들은 약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피해자 부모님들을 가끔 만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세상 사랑스러운 딸이
거기 들어간 지 삼 년, 오 년, 십 년입니다.
어떻게서든 빼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백약이 무효입니다.
사이비 교주로부터 자녀를 한번 구해보겠다고 별의별 방법을 다 강구해 보지만,
보편적인 우리 머리 꼭대기에 있는 그들을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자녀를 따라 전국을 헤매다 보니 가정은 폐가망신이요, 풍비박산입니다.
사이비 교주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사악한 계약 앞에
선량한 백성들을 속수무책으로 넘어집니다.
간당간당한 재산을 다 털어 갖다 바칩니다.
혈연까지 결연히 끊어가며 사악한 무리속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생의 중차대한 결정 앞에 정확한 판단력이며 식별력입니다.
사실 종교라는 것,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네 인생에 종교는 큰 부분이요, 더 나아가서 삶의 전부입니다.
어떤 종교를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랄까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과 이성이 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진지한 성찰과 회심이 생략된 신앙,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값싼 신앙,
고통과 십자가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현세적 성공과 축복만을 청하는 싸구려 신앙,
우리가 목숨 걸고 반대해야 할 웃기는 신앙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바로 보는 관점에 있어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바라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바라봤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 거짓 예언자들이나 사이비 교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완전 다른 존재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식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 신앙을 성찰해 봅니다.
자신의 동굴 안에 깊숙이 갇힌 나머지, 세상의 고통이나 슬픔, 눈물이나 아픔에는
단1의 측은지심도 없는 것은 아닌지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열매는 하나도 없이
그저 말로만, 결심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묵상해 봅니다.
결정은 하되, 단정하지 않는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가 설왕설래하는 얘기입니다.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메시아 또는 예언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은
왜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질책하자
예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니코데모가 본인의 말을 듣고 한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라는 율법을 들어
신중론을 펴자, 무지막지한 말로 그 말을 막아버립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을 보면서 저는 ‘결정과 단정’을 오늘 강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결정(決定)과 단정(斷定)
지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단정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단정이란 끊을 단(斷), 정할 정(定)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죄다 끊어버리고 혼자서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많이 노력하는 시노달리따스와 정반대지요.
시노달리따스는 함께 여정을 간다는 뜻의 Synod에서 나온 말로
함께 결정하는 방식과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결정할 때 제일 쉬운 방식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그저 따르는 방식입니다.
제일 쉬운 방식이지만 이것은 제일 나쁜 방식이지요.
민주주의적으로도 나쁜 방식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나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겐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쉬운 방식이 다수결 의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독단적인 결정 방식보다 한결 민주적이긴 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니고 제일 완전한 방식도 아닙니다.
제일 좋고 완전한 방식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밑에서부터 공동으로 합의를 이루어 낼 때까지 서로 설득하고
계속 논의하는 방식이니 제일 완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근자에 시노달리따스를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부터 십수 차례 공의회까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 집단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우리 역사에서 이러하지 못한 적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 단체들 가운데서 이러하지 못한 곳도 많지요.
이런 면에서 제가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저희 프란치스칸 공동체들 가운데도 이런 곳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따스 정신을 제일 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인데 말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Fraternitas 곧 형제적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 책임자가 있지만 그는 장상이 아니라 봉사자요 수호자이고,
모든 형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모든 형제와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단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결정은 하되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에게서 배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믿음에 절대적인 장애물은 고정관념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얻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그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고정관념은 사건의 眞僞나 情況을 떠나 판에 박힌 생각이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태도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예수가 갈릴래아 태생인 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30년간의 성장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사실은 베들레햄 태생이 아닌가?(마태 2,1; 루카 2,4)
지금의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한 유년시절을 포함한
전반적인 기록인 신양성서를 앞에 두고 있기에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가 당시의 사람들보다는 월씬 쉽다.
예수님의 출생과 유년시절에 관한 기록들은 빨라도 기원후 80~90년경에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구약성서가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미가 5,1에 근거하며,
베들레헴이 다윗의 마을이라는 사실은 1사무 20,6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베들레헴 태생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
어제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큰 소리로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요한 7,28) 하셨는데,
이 말씀은 자신이 베들레헴 태생이라는 것보다는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더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어쨌든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예수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물론 이런 아쉬움이 예수님께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애당초 출신이나 신분 따위엔 관심도 없으시다.
예수께 있어서 중요한 것은 태생이나 출신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말씀과 행적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중에 가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10,37-38)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무조건 거부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성전 경비대들과 예수와 舊面인 니고데모를 통하여 드러난다.
예수를 잡아오라는 命을 받은 경비대들이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36절) 하고
저들을 보낸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생각과 입장은 바뀔 줄 모른다.
그들은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갈릴래아에서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자신들을 더욱 세게 얽어맨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작정한 길을 갈 것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자신의 길을 가실 것이다.
기원전 609년경 유다에 출현한 예레미아 예언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쓴맛을 보았다.
유다백성들이 예레미아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느 대사제들과 다른 예언자들, 심지어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예언자 예레미아가 자신의 소명 시간들에 받았던 수많은 고통들이
이제 막 들이닥치는 예수님의 수난 역사의 전주곡이었던가?
고통의 마지막이 이른 예레미아의 처절한 호소를 들어보자.
“만군의 주님,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보시는 공정한 재판관이시여!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이 백성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것을 이 눈으로 보아야겠습니다.”(예레 11.20/제1독서)
그후 20년이 지난 기원전 587년에 유다왕국은 실제로 망했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논란을 점진적 구조로 펼쳐 나갑니다.
전반부에서는 군중 사이, 후반부에서는 권력가들 사이의 논쟁이 나옵니다.
사회의 하층부부터 상층부까지
예수님에 대한 논란이 점차 고조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력층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위험한 인물로 여깁니다.
결국 ‘위험인물’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까지 보내지만,
그분을 체포하지는 못합니다.
경비병들조차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감탄하며 연행을 주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도층은 ‘율법’을 근거로 그들을 비난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신망받는 율법 학자였던 니코데모가
“우리 율법에는”이라는 전제를 달며, 율법에 근거하여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심판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이에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수선한 불안과 부당한 적대감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논쟁과 격분과 폭력에 침묵하실 뿐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리는 자세로 계십니다.
사람들은 논쟁하고 술렁이며 요동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한 침묵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존엄, 전전긍긍하지 않는 태도로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그 거리만큼
구원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요즘입니다.
김 바니아 수녀
오늘의 복음을 읽으며
나는 마태오 복음 11장 25절의 말씀이 생각났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
성경을 연구하며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이 슬기롭다는 자들,
지혜롭다는 자들은 눈앞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다.
도리어 율법도, 성경도 모르고 교육을 받지 못한
죄인들과 군중들은 눈앞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선 그분을 알아본다.
왜일까?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생명과 사랑을 중시하는 율법에서 벗어나
사람을 의롭게 보이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율법에
눈과 귀가, 마음이 막혀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같은 율법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알아보고선 그분을 찾아가 자신이 품던 질문의 답을 구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성경을 앞세우며
예수님을 그저 율법을 거부하고 군중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자로 여겨버린다.
우리도 살면서 많은 것들로 인해 내 마음과 생각이 가려져 버린다.
당장의 내 삶의 문제, 걱정거리,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
때로는 교회에서 겪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인해
눈앞에 있는 나의 이웃,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무엇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놓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내 눈을 가리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지
깊이 되돌아보아야겠다.
[출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대구수녀원 -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