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떡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자주 먹다 보니 떡보가 되었습니다. 제가 먹어 본 떡도 인절미, 시루떡, 감자떡, 백설기, 송편, 바람떡, 개떡, 절편, 가래떡 등 여러 종류입니다. 그중에서도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했을 때, 임 씨 성을 가진 백성이 진상한 떡이라 붙여졌다는 인절미는, 인조 임금에게 특별했을 만큼이나 제게도 그러합니다. 인절미는 젊은 시절에 객지 생활하다가 시골집을 방문할 때면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셨던 떡입니다. 모친은 그다음 날 떠날 자식을 위해, 급히 찹쌀을 불리고 쪄서 작은 함지박에 담아서는, 좁은 부엌 바닥에서 공이로 쿡쿡 찧은 후에, 해콩을 볶아 만든 콩가루에 굴려 인절미를 만드셨습니다. 미처 부서지지 못한 쌀알 부스러기가 입 안에서 왜글거리곤 했지만, 그 후에도 어머니의 정성을 보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인절미만 보면, 오랜만에 집에 온 자식에게 맛난 것을 해 먹이시려던 그분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니,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 나는 생명의 떡입니다(요 6:35, 48).
주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체험하는지가 그 사람의 영적인 성숙의 정도를 보여줍니다. 즉 그분을 어린양이신 구속주로 아는 것이 신앙의 기초라면, 그 주님께서 부활 후에 생명 주는 영이 되신 것을 알고 영접하는 것은 거듭남, 곧 유기적인 구원의 시작입니다(롬 5:10 하). 그런데 위 본문은 주님이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듭난 후에 신앙 생활 할 수 있는 힘은 이 생명의 떡을 먹는 데서 나옴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의 국어적인 표현은 평이하지만 그 영적인 의미와 적용은 생각보다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아침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안에서 다음과 같은 추가적인 묵상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떡은 먹거리임: 인절미가 먹거리라고 말하면,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신 예수님 자신이 먹거리라고 하면 뭔가 어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도 이것을 아셨는지 뒤에서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라고 덧붙이셨습니다(요 6:57). 참고로 <신약성경 회복역>은 여기에 대해 “주 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거듭난 새사람 안에서 생명의 방식으로 흡수되실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각주를 달았습니다.
‘주님을 먹는 것’은 ‘그분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위 해석은 큰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요 1:12). 하지만 한국 교계의 주류인 장로 교단 내에서는 이처럼 주님 자신(제3 격 성령이 아닌)이 우리 안에 영접된다는 사상은 여전히 경계되고 심지어 배척되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을 분리해서 보려는 데서 오는 후유증일 수 있습니다. 한편 성경은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계신 것’(Christ in you)과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박해한 것은 그분 자신을 박해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골 1:27, 행 9:4-5). 이런 상황에서 저명한 칼빈 신학자들인 루이스 B. 스미디즈나 리처드 개핀 등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 안에서 내주하고 계심을 굳게 믿고 가르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먹은 생명의 떡을 소화해야 함: 좋은 음식을 먹었어도 소화를 잘 시켜야 몸 건강에 도움이 됩니다. 영적인 먹거리인 주님 혹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먹은 말씀이 소화가 안 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이 있고, 반대로 잘 소화가 된 경우에는 주님의 몸의 건축에 큰 도움을 줍니다. 이 방면에 대해 주님 앞에 나아가 묵상 할 때 다음 내용들이 떠올랐습니다.
먹은 말씀이 소화불량인 사례는 아는 말씀을 자기 자랑 혹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수단으로 써먹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혹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가 길가, 바위, 가시덤불에 뿌려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마 13:19-22).먹은 말씀을 소화시킨 경우로는 한 구절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엡 5:26). 즉 우리가 먹은 말씀이 씻는 물이 되어 우리의 옛 존재를 씻어 내고, 거룩, 곧 그분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우리 존재 안에 더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한 워치만 니가 <이기는 생명>에서 소개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생각났습니다. 바로란 자매에게는 그녀를 항상 괴롭히는 한 동역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게 되었답니다(벧전 1:22). 그녀는 동역자를 미워하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은 데, 사랑하고 그것도 “뜨겁게” 사랑해야 하는 상황을 놓고, 처음엔 세 시간 그 후에는 밤을 새워가며 그녀를 위해 중보 기도를 했답니다. 그 결과 주의 사랑이 그녀에게 충만하여, 자신을 사사건건 괴롭히던 그 동역자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173-174쪽).
저는 이런 묵상을 통해 성경을 머리로 이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말씀을 제 삶에 적용하여 이뤄지게 하는 데는 소홀했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 주님, 제가 과거에 어머니가 해 주신 인절미를 맛있게 먹었던 것처럼, 당신도 생명의 떡으로 먹고 소화시킬 수 있도록 큰 긍휼을 입게 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과정을 거치셔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떡으로 오신 것에 감사합니다.
‘이 떡을 먹고 소화하여,
날마다 우리 안에서 생명이 자라게 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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