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보시는 글은 스마트폰 📸 와이드(WIDE) 화면으로 볼 수 있게 조정하였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빌립보서 2장 5-12절 / 최태선 목사 “➤“5. 너희 안에 이 생각을 품을지니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이라. 6.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7.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들의 모습이 되셨으며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10.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11.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 같이 내가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빌 2:5-12 KJV)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 프로 사이클링 계에서 가장 빛나는 영웅입니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치명적인 암에 결렸습니다. 제3기 고환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결국 그것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가장 혹독한 도로 사이클 대회인 “프랑스 일주 국제 사이클 대회”에서 2002년도에 우승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네 번째 우승이었습니다. 놀라운 인간승리가 새롭게 기록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취에 더해 그의 가정에서는 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암스트롱은 그야말로 비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고생을 참아냈고, 역경을 이겨냈으며, 자기를 훈련하고,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모든 일을 성취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간절히 원하되, 기도하지는 않았다. 나는 자라면서 종교에 대한 어떤 불신감을 키워 왔지만,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될 만한 그리고 모종의 뜨거운 믿음을 가질 만한 여지가 있다고 느꼈다. 단순하게 말하면, 나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그건 바로 공정함, 정직함, 열심 있음, 고결함이라는 성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우리 가족을 선하게 대하고 친구들에게 진실하다면, 내가 속한 공동체의 어떤 대의에 기여한다면, 거짓말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도둑질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믿었다. 내 인생이 끝나는 날 저 세상에서 나를 심판하는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존재 앞에 섰을 때 내가 진실한 삶을 살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심판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경전을 믿었는지, 세례를 받았는지의 여부가 아니고 말이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정말 신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분이 “그렇지만 넌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니 천국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뭐라구요? 예!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십시오.” 영적이길 원하고 믿음을 가지길 원하지만 그리스도인이기를 거부하는 사람. 랜스 암스트롱의 모습입니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그가 이루어낸 놀라운 인간승리의 기적을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또한 그의 모습은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심지어는 장로들까지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런 종류의 자신의 믿음들을 거리낌 없이 토로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며, 자신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조지 바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미국에서 볼 수 있는 다섯 가지 종교적 구획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2000년도에 발간된 그의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이슬람의 성장으로 인한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외에 다른 신앙을 가진 인구는 전체의 7%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의 8%만이 자신을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로 규정합니다. 미국인들 중 무려 85%나 되는 이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은 다시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나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들 중 44%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의 핵심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릴 때는 종종 교회에 갔지만,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보거나, 기독교 신앙에의 헌신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33%는 자신이 예수님을 통해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 다수가 교회에 출석은 하더라도 도덕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성경이나 종교 서적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자료들로부터 조언을 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중에 성경을 읽고 기도도 하지만, 이런 활동들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특별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규정하는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85%인데, 이들 중 불과 8%만이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규정합니다. 즉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 영생으로 인도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8%의 소수들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기를 원할까요? 저는 별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근거로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부시 대통령들 들고 싶습니다. 부시와 부시의 추종세력들은 소위 말하는 남부 근본주의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조지 부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하실 수 있으십니까? 8%의 복음주의자들, 그렇다면 이들 중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과연 얼마의 사람들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일까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원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미국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상황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제 아내가 산엘 갔다가 봉변을 당했습니다. 매일 산을 오르면서 인사를 하다 보니 안면이 있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또 어쩌다 보니 제가 목사라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어제 저는 설교 준비 때문에 산을 가지 못했습니다. 제 아내가 산에 올라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한 분이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제가 목사이고 제 아내가 사모라는 말을 하였답니다. 그러자 그것을 들은 한 영감탱이가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교회를 욕하고 목사를 욕하고 장로를 욕하면서 결론적으로 어디 가서 절대로 목사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십년동안 안수 집사를 해 먹었다고 말하면서 한참 동안을 욕을 해대는 바람에 제 아내가 목사 사모라고 말을 꺼냈던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을 제 아내를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교회 상황은 더욱 비참합니다. 저는 목사가 된 후에는 믿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오히려 두렵기까지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를 대접하기는커녕, 제 아내가 들은 것처럼, 잘난 척하고, 얻어먹기 좋아하고, 재수 없는 사람 취급당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의 목사를 만나면 마치 적장을 만난 것같이 경계심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목사인 저까지도 믿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운 우리 사회, 과연 그렇다면 그중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성도 저는 어제 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감사합시다.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이 정말 감사하지 않소? 그리고 우리를 이렇게 낮추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하나님께서 낮추셨으니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이요.” 제 말이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는지 아내는 “이제 앞으로는 저~ㄹ대로 목사라는 말을 하면 안 되어요.” 하며 끝을 맺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을 이용한 사단의 공격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된 과정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그런 모습들을 잘 알고, 보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그들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입으로 말하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로부터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나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그리스도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 지난 주 저는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 아빠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오늘은 그 본문 말씀의 내용 중에 한 가지인 ‘복종’에 대해 집중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 그동안 저는 복종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에서 들은 설교 가운데 복종에 관한 설교가 가장 싫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1절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제가 자라온 시대의 정신을 저 또한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데모가 가장 심한 시대 중에 하나였습니다. 모든 학교가 휴교를 한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 후에도 군사 정권이 계속되면서 저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저항의 정신이 깃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는 한 권위에 저항하는 타입이 되었습니다. 그런 정신이 오히려 나를 더 멋있는 사람, 깨어있는 지성인의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나 관공서뿐만 아니라, 부모나 교사 그리고 목사의 권위까지 나에게 반사 작용을 일으키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생각하면서도 저의 무의식 속에서는 ‘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위험한 생각인가!’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불복종이 꼭 필요한 덕목으로 항상 제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던가 ‘보헤미안’과 같은 단어들을 멋있게 여겨왔습니다.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불복종,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거부, 굴욕이 아니라 자기주장의 용기를 제 인생의 덕목으로 생각해온 것입니다. ‘외부의 간섭은 개개인의 인격에 대한 침해가 아닌가?’ 자기의 자율성에 대한 고집은 제게 자기 방어의 한 형태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경향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복종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이 개념을 자꾸 권력이나 압제와 연결시킨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복종의 신비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축구 경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축구 선수가 감독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고 팀 전체를 최 상위 팀으로 올려놓는 데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종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시대의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한 마음을 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죽기까지’라는 말은 단지 죽는 일 한 가지만을 복종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어려운 일까지 복종했다는 말은 죽음보다 쉬운 모든 일에 복종하셨다는 말입니다. 복종은 기독교의 또 하나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역시 복종이라는 버팀목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트는 말합니다. ‘네가 불순종의 태만함을 통해 떠났던 분에게 복종의 수고를 통해 다시 돌아온다.’ 불순종은 태만입니다. 불순종은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불순종으로 그분에게서 멀어진 우리들이 그분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은 복종의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소유의 포기도 어렵습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바로 복종하는 삶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종할 힘도 주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힘든 것은 바로 복종입니다. 자기가 왕이 된 사람들 중세의 신비 사상가들은 인간이 겪게 되는 모든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고집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 지적은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덴동산에서의 반역은 모든 인간들을 잠재적인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모두가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말을 듣기가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말하지 않고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왕이라는 그 자리를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일은 복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 규칙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에 귀를 기울이며 어진 아버지의 훈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우라.’ 이 말은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복종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경청하라’ ‘받아들여라’ 그리고 ‘채우라’입니다. 채우라는 말은 ‘이루어라’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종은 경청하고 받아들이고 채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생각하면 이 복종의 세 단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는 막내인 기쁨이 때문에 기쁩니다. 기쁨이가 말을 잘 듣기 때문입니다. 제 딸이 저에게 복종하는 것이지요. 녀석이 이제 ‘고딩’이 되었다고 가끔 제 궁뎅이를 두드리기까지 합니다. 아빠가 고맙고 믿음직스럽다는 의미이겠지요. 어쨌든 이제 장성한 기쁨이가 제가 하는 말을 잘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여 힘들지만 실천하려고 꽤 노력을 합니다. 결과에 관계없이 부모로서 복종하려는 딸이 여간 대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따라 복종의 길을 걸으려면 제일 먼저 우리는 경청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기쁨이에게 말을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끔가다 보면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습니다. 잘 보면 기쁨이가 귀에 뭔가를 꽂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기쁨이가 듣지 못합니다. 때론 그걸 모르고 왜 대답을 안 하느냐고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우리 시대는 온갖 소음으로 가득 찬 시대입니다. 특별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티브이를 통해 소리가 들립니다. 신문을 통해, 잡지를 통해, 광고판을 통해 소리 없는 소리가 던져집니다.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이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우리의 귀에는 온갖 소리들이 넘쳐나도록 들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주장들에 노출되어 있고 자신도 모르게 학습이 되어 지고, 조건반사에 응하도록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음성을 듣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세포의 마지막 하나까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고 또 저항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14절은 그런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3.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14.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어 있습니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할 때 보여 주신 자신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5. 심지어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느니라.)”(엡 2:4-5) 그래서 영적 감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상의 미술관에 있는 시각장애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고의적인 굳어짐인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다른 이방인들이 그들의 헛된 생각 속에서 걷는 것 같이 걷지 말라. 18.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졌으며 그들 속에 있는 무지함과 그들 마음의 눈먼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도다.”(엡 4:17-1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시니라.”(마19:2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을 떠나 한적한 곳이나 산으로 가셔서 아버지를 만나셨습니다. 모든 것을 떠나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멈추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그쳐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침묵의 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멈추는 시간, 침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때론 그냥 조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멈춤의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침묵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무의식을 통해서라도 말씀해 주십니다. 저는 최근 그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제가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침묵하고 그분을 바라보다 잠이 드는 경우, 그분이 저에게 많은 것을 말씀해주셨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분 앞에 멈추는 시간을 드리십시오, 침묵하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스스로 고통스러운 감정에 시달릴 뿐 아니라. 남에게 배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며, 어리석고 무지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잘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며 깊이 있는 관계도 맺기 어렵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경청은 필수 조건입니다. 들음이란 깨어 있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존경하는 자세로 그 사람에게 진지한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강하고 거센 폭풍이 아니라 고요하고 부드러운 바람의 속삭임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침묵 속에서 마음으로 경청하지 않으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기쁨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인 제가 말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입학 전 프로그램과 3일 간의 기숙사 체험을 통해 아빠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듣기만 했던 제 말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일마다 말씀을 듣지만 우리는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들은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으면 듣고 있어도 실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따라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제가 목사를 하지요.’ 목사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들은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묵상을 해야 합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보고, 들은 것을 초식동물이 먹은 것을 다시 되새김질 하는 것처럼 씹고 또 씹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갈아져서 그것이 부드러운 죽처럼 될 때까지 반복해서 씹고 또 씹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의 묵상에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분은 십자가 앞에서 공포를 느꼈습니다. 앞으로 당할 모든 일의 엄청난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며 고민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묵상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그 고통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느 순간 마침내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42 그분께서 다시 두 번째 나가사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마26:42)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의 육신은 세포의 마지막 하나까지 진리에 저항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묵상을 통해 진리를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마침내 자신을 쳐서 진리에 복종시킬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를 우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은 다만 어려운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묵상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각종 귀한 선물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이루는 것입니다. 듣고 마음에 받아들인 것을 실천하는 이 일 또한 만만치 않은 과정입니다. 엄청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용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백전노장은 힘이 있고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단 번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도 경험하고 실패도 경험하고 그 모든 것을 수도 없이 견디고 살아남은 자만이 백전노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리도 많은 시련이 다가오는 것은 바로 우리를 복종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인 것입니다. 요즘의 우리 교회를 돌아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람을 좀 더 보내주시고, 좀 더 많은 헌금이 있다면 우리는 무언가 많은 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훈련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엄청난 영적인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적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고 시험하실 것입니다. 이제 저는 점점 더 제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제 안의 넘치는 죄를 보고, 저를 둘러싸고 있는 오만한 교만의 덩어리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에너지를 받아들이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저의 용량을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겸손하게 주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해나가는 것입니다. 성 빠콤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모범적인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수련기간 동안 그는 빼어난 겸손과 복종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빠콤을 찾아와 부탁했습니다. 대단한 열심에 들떠있는 그는 순교하기를 지극히 원한다고 말하며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빠콤은 그를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 수도사는 순교하게 해달라고 더 열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빠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이여! 우리의 상상력을 괴롭히는 것보다는 복종하면서 살고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복종시킴으로써 날마다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 고행을 잘하는 사람은 충분히 순교자로 죽는 것입니다. 칼에 맞아 단번에 죽는 것보다는 일생을 꾸준히 복종하는 것이 더 훌륭한 순교입니다. 평온하게 살면서 그대의 정신을 가라앉히고 그 소원을 물리치시오.” 그러자 수도사는 자기의 소원이 성령에게서 나온다고 단언하면서 그의 열의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고 여전히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그 수도사에게 위로가 되기에 알맞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라센인 도둑들이 수도원 근처 산에 왔던 것입니다. 빠콤이 그 수도사를 불렀습니다. “자 그대가 그토록 바라던 때가 왔소. 마침 잘 되었으니 산에 나무를 하러 가시오.” 수도사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성시를 읊조리고, 영광스럽게도 그분에 대한 사랑을 위해 죽을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산으로 갔습니다. 도둑들은 그를 보고 곧장 그에게로 와서 붙잡고 위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사는 얼마 동안은 용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청하지 않소.” 당당하게 나갔습니다. 사라센 사람들은 수도사를 그들의 우상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경배하라고 하였습니다. 수도사가 끈질기게 거절하는 것을 보고 그들은 그를 죽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감했던 그 수도사는 막상 자신의 목을 향해 다가오는 날카로운 칼을 보고는 겁을 내면서 몸을 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애원하였습니다. “제발 죽이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나는 젊으니 여기서 죽는다면 아까운 일일 것입니다.” 결국 수도사는 우상을 경배했습니다. 사라센인들은 그를 조롱하며 마구 때리고는 수도원으로 돌아가게 놔주었습니다. 초주검이 되어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 수도원에 이르자, 그 소식을 알고 마중 나왔던 빠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어떠시오? 그렇게 핼쓱한 게 어찌 된 일이오?” 가엾은 수도사는 자존심이 있었기 때문에 부끄럽고 창피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큰 죄를 지은 곳을 견딜 수 없어 땅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빠콤은 다른 수도사들에게 그를 위해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주게 하고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내 아들이여! 공동체에서 하는 대로 살아가겠다는 작은 소원들을 가지고, 규칙을 충실하게 지키기만 하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은 계획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것이 가상의 비범한 일을 하겠다는 큰 소망을 가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상의 비범한 일은 우리 마음을 오만으로 잔뜩 부풀어 오르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얕보게 하고 자기가 그들보다 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게 마는 것뿐이라오. 거룩한 복종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이 그 품에서 빠져나와 더 완전한 것같이 보이는 것을 찾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습니까? 그대가 죽기만을 원하고 있을 때에 내가 말한 것처럼 살면서 극기를 잘하는 데 만족했더라면, 그대가 한 것과 같이 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그러나 용기를 내고 이제부터는 복종하는 가운데 살겠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대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확신하시오.” 수도사는 일생동안 매우 겸손하게 되어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분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종을 통해 자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법을 배웁니다. 성령공동체가 되기 위한 진실한 교제는 여기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종을 통해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됩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모든 정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복종을 통해 하늘나라의 기쁨을 배웁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향해 “주여 내 삶 전체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마침내 우리 삶을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주님을 지극히 높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하는 우리도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서두에서 살펴본 랜스 암스트롱이 거두었던 인간 승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승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더 감사한 일은 이것이 주님과의 놀라운 우정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기까지 복종하십시오. 복종은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맛보고 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