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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3. 새해신년을 이끌 말씀. 유낙준주교.
성령께서 허락한 곳에서 성령께 복종하며 사십니까?
1. 말씀으로 들어가기 :
사도 바우로가 바르나바와 마르코와 함께 터키 중남부의 제 1차 전도여행은 47-49년경에 이루어졌고(사도13-14), 제2차 전도여행은 실라와 디모테오와 함께 터키 중부를 지나 유럽의 마케도니아로 50-53년경에 이루어졌고(사도15:26-18:22), 제3차 전도여행은 홀로 에페소에 2년간 머물렀고 다양한 교회를 방문한가장 긴 여행으로 53년에 시작하였습니다(사도18:23-21:16). 바우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로마행으로 59년에 항해를 하여 60년에 로마에 도착합니다(사도21:17-28:16). 바우로가 순교당한 곳에 바울라 대성당이 로마에 세워졌습니다. 로마의 베드로대성당의 화려함보다도 바우로대성당의 순박하고 온후함에 젖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날 밤 바우로는 트로아스(터키 북서부 항구도시)에서 신비로운 영상을 보았다. 마케도니아사람(유럽인) 하나가 바우로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던 것이다(사도16:9). 바우로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사도16: 10).”
트로아스는 바우로의 2차전도여행과 3차 전도여행시에 들렀던 아시아의 서부에 위치한 10만여명이 그 당시에 살던 항구도시입니다. 더 이상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사도16:6). 예수의 성령이 아시아의 다른 도시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사도16:7). 그래서 트로아스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우로가 트로아스로 가게 된 것은 성령과 예수의 성령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과 예수의 성령이 허락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을 확신하십니까? 그렇게 하느님의 섭리로 살아가고자 이곳으로 하느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내가 온 것이지 무슨 하느님이 불러서 여기에 왔다고 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라면 신앙생활에 빨간 불이 켜졌다고 보면 대개 맞습니다. 지금 자신이 사는 것에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로 보입니다. 이런 태도가 없다면 하느님을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하느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령이 허락하는 삶일 때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허락한 곳인 트로아스에서 바우로는 비젼을 봅니다. 성령에 의하여 꿈을 꾸게 됩니다. 성령의 허락한 꿈을 꾸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성령이 꿈과 비젼을 주었는데 세상 일들로 인하여, 믿음을 잃어버려서 그 비젼과 꿈을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나의 트로아스가 어디입니까? 성령은 우리를 구체적인 장소로 이끌어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에 이끌려 온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의 성령이 나를 이끌어 인도해 준 곳이 제게는 성공회였고 교회였고 나눔의집이었습니다. 성령이 안내해 주었기 때문에 이곳이 거룩한 곳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었고 하느님의 본성인 거룩함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비젼과 꿈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바우로는 비젼에서 유럽사람인 마케도니아의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바우로가 본 비젼과 꿈에서 유럽사람을 본 것입니다. 바우로는 비젼에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나야 함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성공회에서 누구를 만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다고 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곳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허락해 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인 그 한 사람이 바우로에게 다가와서 서 있습니다. 그리고 바우로에게 간청을 합니다. “Come over to Macedonia and help us.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사도16:9).” 아시아에서 그만 머무르고 유럽으로 건너오라는 소식입니다. 익숙한 곳에 오래 머물려는 우리의 속성을 아신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로운 곳에서의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적인 잣대로 판단하여 이곳에 있었다면 이제는 예수의 성령에 복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복종이 아니고 예수의 성령에 복종하며 이곳 성공회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마케도니아인 유럽이 어디입니까? 바우로에게는 유럽이었고 나에게 유럽은 어디입니까? 지금 이곳입니다. 성령께 복종하여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우로는 복종하여 유럽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곧 유럽으로 떠나는 바우로입니다. 성령께 복종하는 우리라면 우리는 복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삶이 복있는 삶이니까요.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가 복있게 살게 하시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복을 세상 일을 변명으로 내세워 발로 차면 되겠습니까? ---
2. 복음의 힘은 하느님의 성령입니다.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며 너희를 지켜주시고(24), 야훼께서 웃으시며 너희를 귀엽게 보아주시고(25), 야훼께서 너희를 고이 보시어 평화를 주시기를 빈다(민수6:26). May the Lord bless you and take care of you; May the Lord be kind and gracious to you; May the Lord look on you with favour and give you peace(민수6:24-26)..” 우리에게 복주고 돌보고,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주시고, 호의적으로 보시고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이 영적인 리더인 비져너리가 지닐 것입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때도 싸웠고 2차 세계대전때도 싸웠기에 원수관계입니다. 그러나 지금 원수 관계가 아니고 친하게 지냅니다. 무엇이 이 두 나라를 친하게 지내게 했을까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1945년 해방되면서 남은 미군이 북은 러시아군이 지배하면서 남북분열이 되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2023년을 맞이하면서 아직도 원수관계입니다. 무엇이 남북관계를 원수관계로 이어가게 하는지요? 우리는 성공회 신앙으로 교회와 나눔의집에서 일하는 관계로 만나서 서로 일을 잘하는 사람(일잘러)으로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무엇이 서로를 일잘러보다 일하는 사람으로만 남게 하는지요? 큰 가치를 논하는 거대담론의 시대가 지나고 내면세계를 촘촘하게 그리는 시대가 왔기에 우리가 작은 존재로 갇혀 살게 된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 혁명가가 되는 시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질러대는데 익숙한 불편한 사람으로 살지는 않는지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특별한 기술을 지닌 사람인 Specialist 보다는 감각의 직관을 지닌 사람인 Generalist가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General은 장군이란 뜻도 있지만 총괄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총괄자는 전체를 보고 깊게 보고 길게 보고 사람으로 시간을 잘 조정하여 여유를 만드는 사람이고, 사람을 적절하게 대하여 유머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런 총괄자인 Generalist가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성공회 신앙인인 사제와 신도는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면서 총괄자로 눈앞의 당장의 일인 미시적인 시각과 길게 멀리 보는 일인 거시적인 시각을 갖춰서 일을 하기에 일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으로 시작된 1차 큰 전쟁과 대공황으로 시작된 2차 큰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전쟁이후에는 증오와 불신과 의심으로 황폐화되고 분열된 마음을 어떻게 추스르는지가 관건입니다. 프랑스인들이 어떻게 독일인들에 대한 모든 편견을 버리고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대성당에서의 기도회로 양국의 리더들이 참여하는 것이 그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을 향한 희망으로 학생들을 양국이 교환한 것입니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프랑스의 쉬망, 독일의 아네나워가 참여해 유럽의 그리스도 정치인들이 기도하면서 노력하여 유럽공동체를 형성하고 지금의 유럽연합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정직함과 겸손함으로 널리 존경을 받는 로베르 쉬망(1886.6.29. 룩셈부르크 생, 1955-61 유럽운동 대통령, 1963.9.4.씨싸젤로에서 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정치영역과 통합시켜 유럽연합의 아버지로서 큰 마음과 초국가적 비젼을 세운 것입니다. 프독국경지대에서 산 쉬망의 경험이 화해와 평화의 중재자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절대적인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무신론적인 합리주의, 국수주의적인 민족주의, 이주민의 배제하는 신 극우주의로 세속적이고 실용적이며 기술적인 왜곡의 시도로 유럽연합을 파괴하려는데 대응한 정신은 바로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심이었습니다. 쉬망은 사람의 공동체가 양성될 수 있는 Visionary로 용서와 회개, 화해라는 도덕적인 분위기를 기반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적 기본 가치에 "깊이 뿌리 내린 Deeply Rooted" 자유, 평등, 연대 및 평화 안에서 화해를 통해 사람의 공동체로 발전하는 거버넌스의 민주적 모델을 형성함으로써 유럽의 그리스도교적 기초로 우리 자신을 생각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로베르 쉬망).”
Visionary비져너리는 정신적인 진보가 물질적 진보와 함께 가도록 해야 한다고 쉬망은 주장하여, 미래세대가 영적인 뿌리에서 벗어나 물질유혹에 빠져 사회부패로 들어가는 것으로는 유럽연합의 운동은 실패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쉬망은 자신의 신앙을 주장하거나 개인화하는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역할을 매우 불완전한 자신으로 보는 겸손함을 유지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진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유럽의 원칙을 세운 이는 다름 아닌 독일의 루터로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인간은 불가침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자유,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법치의 보편적 가치를 발전시킨 유럽의 종교적, 인본주의적 유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로 발전시킨 것입니다. 아울러 나치하의 박해로부터의 저항운동을 전개하면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다는 자각이 서로에 대해 이해를 깊이하게 되어 서로 협력하게 된 것도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각자 블럭을 세우는 일치가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시기(1930-1941)에 인류를 이끌었던 것은 성숙한 복음주의가 인도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1차 전쟁의 깊지 않은 짧은 기억으로 더 고통을 받게 된 2차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이어 그 짧은 기억은 근시안을 지니게 하여 전쟁후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세계주의자를 강조한 장모네(1888-1979)와 함께 쉬망이 유럽연합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평화를 평등에 기초하여 세운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길게 참으며 이를 세운 것입니다. 국가를 넘어 초국가적인 길을 제시한 이 역사적인 돌파구는 하느님의 섭리에 내맡긴 덕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힘은 하느님의 성령입니다. 성령이 반드시 우리를 비젼너리로 세워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에 뿌리 내린 사람의 공동체로 세상을 다시 만들고 계심을 믿습니다.
타인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황금시대로의 귀환을 주장하는 보수주의, 모든 부의 공동체적인 소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 대중적 주권이라는 신에게 절하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과 연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과정에는 정확한 답이 없기에 비져너리는 겸손하여야 하고, 사회적 참여에서는 믿음이 중요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간형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다양성과 평등성과 포용성(DEI)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가족이라는 의무로 연대하고, 혼자가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기에, 매일의 불행에 맞서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하느님의 존엄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존엄을 지키며 사는 이가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회 신앙의 정수입니다.
3. 불확실한 상황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된다면?
일을 하는 사람은 많으나 일을 잘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자 원합니다. 일을 하려고 기술을 습득했습니다. 외국어를 익히고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일을 잘하려고 한다면 그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알고 빠른 판단과 주저하지 않는 실행력을 갖추고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기술력을 증진하는 이력을 쌓는 것만으로는 되질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큰 리더쉽을 지니기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분석을 잘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일을 분석한 후에 통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 이행해야 일을 잘 하는 것입니다. 사제로, 기관장으로 일을 잘 하려면 익숙한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시각을 지녀보려고 하는 시도가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습니다. 유부남인 러시아외교관과 사랑에 빠진 프랑스의 한 여성의 사적인 이야기를 기술한 자전적인 소설입니다. 타인이 그랬으면 무분별하다고 여겼을 신념과 행동을 자신은 스스럼 없이 행한 이야기를 경험한 한국여성이 자전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소설로 출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거대가치와 거대담론에 익숙한 한국의 지식인이 지루하게 여겨지는 시대에 이미 거대담론의 붕괴로 인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현재의 한국사회의 지식인으로 보여집니다. 집단서 개인으로, 구조에서 주체로 시선을 이동하여 협소한 전위의 길을 고집하지 않는 삶이 더 복된 삶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전통을 쌓아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사람들이 지루하게 여길 예배를 신선하게 하느님께 바치는 변화된 예배는 사제를 살게 하고 신도들을 살게 합니다. 물질적 빈곤이 영적인 빈곤으로 이어진다면 참으로 비참한 삶이 된다고 여겨 자발적인 가난운동으로 자신을 색칠한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물질적인 빈곤이 영적인 빈곤으로 이어지곤 하는 자신의 속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출신성분을 이야기 하는 공관복음(마태복음, 마르코복음, 루가복음)보다는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는 요한복음이 신도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말씀처럼 제게도 요한복음이 가슴에 잘 들어옵니다. 요한복음이 자신의 출신성분을 떼버리고 이야기 하기에 좋습니다. 비루한 현실이지만 독실한 신앙심에 의거하여 세련된 삶으로 자신을 세우신 할머니는 요한복음을 늘 타령조로 읽으셨습니다. 할머니의 열정적이고 감동적인 신앙생활이 제 신앙의 길의 모델이었습니다.
가난의 삶이 주는 고통을 책상에서 배운 지식으로 치장하고자 한 것이 심히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고통이 분노로 치닫지 않게 되었고 고통을 견디려고 하는 자신의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귀하고 귀한 존재를 잃은 이후에 그 부재로 서럽게 울게 되었고 부재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길이었고 그것이 애도의 길이었습니다. 커다란 공허를 보고, 그 공허로움을 걸으면서 감각적인 연민은 버려지고 그간의 쌓았던 자신까지도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공허 자체가 나 자신이 되어가면서 새로운 커다란 세상이 있다는 것을 껴안게 되었습니다. 오직 먼저 하늘로 간 아들 제레미를 기억하는 동안에만 공허의 세계에서 큰 존재의 세계를 직관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익숙한 것이 소멸되어가면서 불멸이 다가오는 것은 새로운 큰 세상에서였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는 공허의 큰 강이 흐릅니다. 공허의 큰 강을 넘으려면 용서라는 아프게 경험되는 길을 세차게 통과하여야만 합니다. 그 길에서 무진장 아프기에 때로는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되기도 하고 사랑에 온전히 빠지기도 하는 두려움 없이 살게 되기도 합니다. 수없는 과오와 실패가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이 자신의 공허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숙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신심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질문하게 되었고 심심을 찾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맡겨서 되는 일은 아니고 신에게 맡겨서 될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리에 있으면 그것이 신앙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길에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자신에게 충만하기를 빕니다.
4. 일을 잘 하려면 사랑에 빠지십시오.
자신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온 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삶이어야 일을 잘하게 됩니다. 그래야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그런 태도로 자주 성취하게 되면 재미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취감이 목적이 아니라 성취감이 주는 자기에 대한 긍정성이 중요하게 됩니다. 긍정성은 자신이 새로운 일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게 합니다. 자신이 살아지는 게 아니기에 살아내는 것으로 남탓할 시간조차 아깝게 느끼고 자신의 할 일에 매진할 시간으로 잡습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어 대하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래서 사건으로 보지 아니하고 해석으로 보아 해석하는 방법을 중시여깁니다. 가치의 존재는 해석여부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긍정의 언어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여 보는 대로가 아니라 믿는 대로 보고자 합니다. 믿는대로이기 때문에 믿음이 중요하고 그 믿음을 탄탄하게 만들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삶은 타인의 도움이 존재하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내야만 합니다. “늘 주님께 감사!”를 입에 달고 다니게 됩니다.
길게 보고 판단하여 단견과 미시적인 견해를 경계하고, 일과 인생을 같게 하여 일치의 집중력을 지닌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는 좋은 목적을 이루고자 하기에 나 다움이 생기게 되고 선한 힘이 배어있고 꿈을 지니게 합니다. 그리하여 해야 할 일 중에서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경험서 배운 것을 새로움을 펼치는데 연결하면 개방적인 삶이 됩니다. 그 개방성은 경쟁보다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성장에 우선을 둡니다.
약자에게 유대감을 갖는 것에 우선을 두고,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고자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지녀야 합니다. 이 성찰로부터 세상의 기준보다도 더 높은 하늘의 기준을 가지게 하여 기적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에게 성탄절이 주는 것은 기적의 힘입니다. 비져너리에게 필요한 것이 영적인 말씀입니다. 영적인 말씀으로 비져너리의 가슴에 채우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영적인 말씀이 사람의 빗장을 여는 것이지 권력과 무기가 사람의 빗장을 여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과 무기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증폭시키게 합니다.
자신의 실망스러운 일을 통과하면 자신을 알게 되어 기쁨을 갖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수정하면서 신앙을 깊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세상의 죄로 오염되어 흠이 생겼습니다.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사랑이 아닌 어둠이 있기에 악을 추종하려 하고 그동안 쌓아올린 성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고 파괴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인 거룩함이 인간에게 있기에 무너진 성을 복귀하려고 두려움을 버리고 용기를 선택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악에 추종해서 드러나는 파괴적인 에너지에 집착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느님의 속성인 거룩함을 찾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거룩함을 찾으려는 이에게는 거룩함을 발견하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가만히 보니 지금까지 너무 비관적으로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낙관적으로 살지 않으시겠습니까?
가혹하게 사랑하고, 변명으로 일을 하고, 외풍에 휩쓸리는 인간관계로 인해 너무 비관으로 흔들리는 삶을 살았다면 세상에 짓눌리며 산 것입니다. 관대하게 사랑하며, 성실하게 일을 하며, 정직하게 관계를 맺는 자신의 태도의 변화가 있을 때 우리의 보편적인 가치가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태도를 갖는가에 따라 우리의 삶이 천국이 되거나 지옥이 됩니다. 자! 어떤 태도를 가지시겠습니까?
죄책감을 지닐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면 태도를 바꿔 여유를 지닐 삶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난 추억은 해석으로 바꾸고 다가올 미래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바꿔진 태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자기고민을 말하지 않는 집안이라면 힘들게 살게 되기에 자기고민을 털어놓는 집안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에 빠져 본적이 없이 산다면 그것이 가장 추악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에 빠진다면 기존의 낡은 도덕적 원칙을 날려보내 새로운 세상을 세우게 되어 한 순간의 사랑으로 30년이 지났다는 말이 우리의 입에서 나오면 좋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우리가 마지막 죽기 전에 해묵은 감정을 떠올려 기분 나빠 죽는 것이기 보다는 좋은 순간을 떠올리어 기분 좋게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하기를 바란다면 지금을 복있게 사랑에 빠져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실천소제목:
1. 자신의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 자신의 가슴에 살아 계시다면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하십니까?
2. 우리 교회나 기관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정부의 지원을 받는 기관만 존재한다면 각자 정부에게 목을 맨채 살 것입니다. 하지만 한곳이라도 정부지원이 없이 우리 스스로의 마음의 일로 운영되는 곳이 있다면 이를테면 성토마스의집이 나눔의집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존재이유를 제공하는 성 토마스의 집이어야 나눔의집이 살게 되니까요. 교회는 정부지원 없이 운영될 때 가장 교회다워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세워지고 믿음으로 운영되니까요. 믿음의 공동체가 교회이니까요.
3. 어떻게 일을 해야 합니까?
정부지원으로 한 기관이 한 지역에 서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 기관의 존재이유를 제공하는 비정부조직인 믿음으로 운영되는 교회나 비정부조직기구가 서야 합니다. 그것이 작더라도 믿음으로 사는 길을 세상에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4. 성토마스의 집을 어떻게 운영해야 합니까?
성 토마스의 집에서 양성되는 청년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눔의집의 중심에는 성 토마스의 정신과 가치가 있다는 것으로 서로를 연결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년에 천만원으로 운영되는 나눔의집의 성 토마스의 집이 수십억원을 운영하는 다른 기관보다도 역동적이고 사랑에 빠져 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5. 주교가 떠난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교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저를 만드신 하느님이 무진장한 힘을 가지신 분이시니 하느님을 믿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각 기관에서 업무를 시작하기 직전과 마칠 때 주의기도문을 외우시는 기도로 마치면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관의 주제를 기도제목으로 하여 중보기도를 하면 좋을 것입니다. 저도 하느님께 나눔의집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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