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3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어떻게 성경을 봐야 하는가?
성경을 공부하다보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깨달을 때마다 환성을 지르고 싶도록 기쁨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매순간 생각하면서 성경을 아주 조심스럽게 읽노라면 하느님께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중을 알려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건방진 생각이라는 마음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중을 살피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또한 성경의 말씀을 새기지도 않으면서 그냥 앵무새처럼 말씀을 읽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떤 때는 성경의 작은 문장에 매달려 하루 종일 씨름할 때도 있습니다. 주해서를 찾기도 하고 백과사전도 열어보고,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문장에서 얻는 자구적(字句的)의미 보다는 자의적(字意的)의미를 더 많이 묵상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번역하신 신학자들의 주해서를 보거나 신학사전을 보면서 그 자의를 자세히 살피면서 그 문장을 아주 조심스럽게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작은 문장에서 느끼는 수많은 말씀의 뜻을 생각하노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흥분감도 느낍니다. 아주 짧은 글자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말씀은 신비하게도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도 희열을 가져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합니다.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고 성경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성경 공부를 하자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연구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지 벌써 오십 년도 넘었습니다. 그런데 내 성경공부의 수준은 어떤지 가끔 반성해봅니다. 이제 겨우 유치원 수준도 못 된다는 생각이 들어갑니다. 아직도 초등학생 수준도 되지 못함을 압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가지고 묵상하고 글도 쓰고, 공부했다고 하는 것은 교만한 나의 소치입니다. 겁도 없이 덤벼들은 버릇없는 소행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성경에 대해서 논할 수 없음에도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은총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아는 척 하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지 않고 내 의지로 성경을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지 않고 성경을 멋대로 해석해서 결론은 내 버려서는 안 된다는 아주 단순한 원리였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점점 더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 말씀을 내 뜻대로 조각하려는 교만함이며, 자유로 해석하려는 교만함이었습니다. 그 순간 악마는 교묘하게 내게 작용하고 나를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중병에 걸려 죽음의 갈림길에 섰을 때 악마는 아주 교묘하게 성경의 말씀을 인용해서 나를 현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통해서 성경의 미묘한 말씀으로 내게 교만을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의지해야 했을 때 내게 분노와 갈등을 심어주고 의심과 의혹을 만들어놓고 나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은총으로 조용히 나를 감싸 주셨습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순간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병으로 고통이 극도에 달했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내 맡기는 그 은총이 아주 평안하게 다가왔습니다.
지금도 매일 성경을 대하면 먼저 그 말씀의 큰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경의 큰 뜻을 먼저 마음에 담습니다. 그리고 묵상을 시작합니다. 묵상은 내가 드리는 가장 큰 기도입니다. 매일 이 기도시간이 내게 없다면 나는 금방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문이 가는 내용을 끊임없이 질문을 드립니다. 대답해 주시지 않으면 일주일도 걸리고, 마음에 분심이 들면 한 달도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산을 봐도 숲을 보고 나무도 보는 나의 버릇은 50년이 넘도록 매일 계속되어온 묵상의 세계입니다. 하느님과 끊임없이 만나고 말씀드리고 말씀을 듣는 귀한 시간입니다. 아무리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시간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나의 성경공부 방식을 사람들은 잘못되었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잘 한다고 격려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방법을 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교만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평생을 살았기 때문이며 사회 학문을 할 때도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박사공부도 그렇게 했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게 해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보이라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중시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표징을 보이시기 전에 사람들의 믿음을 먼저 보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믿음은 조금도 없이 그냥 자신들이 예수님을 헐뜯기 위해서 기적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믿음과 사람들의 언행이 예수님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을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볼 때도 우리는 글자를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렇다, 저렇다.’ 하고 함부로 판단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닥을 치고 있으면서 성경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없다고 푸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면서 성경의 글자만으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호언장담하는 어리석음도 자주 범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표징이 아니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표징도 따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성경을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축일2월 13일 성녀 가타리나 (Catherine)
신분 : 수녀
활동 지역 : 리치(Ricci)
활동 연도 : 1522-1590년
같은 이름 : 까따리나, 카타리나, 캐서린
성녀 리치의 카타리나(Catharina de Ricci,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의 피렌체(Firenze)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라(Alessandr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두 숙모가 있는 인근의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보내져서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서도 집안일뿐만 아니라 수녀원에서 배운 대로 신앙생활에도 충실하였다. 특히 그녀의 생애를 관통하게 될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신심을 키워나갔다. 부자 청년과 결혼을 권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토스카나 지방 프라토(Prato)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입회한 후 카타리나라는 수도명을 받은 그녀는 입회 초기에 큰 병을 앓았지만, 그 고통마저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한 은총의 시련으로 받아들였다. 완덕을 향한 모범적 생활로 존경을 받은 그녀는 젊어서부터 수녀원의 수련장과 원장직을 맡아 훌륭히 수행하였다. 장상직을 사임한 후에도 성녀 카타리나는 놀라운 신앙 체험을 한 인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예를 들어 매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혼 상태에 들어가곤 했는데, 이때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했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성녀 카타리나의 영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 것이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의견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늘 겸손함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던 성녀 카타리나는 교회의 개혁 운동에도 최선을 다해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그리고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아왔다. 성녀 카타리나는 1590년 2월 2일 선종했고,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46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병자들의 수호자인 성녀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2월 2일 또는 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가타리나 (Catherine)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