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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7일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 예레 31,31-34
제2독서 : 히브 5,7-9
복 음 : 요한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29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인은 칸트가 청혼해 주길 원했지만,
칸트는 데이트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칸트에게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칸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야 하는 이유 354개, 결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350개를 찾았습니다.
이제 결정했습니다.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4개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결혼하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구 후에 청혼하러 여자의 집에 갔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결혼의 장단점을 생각하는 동안 3년이나 흐른 것입니다.
심사숙고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루기만 하는 것은 큰 후회를 남길 뿐입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먼 훗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겠다. 사랑하겠다.”라며 뒤로 미루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 사랑한다.”라며 지금 당장 말하고 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은 미뤄지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지금 사랑해야 함을 주님께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맺으시려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으며,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겪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이 세상의 삶을 모두 거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사랑 때문에 또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는 사랑을 위해
지금 당장 결심하시고 이행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당신 사랑으로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주님의 사랑이 모든 구원이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지금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미루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남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나도 실천하겠다는 이기적인 사랑도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어떤 조건도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랑만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에는 성주간이 시작 됩니다.
오늘 우리는 파스카에 대한 고통과 승리의 이중교훈을 만나게 됩니다.
<제1독서>는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예레미아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아는 시나이 계약과는 다른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을 예고합니다.
곧 ‘새 계약’으로 당신의 법이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고 허물이 용서되고
당신의 백성과 영원히 결합될 것을 예고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가슴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마음에 법을 새겨줄 것이며,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3-34)
<제2독서>는 이 ‘새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으며,
또한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하셨고
그리하여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음’(히브 5,7-9)을 상기시켜 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셨는데,
순례하러 온 그리스인들이 제자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하고 청합니다.
여기에 쓰인 “보다”라는 동사는 단지 물리적인 외적인 형태를 보는 것을 넘어
내면적인 의미를 파악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 안에 간직된 비밀, 곧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3-26)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임과 ‘타인을 위해 죽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려면, 당신을 따라 그 죽음의 길을 가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때를 맞이하여
“마음이 산란합니다.”(요한 12,27)라고 고뇌의 마음을 털어놓으십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마르 14,36)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라고 하신 것처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12,28)하고
아버지의 뜻에 순명의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요한 12,28)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함이 곧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하시면서도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라고 순명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 이는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를 가리켜 주시면서,
마침내는 십자가의 순명으로 승리를 거두실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는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의 첫 구절을 이루십니다.
이처럼, 당신께서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입으시기만을 바라시며,
바로 당신의 죽으심으로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내시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바로 그 파스카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파스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그때가 오면,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켜 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과 영광에 우리를 참여시키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겨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지워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품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우리도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십자가의 승리를 통하여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계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의 전례는 파스카에 대해
고통스러우면서도 기쁨에 찬 묵상을 요구하는 사순절의 근본적인 주제들이 들어있다.
낮춤의 신비보다 고양의 신비로 제시되는 십자가 신비와
자아 포기와 성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권고,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 우리의 선택에 따라 나타나는 구원과 단죄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사랑의 결정적인 선물인 새로운 계약 등이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면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실 새 계약으로 결정적이고 절대 깨지지 않을 계약이라고 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파스카를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계시다.
그것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21절) 한다.
여기서 본다는 동사는 예수님을 그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루살렘 입성 때
군중이 알아차리지 못한 그 비밀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향한 독백처럼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신비스러운 점을 드러내셔서 그리스인들의 갈망을 채워주신다.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알처럼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 삶의 신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노력이다.
여기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생명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구원을 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헌신에의 초대를 말하는 것이지 죽기 위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풍요한 결실 능력을 확장하기 위한 밀알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때, 그리스도께는 최대의 영광이 돌아온다.
그리스도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우선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더욱더 큰 사랑을 표명하는 것이며,
또 이러한 행위가 인간을 구원하고 이끌어 줄 능력을 갖추기 때문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32절).
그리스도를 뵙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구원으로 이끌려 들어오는 이방인의 세계를 나타내는 첫 번째 표현이다.
십자가는 이미 그리스도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
우리는 지난 주일의 복음의 높이 들린다는 말을 만난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이라는 고통을 통해서 얻은 영광을 의미하였다.
특히 요한복음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 되기 전에 이미 높이 들리심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높이 들림이라는 사실이 십자가의 죽음에 있어
예수님의 공포와 거부감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 무서운 상황 앞에 두려움과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고 계시다.
그래서 성부께 기도하시면서 당신이 느끼시는 괴로운 긴장감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마음의 분열을 극복하고 이 세상의 역사를 위한 그 결정적 순간의 주인공이 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28절) 기도하신다.
즉, 당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를 기도하신다.
“내가 이미 내 영광을 드러냈고 앞으로도 드러내리라.”(28절).
아버지의 계시는 예수님의 전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확인이다.
즉, 예수님의 지나온 생애, 죽음을 감수해야 할 생애, 부활을 통해 더욱 빛나게 될 생애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세상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이미 빛이시며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내려지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신다.
그분을 죽이는 것은 빛을 거스르는 결정적인 죄였다.
이렇게 빛을 거부하고 단죄를 받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능력이 없는 것에 대한 심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자신을 충실히 내맡기고, 그분 사랑의 선물에 우리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사탄에 대한 승리는 결정적으로 여기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항상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는 내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께 일어났던 것처럼 육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십자가의 고통 앞에 큰 소리와 눈물로써 기도하고 간구하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구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워야 했던 당신의 뜻을 이룰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계약을 깨지 않고 무한한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완성하셨다.
예수님의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순명은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됨을 알 수 있다.
그 영광은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 사랑의 결과로 세상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들과 영원히 결합하셨기에
인간은 그분께 결정적인 사랑의 응답을 드려야 한다.
이 결합에 사랑이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분께 결합할 수 없을 것이다.
사순절의 여정은 우리를 하느님과의 만남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 가능하고, 부활을 지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매 순간 그분에게 사랑의 응답을 드리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자기를 끊는 아픔을 이겨내도록 주님께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 바로 내가 중요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구원으로 초대받은 우리의 축복된 삶을 감사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하루의 일상을 보내면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뿐 아니라 하느님께도 말입니다.
사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숨을 쉬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 감사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당신 생명을 나누어 줄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을 낳기 위해 뿌리내림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죽음은 열매를 맺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 온전히 묻히신 결과입니다.
사실 씨앗도 온전히 묻히지 않으면 새에게 쪼아 먹히든 햇볕에 타버리든,
길바닥에서 밟혀 으깨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온전히 죽어서 마침내 부활의 영광을 통해
그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사랑이요, 부활은 그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신비를 머리로는 헤아리기 힘들지만,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사랑을 통해, 순교 신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모범을 이어가는 신앙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될 때입니다.
사랑의 승리를 위해 투신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일상 안에서 밀알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상대를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이웃 간에 공동체의 구성원 간에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하고 상대의 삶과 생명을 거룩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미사참례 하실 때
앞자리부터 앉아주시면 늦게 오시는 분이 덜 미안합니다.
늦는 사람이 매일 늦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님과 함께하시려 부랴부랴 오시는데…
어떤 사정이 있어서 늦기도 하는데…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봐요…
이것도 배려입니다.
그러나 그 배려와 존중이 온전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은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17,10)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성 프란치스코)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뭐’, 또는 ‘이렇게 해줬는데 너는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니?’
‘너도 이만큼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하는 마음이 든다면
온전히 묻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밀알이 되어 썩는다는 것은 또한 ‘내가 먼저 미안해’하는 것입니다.
‘염소 두 마리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습니다.
“너 비켜”, “안돼, 네가 비켜”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한 마리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어”.
그러자 다른 한 마리가 놀라서 물었어요.
“무슨 생각?” “여기서 늙어 죽을 생각이야”(이규경).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것을 뭐라 하죠? “똥고집!”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의견과 생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내 뜻을 관철하려고 엉뚱한 고집을 피우면 서로가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네가 언제까지 그러고 있나 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러나 내가 먼저 ‘미안해’ 한다면 그것이 밀알처럼 썩는 것이고
그래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까롤로 까레또).
서로 자기의 이익에 매달리는 오늘날,
밀알이 되어 썩는 이가 없다면 사회는 점점 더 각박해지고 힘들어질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들이 스스로가 밀알이 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주장만으로 온 가족을 휘두르고 싶어 하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불평하며,
자녀들은 무조건 요구만 하고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면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정에도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세상이 악한 기운, 이기심, 두려움에 지배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인류에게 주님은
용서와 화해, 희망을 가능케 하는 사랑을 선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진다면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하는 마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바위와 마주 선 느낌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를 때 쓰는 표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요한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밀알이 되어 썩고자 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귀찮고 번거로운 생고생이 아니라
주님과의 더 깊은 사랑에로 고양되는 축복의 초대”(홍승모)입니다.
아브라함은 멸망의 위기에 처한 소돔을 위하여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롯의 구원을 이끌어 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순명으로 구세주를 잉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순명, 한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를 통해
모든 이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
결국 밀알이 되어 썩는 나를 통해서 우리 이웃의 구원에
결정적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손발을 구원의 도구로 써 주심을 감사합시다.
한 사람, 바로 내가 중요합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좋은 것을 찾지 말고 남에게 좋은 것을 찾으십시오!(1코린4,10).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무라까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있다.)”
축구 선수로서 해외에서 인정받고 많은 기록을 남긴 최초의 선수는 ‘차범근’입니다.
그는 ‘차붐’이라고 불리면서 유럽 축구에서도 인정받았습니다.
강인한 체력과 돌파력은 그의 강점이었습니다.
차범근 선수가 씨를 뿌린 유럽축구에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박지성 선수가 있었고, 손흥민, 김윤재, 이강인 선수가 있습니다.
제가 미처 이름을 모르지만,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 축구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야구선수로서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인정받고 기록을 남긴 선수로는 ‘박찬호’ 선수가 있습니다.
박찬호 선수 덕분에 저도 90년대 중반에 미국 메이저 야구를 보았습니다.
미국의 강타자를 빠른 속도의 볼로 스트라이크 아웃을 시키는 모습은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뿌린 씨가 열매를 맺어 지금은 많은 한국 선수들이 활략하고 있습니다.
김병현 선수는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서 우승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추신수, 최희섭 선수도 있었고, 지금도 4명의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1998년입니다. 한국은 IMF의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전 국민이 좌절과 절망 속에 힘들어하고 있을 때입니다.
미국의 LPGA 골프에서 한국 선수 박세리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주며 우승하였습니다.
박세리 선수는 물가에 떨어진 볼을 치기 위해서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볼을 쳤고, 그 볼로 인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로를 받았고,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 박세리 선수는 많은 우승을 하였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뿌린 씨는 수많은 박세리 ‘키즈’를 키워냈습니다.
한때는 한국 여자 골프 선수들이 우승한 골프 대회가 절반을 넘었습니다.
명실상부 한국 여자 골프는 세계 골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최나연, 유소연, 리디아 고, 박인비 선수들이 활약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선수들이 LPGA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골프를 잘 모르는 제가 이 정도를 아는 것은
그 선수들의 실력이 LPGA에서도 알아줄 만큼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한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기까지
선수들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눈물로 씨를 뿌렸기에 기쁨으로 곡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대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면담을 하면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이야기했습니다.
학생들은 어릴 때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 ‘울지마 톤즈’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 영상을 보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나도 저런 신부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의사였고, 사제였던 이태석 신부님은 멀리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선교하였습니다.
그곳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 신발을 제작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열정을 다 한 후에 안타깝게도 40대의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뜨거운 삶과 열정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사제가 되어서 신부님이 못다 한 꿈을 이루고 있습니다.
톤즈의 학생들은 신부님의 뒤를 이어서 의사가 되었고, 신부님처럼 사랑을 베풀고 있습니다.
꽃이 되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어두운 땅에서 썩어가는 것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신앙은 꽃이 되기보다는 먼저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좋아하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도 씨앗이 되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흘린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친교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씨앗이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생은 어차피 목숨을 담보로 한 투자임을 알면 인생이 단순해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
‘한국 교회사 열전’에 따르면, 정 쁘로다시오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 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습니다.
30세경에 입교하여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았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배교하여 석방되었지만,
바로 후회하고 뉘우치며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를 취소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굽히지 않고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계속 조르는 바람에 결국 41세의 나이로 순교합니다.
가끔 이런 순교자들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죽고 싶어서, 죽기 위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주식 시장에서 수익에 확실한 때에 돈을 빌려 가면서까지 투자하려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밀알 하나로 상징되는 당신 목숨을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해 투자하셨습니다.
그 투자처는 아버지였습니다. 투자 방식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인간이 어쩔 수 없는 끊임없는 투자자임을 증명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 자기가 키운 하마에게 물려 죽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 남자는 하마를 자신이 키웠으니, 하마가 자기를 물지는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것에서 보니 개가 호랑이 새끼들을 젖 먹여 키웠는데
그 호랑이들이 커서 어미 개를 지켜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개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개가 되었습니다. 자기 주위에 호랑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투자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어떨까요?
썩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습니다. 그냥 놔두는 것도 일종의 투자입니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2007)는 맥캔들리스라는 실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는 부모의 기대에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그는 아버지의 외도로 생기게 된 아들입니다.
그는 대학까지 졸업해 가진 돈 모두를 기부하고 자유를 찾아 미국을 횡단하여 알래스카까지 갑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그의 목적지는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은 그에게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알래스카에 갇혀 “행복은 함께 나눌 때만 현실이 된다.”라는 글을 남기고
버스 안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합니다.
맥캔들리스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자유는 없었습니다.
외롭기만 했고 관계를 위해서는 일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투자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인생이 쉬워집니다. 나의 밀알을 사랑이라는 땅에 묻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투자는 언제나 손실이 날까 두렵게 합니다.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액을 한꺼번에 투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버린 것의 100배를 받고 죽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먼저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청년 레지오를 하며 봉사하지 않았다면
사랑에서 오는 생명력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고 온전히 생을 봉헌하기를 결심하기까지 우리는 충분히 시험해 볼 기회가 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투자라고 생각하고 내가 투자하는 생명에
가장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대상에 투자합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투자합니다. 투자법을 압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요? 역시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아드님이 당신을 위해 투자하게 함으로써 그 열매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 결단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제자들에게 청하고 제자들은 그 말을 예수님에게 전합니다.
복음은 그들이 실제 예수님을 만나셨는지 여부는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전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밀망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보전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런 말씀들 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육칠십 년이 지난 후에 기록된 일종의 신앙 명상록입니다.
오늘 복음이 그리스 사람을 등장시켜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을 전혀 모르는 비유대인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인물이 영광스럽게 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그 인물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그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은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의 중요성이 나타났고,
사람들이 그 사실에 공감하고 그것을 큰 감동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리 중요하고 감동스런 것인 지를
구약성서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은 것이며,
그 밀알이 제자들 안에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로 끝난 그분의 생애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밀알이 썩어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뒤를 이어 그분의 삶을 실천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그들 안에 살아계시기에, 이제부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신앙인들의 삶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삶의 특징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이 하셨던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죽음의 비극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두 그렇게 실패하고 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실패의 최후를 맞이하신 것은 그 시대 유대사회의 실세였던
종교 지도자들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하느님을 믿으셨고,
그 하느님의 일을 공공연히 실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율사외 제관들은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벌을 주시는 지엄하신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자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늘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을 보아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새와 꽃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마태 6,33)
자기 한 사람의 목숨만을 소중히 생각하지 말고,
자비하신 하느님에게 신뢰하면서 그 자비를 스스로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유대교 전통이었습니다.
단,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예수님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함께 계시며 돌보아 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를 고치셨습니다.
유대교가 말하듯이 병은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교도인 백인대장의 종(루카 7,1-10)과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딸(마르 7,24,30)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은 병을 주어 사람을 벌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가 다르다고 외면하시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당신 안에 일하고 계셨습니다.(요한 5,17 참조)
예수님에게는 당신 한 몸보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병든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이런 불행한 생명들이 더 소중하였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이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지녔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존중할 인연의 범위를 자기 스스로 자유롭게 택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 있습니다.
가족도 직장 동료도 모두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만족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자기 가족외의 다른 모든 인연을 백안시하고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인연을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이 아끼시는 모든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며 사랑합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혁명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양극화를 부르짖으면서 사람들 간의
대립과 반목과 갈등을 조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셨습니다.(요한 15,15 참조)
제자들이 떠나가서 각자 자유로이 열매 맺을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존경스런 호칭으로 혹은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복장으로
제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벗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서
예수님과 같은 열매를 맺겠다고 약속한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은 자기 한 사람이 잘 되고 존경과 찬양을 받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게 처세하여 비굴하게 입신출세하고,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특권이라고 주장하는 속물근성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을 따라 맺은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실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주변의 생명들을 소중히 여깁니다.
허약한 생명들, 외로운 생명들, 고통받고 있는 생명들을 특별히 소중히 돌봅니다.
하느님은 그들도 행복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서, 버려진 이웃들을 백안시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열매 맺는 신앙이 아닙니다.
주변의 생명들이 우리와의 인연으로 기뻐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바랐을 소망을,
오늘 복음은 그리스 사람들의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동문서답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매우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알고 싶다면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가는 참된 파스카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은 뒤 다시 열매를 맺듯,
십자가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파스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당신을 뵙게 하여 달라는 이방인들의 요청에,
‘땅에서 올려진 십자가’야말로
가장 정확히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장소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사랑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면,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그 고통스러운 계획이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죽음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완전한 사랑의 장소요 그 약속(계약)의 장소인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