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
시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르는 사회적,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 말은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Gaston Pierre Marc)가 1808년 처음 사용
한 이래 사회적 고비 때마다 회자되는 단어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즈' 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 깔레' 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있습니다. 인구 12만 정도인 이 항구는 영국의 도버해협과 불과 20마일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 파리의 중간지이기도 합니다.
소도시인 이곳 '깔레' 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미술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 깔레' 시청에 전시되어 있는
프랑수아 오귀스트 로댕(Francois Auguste Rene Rodin, 1840년-1917년)의 깔레의 시민(The Burgher S Calais)' 이란 조각으로 6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조각상입니다.
이 조각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깔레' 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즈' 단어의 상징이 바로 이 로댕의 '까레
의 시민' 이기 때문입니다.
'깔레의 시민'에 얽힌 이야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1347년, 잉글랜드 도버와 가까운 거리였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집중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여 년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결국 그 말을 취소하게되고 대신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시민들에게 다른 조건을 내 걸게 되었습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 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 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 상위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 (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됩니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 들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 옷을 입고 나오게
됩니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 칼레의 시민' 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예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됩니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라고 합니다.
칼레의 항복을 기록한 당대의 문건들은 모두 약 20여 개가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 시민 대표들의 행위가 항복을
나타내는 연극과도 같은 의식 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하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위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그 무렵에는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의미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진하는 종교 의례가 있었는데,
칼레 시민 대표들의 행위는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일화를 숭고한 희생으로 윤색하고 미화한 것은 14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장프루아사르(Jean Froiss art)입니다. 그는 1322ㅡ1400년 프랑스에서의 주요 사건을 기록한 5권의 연대기 작가로 유명하지만, 현대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록의 교차 검증을 통해 그의 연대기가 사건 발생일, 발생지 등의 정보가 부정확하여, 애국적인 성향에 따라 많은 부분 왜곡이 있었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칼레의 항복 속설 또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장 프루아사르의 애국심이 투영되어 민족 정서에 호소하는
미담으로 가공된 것입니다.
이처럼 당대 많은 기록 중 하나에 불과했던 프루아사르의 해석은, 16세기에 이 사건이 다시 프랑스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면서 대중의 감성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어 민족주의가 발호하자 역사 교과서들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을 외세에 저항하며 동료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한 애국적인 민족 영웅으로 부각시켰습니다
결국 ' 칼레의 시민' 은 후대의 필요에 의해 재창조된 신화였지만, 깔레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즈(의무) 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하며 몇백 년이 지난 후 칼레시의 요청으로 로댕이 10년 작업 끝에 ' 깔레의 시민' 을 만들어 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국방에서 비롯된 애국정신에 바탕을 둔 '노블리스 오블리주' 는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일수록 그에 따르는 사회적,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