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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피하는 숫자 4(四)의 깊은 뜻
우리가 기피하는 숫자 4는 지상(地上)의 세계(世界)를 뜻하는 숫자입니다.
조물주께서는 4를 염두에 두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나를 둘러 싸고 있는 완전한 상태를 하나로 묶은 망라하는 숫자 '완전성' '전체성' '질서' '합리성'을
상징(象徵)합니다.
'4(四)'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는
"東西南北"의 기본방위(基本方位)이며,
"春夏秋冬"의 4계절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만듭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며 많은 이들 가슴에 소망을 담아주는 달(月)은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로 4가지
모양을 달리합니다.
"물, 불, 공기, 흙"은 고대 철학자가 주장한 만물을 구성하는 4원소입니다.
공간으로 측정하려면 4가지 방법을 써야 합니다.
'길이, 넓이, 깊이, 높이'입니다.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사통팔달(四通八達) 막힌 곳이 없이 모든 방향으로 통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4는 4복음서 신약성서 가운데,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에 관하여 기록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4가지 책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실천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기준'을 ‘사무량심(四無量心)'이라 하여 모든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迷惑)을 없애주는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을 의미합니다.
이를 '마음'의 4가지 방의(芳意)라고 합니다.
사찰을 가보면 동 서 남 북으로 4천왕(天王)을 두고 있으며,
4종류의 영적(靈的)인 동물로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가리켜 4령(四靈)이라고
부릅니다.
주작(朱雀):
남(南)쪽 방위(方位)를 지키는 신령(神靈)으로 여겨진 짐승
현무(玄武):
북(北)쪽 방위(方位)의 물 기운을 맡은 태음신(太陰神)을 상징하는 상상의 짐승
오늘 날 문명을 이루는데 원천(源泉)이 된 문명(文明)인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 문명
중국 문명
이를 세계 4대 문명이라고 합니다.
세계 4대 성인((聖人)으로 공자, 석가모니, 예수, 소크라테스를 추앙합니다.
4대 문명(文明),
4대 성인(聖人),
4천왕(天王)같이
4를 주로 쓰는 이유는 4라는 숫자에는 '완전함', '공정함'이 있고 가장 안정(安定)된 숫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건물의 대부분은 사각형을 기본으로 만들어 집니다.
땅에 기초(基礎)로 가장 안정적인 구조(構造)로 지을 수 있으니까요.
생년월일(生年月日)을 토대(土臺)로 삶의 '길흉화복'을 점(占)칠 때는 사주(四柱)를 보고, 팔다리가 튼튼한 걸
가리켜 사지(四肢)가 멀쩡하다고 합니다.
야구(야구)에서 대표적인 강타자는 '4번 타자'입니다.
수영과 육상에서 기록이 가장 좋은 선수가 '4번 레인'(lane)에 배정받으며,
지구인의 축제(祝祭)라 불리는 월드컵(World Cup)과 올림픽(Olympic)은 '4년 마다'열립니다.
모두가 일상에서 실천하면 세상을 '아름답게'해줄 거라는
'4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측은(惻隱)하게 여기는 마음인 '인(仁)'.
불의(不義)를 부끄러워하고 이득(利得)이 있는 일 앞에서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하는 마음인 '의(義)'.
남을 공경하고 사양하고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인 '예(禮)'.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 학문 연구에서 진리를 밝히는 마음인 '지(知)'.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 가지 성품 '어질고', '의롭고', '예의 바르고', '지혜로움'인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입니다.
행운(幸運)의 '크로버' '네잎'입니다.
우리가 기피(忌避)하는 숫자 4(四)의 깊은 뜻
'숫자 (四) '4' 는 지상(地上)의 세계(世界)를 뜻하는 '숫자'라는 것을 잘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
숟가락 놓는 날까지
세상에 태어날 때는 주먹 쥐고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땡전 한닢 갖고가지 못하는 거 알면서 움켜만 쥐려고 하는
마음과 알량한 욕심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 바람이 말합니!
바람 같은 존재이니 가볍게 살라고~
🌦 구름이 말합니!
구름 같은 인생이니 비우고 살라고~
🏞 물이 말합니!
물 같은 삶이니 물 흐르듯 살라고~
🌺 꽃이 말합니!
한번 피었다 지는 삶이니 웃으며 살라고~
🌲 나무가 말합니!
덧없는 인생이니 욕심 부리지 말라고~
🗻 돌이 말합니!
그래도 현실은 냉정하니 마음 단단히 가지라고~
🌊 파도가 말합니!
부대끼며 사는 삶이니 상처받지 말라고~
🏜 땅이 말합니!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니께~ 내려 놓고 살라고~
사랑하는 우리님들
우리 한번뿐인 인생~ 숟가락 놓은 날까지~ 산같이~ 바람같이~ 물같이~ 구름같이~
가고픈 데 가고~ 먹고픈 거 먹고~ 하고픈 거 하고~
보고픈 사람 보며~ 행복하게 살아 갑시~
그게 남는 거랍니^^ 오늘도 당신을 위한 행복메시지였습니다.
🍇화류춘몽-가수 이화자🍍
👇
https://m.youtube.com/watch?v=RPqeXdfWJmc
동족상잔의 비극 6.25 사변(事變)과 그 참혹한 전화(戰禍)들
폭풍작전 암호명 '폭풍 224'
폭풍 작전은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을 명분으로 조선인민군을 삼팔선 이남으로 진군시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며 벌어진 6.25 사변의 첫 번째 전투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XClQDpIyk8
동족상잔의 비극 6.25 사변(事變)과 그 참혹한 전화(戰禍)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불법 기습남침 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시작 되었다.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고 6.25 전쟁이 일어난지 63주년을 맞아 그리 먼 옛날도 아닌 시기의 사건들은
어두운 역사의 한 단면으로 만 여기고, 잊혀져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아래의 사진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이나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다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넷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한국전쟁의 기록물들을 수집하여 주제별이 아닌 年, 月, 日 순서 대로 나열 해 보았다.
참고로 6.25 사변이 전개되는 과정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싯점부터 전쟁 전의 일부 모습도 순서대로
나열 해 올린다.
1년전 네이버에서 작성한 것인데 이미지 크기가 작아 확대한 것도 있으나 그 이상일 경우 이미지 상태가
양호하지 않아 크기를 600 픽셀 이하로 했으며 자료 취합과 편집하는 과정에서 혹 잘못 된 것이 있더라도
양해를 하고 지적을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총 370여 개의 이미지를 하나의 게시물당 50개까지의 이미지를 올리게 되어 있어서 6~7부로 나눠서
올리겠다.
우선 1945년 해방부터~1950년 9월 28 서울 수복까지 [1]~ [4] 196개 이미지를 먼저 올리고 나서
1950년 9월 28일 서울(1차) 수복 후부터 ~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있기까지[1]~[3] 187개
이미지를 올리겠다.
1945년 해방 직후 서울 소공동 일대와 세종로 모습. 소공동 상공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임. -LIFE지-
36년의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을 맞은 수도 서울은 이러 했다. 하지만 전화(戰禍)로서의 파괴는
아닐지라도 일제의 식민통치때 우리 민족과 전통문화의 각종 말살 정책은 더 심했고 치욕적인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1945년 마포나루 모습.
이때만 해도 한강 하구에서의 물길이 열려있어 마포나루는 서해 해산물의 집산지였다.
남북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마포 또는 건너편 여의도나 영등포 지역에 노량진보다 더 큰 규모의 수산시장이 들어
섰을 것이고, 한강 하구부터 준설을 통한 대형선박이 접안 할 수 있는 항포구로 발전되어 해상과 연결되는
국가와의 교역장이 되었을 수도, 또는 여객선이나 유람선의 선착장 터미널 등 복합 기능의 유통단지가 마포 및 여의도에 조성 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1945. 9. 9. 해방 후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고 있다. <미국 문서보관청 자료>
36년이란 긴 세월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고 우리의 힘이 아닌 외세에 의해 갑작스런 해방을 맞아
우리는 준비한 것이 없었다. 정부수립시까지 미 군정이 계속되니 진정한 독립이라 할 수 있겠는가!
1945. 9. 9. 미군들이 서울시민들의 환영인파에 싸여있다.
조선총독부
(김영삼 대통령이 Dome 부분을 쇠톱으로 잘라 보관하고 철거하였다.)
1945. 9. 9. 조선총독이 총독부 홀에서 미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1945. 9. 2. 동경만에 정박한 미태평양점령함대 기함 미주리 함상의 맥아더 사령관 앞에서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상과 천황 대리인단이 일본국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1945. 10. 12. 부산항 부두에서 일본군들이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군들에게 철저하게 검색을 당하고 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반도를 5년간 신탁통치 한다는 결정을 발표하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시위대.
1945년 10월 27일 미국 번즈 국무상, 영국 베번 외상, 소련 모르토프 외상이 모스크바에 모여 결정한
신탁통치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1. 코리아를 독립국가로 재건하기 위해 임시적인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코리아를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 영, 소, 중 4개국이 공동관리하는 최고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4. 남,북부 코리아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긴급한 문제들을 심의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2주일 이내
소집한다 등...
우익은 신탁반대 시위를... / 좌익은 신탁찬성 시위를...
좌익도 처음엔 신탁 반대를 외치다가 소련의 꼼수로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고 주장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찬탁(贊託)으로 나서게 되었다.
광복 직후 좌,우 대립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격화시킨 것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거슬러 올라가서, 모스크바 三相會議의 구체적 결정 이전에 이와 관련된 '얄타회담'이 기억 난다. ↓
1945. 2. 4 ~11에 열린 소련 흑해연안의 얄타에서 미,영,소 수뇌들이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3대 추축국들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미국측은 일본패망 후 극동지역의 문제를
잘못 판단한 내용이 있다. 그때 소련을 개입시키지 않았다면?... (생략)
1945년 해방 후 북한 주민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
조선인민군 창군 기념일
단상 뒤 양쪽으로 게양된 태극기가 인상적이다. 당시에는 북한의 정식 국기가 없어 태극기로 대신했다.
군기를 선두로 주석단 앞을 행진하는 조선인민군.
1946. 1. 5 미군정청(중앙청) 앞 신탁통치 반대 시위.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47. 5. 25. 개성 인근의 38선 미군 초소, 그때만 해도 복잡한 철조망은 없었다.
1947. 5. 31 남대문에서 바라본 서울역. AP통신 맥스 데스퍼 촬영
1947. 5. 31 조선공산당 산하 단체인 전평회관. AP통신 맥스 데스퍼
1948. 5. 8 황궁우(皇穹宇)와 서울시청.
1948. 5. 8. 다가올 5.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들이 선거 방해를 염려하여 죽창을
거둬들이고 있다.
1948. 5. 10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5.10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1948. 5.10. 투표장에 들어가는 유권자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5월 31일에 선거위원회의 소집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제헌의회가 개원되었고, 국회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를 선출하였다.
그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
1948. 5. 10. UN감시 아래 남한 단독 총선거. 전남 화순군 능주면 투표소
1948. 5. 10. 선거방해사범으로 체포된 5인, 맨 왼쪽은 장택상을 암살하려다 체포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
1948. 5. 31. 국회 개원식 날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북청년단들이 소련군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를 하고 있다.
1948. 5. 31. 대한민국 헌정사상(憲政史上) 최초로 구성된 제헌국회
이승만 의원이 의장석에 있는 것을 봐선 절차를 거친 후 제헌국회 초대 국회의장이 국회 개원식을 진행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인 만큼 처리 할 것이 많아 1948년 5월 31일부터 같은 해 12월 18
일까지 총 203일 간 열렸다.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도 뽑고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때이다.
남한 단독 선거 반대하는 북한인의 시위, 남조선에서 유엔위원단 활동을 반대 시위하는 북쪽 사람들은
오히려 즐기며 만세를 부르는 듯한 모습이군요.
1949. 8. 15. 북한 인민군의 해방 4주년 기념식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두개의 태극기 계양법이 각기 다르다.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선포하자 중앙청 참석자들이 만세 삼창을 하고있다.
1948. 8. 15. 정부수립 기념 국군 시가행진. 서울역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는 투표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찬성41, 반대6, 기권1이라는 압도적인 지지.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은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됐다는 점에서 훗날 대한민국의 생존 및
발전과 직결된 더없이 중요한 외교적 승리 였다. - 조선일보
1949년 세종로 모습.
유엔에서 대한민국을 합법정부로 승인한 유엔위원회 환영과 나아가자! 북진통일로!란 문구가...
1949년의 숭례문 모습. ‘유엔위원단 환영’
1949년 서울 중앙우체국(현재는 신축한 건물이 서있다)
이 사진이 찍히고부터 1년 뒤, 1950년의 6.25 전쟁 중 파괴되어 사라지게 되는 옛 중앙 우체국 모습.
일제 강점기에는 경성우체국이라고 불리웠다. 붉은 벽돌의 청동 지붕이 있는 19세기 풍의 르네상스식
건물로 건축사에 그 미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으나, 6.25 중 애석하게도 소실되고 말았다.
1949년 보신각 사거리. 화신백화점과 종로거리
https://www.youtube.com/watch?v=9-f-T4HjHU4&t=139s
1963년에 서울에 왔을 때, 중형의 처제이며 국민학교 여자 동기이기도 하여 친하게 지낸 친구가 명동예술극장에
태현실이 출연한 '학 외다리로 서다'라는 연극에 초대하고, 화신백화점을 가리키며 엘리베이터도 있다고 했고,
현 인 다방도 가리켜 주었다. 저녁 식사도 하고, 아주 예쁜 자기 여자 친구를 초대하여 함께 클레식 음악감상실에
들어가서 많이 듣던 피아노 곡이 나왔는데 그 예쁜 여자 친구가 '송어'라고 했다. 슈베르트 작곡인데 그때 곡은
알아도 곡명이 떠 오르지 않아 동기에게 체면이 서지 않아 챙피했다. 주선율은 계명창으로도 부르는데 곡명이 기억 안 나다니... 지금도 어이가 없다. 마지막으로 참새구이집에 가서 정종도 마셨는데, 참새구이는 평생 처음
먹어보았고, 비위에 맞지도 않았는데 정종이 비위를 가셔 주었다. 국민학교 선생 월급으로는 턱도 없다. 조달청에
근무했는데, 중형이 '아마 사흘간 번 돈을 삼촌에게 다 써 버린 것 같다'고 했다.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큰 조카가 운산 가족중 경기중,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문리과대학에 처음 입학했다.
1949. 시청 앞. 이때는 시청로고가 없다.
1949년 공공기관의 경계를 서고 있는 경찰. 기관총과 착검을 한 소총이 일본제?..
혹시 서울시청 측면과 건너편에 부민관극장(50년 수복 후엔 국회의사당)을 보고 있는 게 아닐가?
1949년 어디인지 궁금...
1949. 을지로입구에서 본 광교 통 모습.
아마도 교통사고 내지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 경찰이 유리파편을 치우고 있고, 거리에 구경꾼이 모여 있다.
당시의 서울 도심에서의 사고는 큰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1949. 시장 풍경. 윗쪽 건물은 많이 본 모습인데 생각이 ?...
1949. 옹기점이 있는 시장 풍경.
1949년 옹기점 가장자리의 노점상. 파는 것은 무엇인지.. 연엽초?.. 한 아낙이 장죽을 물고 있다.
(위의 사진 옹기점 오른편 가까이..)
1949년 요기거리를 파는 장수
1949년 팔고 있는 것은 젓갈? 고추가루?
1949년 김장시장
1949. 서울역 앞이라는 설명이...
1949년 출처지의 설명은 서울역에서 본 남대문이라고 되어있다.
1949년 상업 은행의 전신인 조선상호은행 종로 지점의 모습.
1949년 조선상호은행 용산지점.
1949년 담배를 파는 노점상. 당시엔 담배 제조기술이 없어 양담배를 팔았다.
1949년 할아버지 담배장수
1949년 식당이 있는 거리. 여기도 담배장사가 보인다.
6.25 전쟁 ~ 1950년 10월 초부터 1953년 7월 휴전까지 - [1]
(187개 이미지)
1950. 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국군용사들
1950. 10. 1. 한국전 발발 2개월 후 창설한 육군 제 11사단(화랑부대)가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고 있다.
1950. 10. 초 38선(한탄강)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한국군 용사들
1950.10. 1. 38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유엔군.
1950. 10. 7. 불타고 있는 김포 비행장.
1950. 날짜 미상. 죽은 자를 바라보고 있는 유엔군 모습. 고지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총탄이 관통한 철모형태를 봐서는 북한군 시체로 보인다. 오른쪽 아래는 얼굴이 함몰된 시체도 보인다.
1950. 목숨을 잃은 한 군인옆에 총알이 관통한 철모가 놓여있고 손에는 칼에 베인 듯한 자국이 보인다.
포로로 잡힌 인민군을 미 헌병에 의해 후송도중 차를 세우고 중군기자가 촬영하고 있다.
1950. 10. 11. 서울 교외의 부서진 북한군 전차 위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1950. 10. 아기를 업은 아낙이 망연자실하고 있는 표정이 역력하다.
피난갔다 돌아오니 집도 세간살이도 모두 폭격에 부서져 버렸다.
(부서진 집 한켠에 희귀한 물건이 놓여 있는데 철제 난로가 아닐까?..)
날짜 미상. 북한군의 만행 양민학살 현장
1950. 10. 12. 원산의 북한군에 의해 학살 된 시신들
전선에 투입되는 학도병
부상당한 학도병과 미군 병사
1950. 10. 12. 청진항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하고있는 미 전함 미주리호.
이에 앞선 9월 13일 인천상륙 이틀 전 미주리함은 상륙장소를 속이기 위해 서해의 인천이 아닌 동해바다
삼척 앞의 먼 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인천상륙의 성공은 기만작전이었다.
1950. 10. 12. 미전함 미주리호가 청진 앞바다에서 함포사격하는 모습.
1950. 10. 12. 위와 같은 이미지 컬러사진.
1950 10. 12. 미주리호
날짜 미상. 북한군의 만행 양민학살 현장
1950. 10. 13. 경기도 파주, 참혹하게 학살된 시신들.
1950.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깃발을 바꿔야만 했다. 함흥자치위원회 중앙리지부 깃발이 보인다.
1950. 10. 13. 함흥의 우물에서 공산군에 의해 학살된 시신을 건저 올리고 있다.
1950. 10. 18.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멀리 북악산과 중앙청 돔이 보인다.
미국의 '에치슨라인 선언'으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을 악용 해
개전 할 계획에 김일성은 남침 전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의 참전을 약속
받은 바 대로 1950년 10월 중순에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 몇 차례에 걸처 대규모 병력이 입북을 했다.
1950. 10. 16. 입북하는 중공군을 환영하는 북한 신의주의 시민들
중공군 한국전쟁 개입 -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붕괴되어 가고 또 한국군 및 유엔군이 38선을 돌파
진격하자 아무런 통고도 없이 한국 전선에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25일 국군 제1사단 15연대가
개마고원지구 운산에서 최초로 중공군 1명을 포로로 잡았다. 포로의 진술에 의하면 벌써 동년 10월 중순에
약 2만명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선에 투입 되었다는 것이다. 10월 29일에는 동부전선에서도 3명의
중공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11월 5일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였다고 유엔에
보고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함으로써 국토의 전역을 거의 수복하고 조국통일을 눈앞에 둔 우리
국군은 다시 후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50. 10. 19. 압록강을 건너 입북하는 중공군 40군 병력들.
설명이 잘 못 됐는지 10월 중순인데 압록강이 얼어 중공군 병력이 걸어서 건너서 입북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날짜 미상. 결사 항전을 외치는 중공군 병사들, 선전용 사진으로 추정
북한의 기와집 앞의 중공군이 따발총으로 불리는 ‘슈파긴 기관단총’을 파지(把持)하고 있다'
슈파긴 기관단총 42
날짜 미상. 중공군, 북한군 수뇌부와 김일성.
날짜 미상. 북한지역 전선을 살펴 보는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
1950. 10. 19. 함흥에서 북한군은 300명의 사상범들을 동굴속에 가두고 질식사시켰다.
1950. 10. 20. 400여 명의 낙하산 부대가 평양 부근에 투입되고 있다.
1950. 10. 국군입성 평양시민 환영대회.
1950. 10. 국군 평양입성 환영대회 - 국가기록원 자료.
1950. 10. 20. 평양 비행장에 내린 맥아더와 워커장군
1950. 10. 22. 평양 인민군의 북한주민 학살 현장.
1950. 11. 1. 폐허가 된 서울
1950. 11. 1. 서울 중앙청 앞 지금의 문화관광부 자리.
1950. 11. 1. 황해도 평산에 진격하는 유엔군, 이를 지켜보는 주민도...
1950. 11. 2. 원산의 한 성당. 신도들이 포격에 부서진 잔해를 치우고 있다.
1950. 11. 2. 적십자사에서 피난민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있다.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
1950. 11. 2.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고 있다.
1950. 11. 6. 북한의 어느 농촌. 전란 중에도 추수를 하고 있다. 바람개비로 알곡을 가리고 있다.
비행사의 생존장비.
한국전 당시 유엔군 비행사가 휴대한 생존장비에 포함된 것으로 한,중,일,영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대사9회 재구 동기 서향(瑞香) 하국자 서예가가 보내준 글 편집